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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나무그늘 기획초대 展 " 정은숙 "
11/09/02 09:48:32 관리자 조회 26702

 

나무그늘 기획초대 展

 

" 정은숙 "

 

 

나무그늘 갤러리&북 카페 전경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 135호

 

나무그늘 갤러리 & 북 카페는 신세계타임스퀘어 내에 위치한  1937년에 지어진 한국최초의 주식회사 경성방직공장으로 등록문화재 제 135호입니다.

 

 

2011. 9. 6 (화) ▶ 2011. 10. 5 (수)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가 441-10 나무그늘 gallery&book cafe

경방타임스퀘어 단지 1층 | T. 02-2638-2002

 

 

내가, 여기 있어요Ⅱ_72.5x60.5cm_장지, 수간채색

 

 

매혹적인 소통을 위한 암시

- 정은숙 개인전에 부쳐 -

 

주성열 (예술철학, 세종대 겸임교수)

...들어서며

정은숙은 삶의 직접적인 내용을 걸러내 예술이 추구하는 본질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짐멜의 표현을 빌자면 실제적인 것에서 미학적인 것으로의 귀환, 즉 삶에 편입되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도록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고 현실을 반영하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세계를 탐색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환영적인 공간에 몽상적 사물과 동화적 이야기로 가득하던 이전의 그림과는 차별을 두고 있다. 묘사와 이야기에 치중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내적인 시선을 겸허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내용은 추상으로 더욱 굳건하여 방향은 잃은 적이 없어 보이고, 표현을 자제하는 겸손함과 자기표현을 삼가는 자존심도 있다.

 

그림은 서정성 있는 풍경도 아니고 인위적 조형물을 표현한 것도 아니다. 거대한 줄기와 잎 그리고 꽃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모서리 혹은 협소한 부분에 작은 집과 그 집을 지키는 날지 못하는 파랑새가 있는 다소 도식적인 이미지가 전부이다. 전체적으로 맑고 화려한 풍경으로 보이지만 사회적 가치로 꾸며지면서 강제로 제거 되어버린 공간을 예견하는 듯 조금은 불안하다.

 

잡념 없는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납작한 색면은 과거의 것을 포용해서 새로운 형식을 세우려는 열린 방식이다. 수많은 콤플렉스를 방어하고 행복한 몽상이 욕망을 왜소하게 만드는,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낭만적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눈앞에 펼쳐진 구체적인 삶과 초월적인 세계 혹은 유토피아적 환상이 원근법으로 배치되어 있는 인공적으로 구축한 세계를 절대적인 형상과 색으로 무장하고, 묘사가 묘사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에서 벗어나 간결하게 배열하고 단순하게 도식화시킨다.

 

 

내가, 여기 있어요_117x91cm_장지, 수간채색

 

 

...바라보며

어떠한 섭리도 포함하지 않은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공간은 오히려 동양화 전공자의 풍경 혹은 산수화로 읽혀지기에 자연스럽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적막감을 그린 풍경의 빛나는 색채는 슬픔이다. 리드미컬하고 유기적이어야 할 가지는 생명력을 잃었고, 선율은 그들만의 타령이며 잔치이다. 저 세계의 풍요로움이 이 세계의 헐벗음이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꽃들은 채워질 줄 모르고 끊임없이 뻗어가는 욕망의 알레고리다. 꽃 봉우리는 매설 된 지뢰처럼 불온하기만 하며, 꽃은 스스로 키를 책임지며 성장하지는 않는다. 구름도 몰아내고, 달도 뜨지 않고, 새가 사라진 적막한 하늘에는 스스로 생성하지 못하는 조화(造花)로 가득하다.

 

꽃에 대해 말하자면, 작가는 영원히 존재하거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조화(造花)를 생화(生花)보다 좋아한다고 한다. 생화는 하나의 생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방식이어서 조화의 이성적인 가치와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영원불변의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생명의 저장고인 죽음, 죽음은 영원을 마련하고 사라진다. 생명의 진정한 실체는 죽음이지만 소재가 인공적이기에 죽음은 순환되지 못하고 일회적이다. 꽃으로 가득한 세상이 오히려 답답할 뿐이다.

 

사실 생명을 구성하는 것들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경계에 놓인 생명은 가장 선열한 색으로 표현되지만 그림에서의 광채는 대단하다못해 찬란하고 눈부시다. 이 잘못된 세계, 편협함으로 균형이 깨진 세계, 착취된 공간은 넓고 눈부시고, 어느 곳이나 균질한 모습으로 선명한 길을 만들어 간다. 사회적 표현에 성공하지 못하는 재능은 결국 성장이 아니라 자기파괴에 이르고 넓은 세계에 산재한 고독들을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나타낸다.

 

어떤 이에게는 색이 화려함의 상징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암흑일 수 있다. 순수하다는 것은 배제를 통해서 갖춰진다. 어떤 곤궁한 생활도 그 끝은 순결하고 비범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반짝거리는 화려함에 둘러싸인 사물 뒤에는 인간의 힘으로 감량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있다. 화려함의 크기만큼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이다. 적막한 공간은 어떤 종류의 섭리도 포함하고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여기 있어요_30x33cm_장지, 수간채색

 

 

길처럼 보이는 줄기에는 성공 혹은 성공을 잠재하고 있는 작은 봉우리가 매달려 있다. 허공의 길이 이상하긴 해도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다. 길은 거침없고 정당하고 당당해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이 언제나 허공을 맴돌듯 상승하는 길만 있고 돌아오는 길은 없다. 줄기와 마찬가지로 가지에도 드문드문 잎이 있거나 아예 사라지고 없다. 세계는 안쓰럽고 불행하면서 그렇게 도덕으로부터 어긋나 있다. 길은 환상이고 현실이지만 머지않아 찾아 올 배반의 행로일 수 있다.

 

새가 앉아있는 집은 일상적인 삶의 터전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작은 창의 흔적만 남겨 놓고 거의 언제나 닫혀있는 집의 적막함은 엄숙한 성찰인지 낮은 숨결을 고르는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며, 모든 것에서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깨끗한 공간이지만 휴식을 누리기 힘든 공간, 어둠이 있을 수 없는 잠 못 드는 그림 속 풍경은 쉼마저 없어 피로가 축적되고 있다. 현실과 타협이 안 될 만큼 멀리 가버린 상황, 흔적만 남은 창이 있는 작은 집은 이미 공간의 변두리에 서 있음을 암시한다. 연극 ‘1동 28번지 차숙이네’처럼 작가는 자신을 닮은 인생 자체를 담지한 집을 과거에도 지었고,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지을 것이지만 이미 욕망의 수단으로 변해버렸기에 집은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을 존속 가능하게 하는 휴식하고 머무는 공간이라는, 소박한 집의 참다운 의미는 사라져가고 있다.

 

파랑새는 작가의 아바타로, 세상에 나와 서성거리다 너무나 작아져버린 집, 시간이 흘러 왜소해진 삶만큼이나 작아져 버린 집을 그는 떠나지 못하고 지킨다. 마치 발이 커져서 신을 수 없는 신발을 고이 간직하려는 심정처럼 애처롭다. 세상을 바꾸려하거나 변화를 기대하지 않으므로 이는 결핍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는 순간 희망이 사라져버리리라는 두려움으로 가장 늦게 달려가는 예술가의 몫을 지키고는 있지만 가장 늦은 자를 기준으로 하는 원칙이 아니므로 아쉬움이 더하다.

나약해 보이는 작은 창을 가진 집과 너무 오래 부른 노래로 목소리를 잃은 파랑새는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거꾸로 서있는 배를 타고 낯선 곳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이미 정화되어 버린 세계가 아닌지 궁금한 와중에도 작가는 거짓으로 꾸며진 빛을 발하는 세상과의 소통에 집착한다. 비유는 불분명한 것을 대신한다. 말하지 못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 제시하여 투명해 보이도록 한다. 존재가 확실할수록 그 증거는 더욱더 가녀린 것 속에서 발견 된다.

 

 

내가, 여기 있어요_73x61cm_장지, 수간채색

 

 

...나가서며

그림과 거리두기를 하고 보니 이미 오래 전에 진경산수를 잃고 삶의 영역에 풀 한 포기 두지 않으면서 점령 가능한 곳에만 관심을 가지는 현대인의 공간이다. 언뜻 보아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너무 많아서 보이지 않을 뿐, 군중 속의 고독한 자는 군중이 벽으로 보인다. 꽃은 사람 집단의 모양새, 그들이 뽐내는 성공일 것으로 그 이면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하다. 파랑새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소통을 지향하는 파랑새의 외침이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유배된 새는 순결한 기억과 접어놓은 근심을 버리지 못해 그렇게 바라만 보는 작가의 자화상인 듯 외롭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 시골 정류장처럼 답답하고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진다. 세월은 가고 길은 끊기고, 그렇게 존재는 잊혀져갈 것이다. 화려한 현실만큼이나 좌절도 깊어진다. ‘여기, 내가 있어요!’라고 외치는 작가의 능동성은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

 

미적 상상력의 끝에는 민화와 아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던 미술치료사에 닿아 있다. 자기반성을 통해 그려지는 그림은 감정에 인색하고 많은 것을 생략한다. 삶의 성찰이 초라해서가 아니라 말을 아끼거나 미래가 그렇다고 전하려는 것이다. 알레고리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진정한 세계의 시공을 버리거나, 사소한 엠블럼들이 어느 순간 구슬 구르듯 한 곳으로 모여들어 폭력적인 구세주를 향한 응답 없는 기도 같은 생명력이 제거된 화려함만을 보는 듯하다. 형식에 비해 내용에서 나타나는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조망이 협소해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속한다. 물론 간절함, 진정성 등이 작품의 성격을 규정짓기는 하겠지만 넓은 시야를 가짐으로써 작가나 감상자에게 적극적인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순수가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림 안에서도 밖에서처럼 원근법으로 밀려나는 삶의 형식도 같은 이유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방황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티끌도 먼지도 쉼 없이 두리번거리지 않은가. 작가를 대신해 말을 많이 했지만 그의 작품 전부를 말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는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하지 못한 말들은 작가에게 넘긴다. 이론으로부터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부터 담론이 도출되는 평범한 진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있어요Ⅱ_53x45.5cm_장지, 수간채색

 

 

내가, 여기 있어요_80.5x100cm_장지, 수간채색

 

■ 정은숙

 

2011 세종대학교 회화과 대학원 수료. 한국화 전공

 

개인전  | 2011 내가, 여기있어요Ⅱ (나무 그늘 초대전, 나무그늘 갤러리 영등포점) | 2011 내가, 여기 있어요 (가나 아트 스페이스, 서울)

 

단체전  | 2011 광주 아트페어 | 2009 제 11회 지성의 펼침전 | 2008 일본 도쿄 현대미술전 | 2006 국제 창작미술 초대전

 

수상  | 2007 | 제 24회 대한민국 신 미술대전 입선 | 2006 | 제 20회 대한민국 회화 대전 입선 | 제 27회 대한민국 창작미술대전 은상 | 제 21회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 특선 | 2005 | 제 4회 대한민국 환경미술대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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