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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_ 헤테로토피아로서의 도시, 그리고 대구
18/01/02 09:23:03 아트코리아 조회 2712

문화칼럼_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파생어다. 철학자 푸코가 1966년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heteros)와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 
(topos)를 합성하여 만들었다. 헤테로토피아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다른 장소’이다.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다른 장소’ 
로서의 상징을 가지는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 
들. 일종의 반(反) 공간’으로 규정한다. 처녀가 처녀성을 잃는 장소는 자신의 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 
떤 곳도 아닌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래서 푸코는 처녀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행위를 헤테로토피아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한 
다. 18세기의 서구 식민지도 ‘헤테로토피아의 고유한 위광’에 빚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영국의 청교도 사회는 미국에 절대적 
으로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이 현실 속에서 추구된 사례이다. 

나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쓴 『반란의 도시』(2012)에서 처음으로 접하였다. 하비의 책을 읽으 
면서, 나로서는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헤테로토피아라는 단어에 내내 집중하였던 기억이 난다.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존 
재하는 데 반해, 헤테로토피아는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라는 설명은 무엇보다도 로맨틱하였다. 젊은 시절 유토피아를 향한 무모한 질주를 서로 상찬하며 부추겼던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는!(우리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골방에 모여 목청이 터져라 무한반복 부르고 놀았던 세대이다.) 게다가 ‘도시’가 헤테로토피아로 존재 가능하다는 주장은 전혀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도발이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유토피아의 고유한 위광을 선사 받은 헤테로토피아라는 발상은 그 자체만으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다. 
하비는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있어 사실상 푸코보다는 르페브르에 더 많이 의존하였다. 르페브르는 그의 책 『도시혁명』(1970)에서 헤테로토피아를 ‘지배적 공간과는 이 질성을 보이는 차이의 공간’으로 정의한다. 그곳에서는 다른 무언가를 ‘실’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장소에서 헤테로토피아 공간을 창출하게 된다. 르페브르의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공간에서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푸코와는 구별된다. 르페브르와 하비는 도시 내부에 이미 무수한 실천의 방안이 존재하고 도시 자체가 다양한 대안적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도시를 헤테로토피아로 간주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실천과 일상에서의 지속적인 저항 
각설하고, 현대 도시가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여러분은 동의하는가? 매일 온갖 종류의 일상사에 부대끼며 그 속에서 겨우겨우 삶을 건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도시가 지금과는 ‘다른’ 그 어떤 대안적 삶이 가능한 장소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주장에 여러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더 현실적인 질문을 하자. 고담 도시라고 조롱을 받고 있는 대구가 헤테로토피아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대구는 근대도시로의 성립 이후 국가주의에 포섭되어 도시 발전을 국가 운영 방식에 완전히 종속시켜 왔다. 일제 강점기에 식민도시로 재탄생되는 과정에서도 그러하였고, 개발연대에 산업 도시로서의 위상도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국가의 직접적 개입이 약화되고 시장의 주도권이 한국 사회 전반에 강화되자 대구는 빠른 속도로 그 위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청년은 빠져나가고, 낡고 시들해져버린 국가주의 담론이 사람들의 일상을 여전히 지배하며 도시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미 누구도 들으려고 관심 가지지 않는 타령조의 국가주의만 늘어놓다가 타이밍을 놓쳐 허둥거리고 있고, 더욱이 새로운 시장 만능의 게임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도시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힘든 현재의 상황은 어쩌면 대구로 하여금 헤테로토피아를 꿈꿀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이야말로, 지배적 공간과는 이질성을 보이는 차이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도시 혁명의 가장 성숙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국가주의를 해체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일상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장소’를 찾아가는 시급한 실천의 하나라고 믿는다면 대구야말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도시이다. 국가주의 매듭이 가장 강고한 대구에서 도시 유토피아를 위한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면 한국 사회는 새로운 전환을 위한 중요한 단절을 경험하게 될 터이다. 키에르케고르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일컬어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모순적 상황에서만이 사랑이든 혹은 혁명이든 숭고한 돌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 역시 ‘헤테로토피아는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은 데 그 원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작은 실천과 일상에서의 지속적인 저항이 도시를 헤테로토피아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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