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서울 이 경 LEE KYONG
11/09/24 23:17:56 아트사간 조회 27411
 

이 경 LEE KYONG

 

가능한 색의 수평 - mögliche Farbhorizonte

 
전시일정 ▶ 2011. 09. 28 - 10. 17
   초대일시 ▶ 2011. 09. 28 _ 오후6시 
 
 
갤러리아트사간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22(사간동69번지) 영정빌딩3층
T. 02) 720-4414




 

 

 

센스 앤 센서빌리티

정현 (미술비평)

1. “나는 누운 채로 탈출했다. (···) 하늘은 금세 눈이 멀고 내 눈이 하늘을 끌어 내렸다.”

한 작가에 대한 평론을 두 번이나 쓴다는 것은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관계가 꽤 괜찮았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비평가에겐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2008년 이경의 개인전에 관한 글에서 나는 보르헤스를 인용했다. 그는 서른 살부터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면서 쉰 여덟 살에 완전히 맹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색을 감지할 수는 있었다는 일화는 색이 곧 실존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었다. 3년이 지난 오늘 이경은 여전히 색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수평의 색면들을 화면에 펼치는 기존의 구조 역시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작업들은 지난 작업과는 달리 하나의 색면 안에 대립되는 색이 함께 등장하고 이 색면들의 집합은 보다 웅장한 풍경을 느끼게 해준다. 과거 파스텔톤의 색감은 어두움과 강렬함을 충돌시켜 비장한 기운이 감돌 정도다. 지난 3년 동안 이경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예술가는 삶 안에서의 경험과 기억의 씨실과 날실을 직조하는 사람이다. 이경에게 삶을 둘러싼 환경과 작업과 일상의 교차점은 창작의 종자가 된다. 3년 전, 이경은 집에서 영은 창작스튜디오로 이동하는 동안 그 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기운으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파스텔톤의 색으로 이뤄진 관조적인 색층의 유기성은 당시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영은창작스튜디오에서 집으로 작업실로 이사를 온 그녀는 미디어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을 읽기 시작한다. 이미 예전부터 미디어와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지만 이사 후 그녀는 적극적으로 소셜네트워크는 물론이고 텔레비전에 이르는 다양한 통로로 동시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다양한 사건이나 정세가 이경의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우리 사회는 세계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전지구적인 경제침체는 물론이고 잦은 자연재해까지 덮치면서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련의 변화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경의 감수성을 자극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자연의 대재앙,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사회구조의 균열로부터 예술가라고 열외에 서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작업을 참여적이거나 정치적 미술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삶과 현실 사이의 접경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이가 작업의 진화로 연장되었다는 점이다.

 




 

2. “흙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모래가 양초처럼 하얀색, 파리한 살색, 연노랑색, 진노랑색, 황갈색, 붉은색으로 가로로 가지런히 지층을 이루었다.”

이번 글을 위해 나는 다시 한 번 더 보르헤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책의 세상에서만 살기를 원했던 보르헤스는 그 누구보다 인간의 삶이 언어에 의해 구속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반대로 그가 지속적으로 언어유희를 하면서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멈추지 않은 이유였다. 보르헤스는 유독 독일어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독일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투명성 때문이었다. 한 예로, 그는 괴테가 만든 단어 네벨글란츠(nebelglanz)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단어는 안개와 거울을 합성한 조어로 ‘안개의 어렴풋한 빛’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루마니아 출신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도 새로운 조어를 발명한다.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만드는 것은 언어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란, 관습과 문법 안에 머물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형화 된 글쓰기를 거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화가에게 색은 늘 극복해야 할 장벽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보르헤스와 뮐러에게 언어란 ‘안개의 어렴풋한 빛’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 이경에게 색이란 ‘언어 밖의 언어’인 것이 분명하다.

언어 밖의 색을 생성하는 작업은 이경의 예술세계의 밑바탕을 이룬다. 이미 미술의 역사를 통해 미니멀리즘 미술이 탈 서사, 탈 장식, 탈 의미를 부르짖으며 탄생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로지 색과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질감과 부피만으로 시각예술을 완성한다는 것은 미술 이전의 미술, 즉 미술의 원형을 좇기 위함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원시주의 미술과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원시주의는 문명의 원형을 통해 형상의 순수함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미술의 원형은 시각예술이 창조되는 과정과 구조로부터 생성되기에 역사라는 계보와는 무관하다. 이는 구조주의적 철학관을 비롯하여 언어와 실재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과연 예술 그 자체에 관한 근본적 물음으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언어 밖의 언어’란, 언어라는 인식의 한계와 감각에 의한 언어구조 밖에 위치한 심리적 경험과의 차이와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현대미술의 분석적 접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경은 형식적으로 미니멀리즘의 개념적 요소를 따르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색의 세계에 의해 보는 이에게 어떤 보편적인 기억이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서구의 개념미술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덕목으로 보여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의 탈영토화를 언급하면서 “얼굴성”을 지워버리자고 주장한다. 시각예술의 관점으로 보면 “얼굴성”이란 결국 형상의 또 다른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되기’의 실천을 강조한다. 되기란 “적어도 혈통이나 계통에 의한 진화는 아니다”.이경이 쌓는 색면들은 하나의 층으로 완성된다. 지층이나 대기층을 연상케 만드는 이 색층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의 깊이와 역사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색면들이 수평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색층은 피라미드를 쌓듯 위로 올라가는 건축적 구조가 아닌 각 색면의 고유한 세계가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완성된다는 평등의 가치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의 색면은 작품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이다. 처음의 색면은 앞으로 진행될 위 또는 아래에 올 또 다른 색면의 모체가 된다. 각각의 색면이 쌓이면서 화면은 수평선들이 겹으로 쌓인 층을 형성한다. 이것은 거대한 지층이나 대기층과 같이 전체로서 하나의 회화이지만 동시에 각 색면은 그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개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3. “탑은 밤과는 다른 검은색이다. 가시 돋친 검은색이다.”

한 층 한 층 쌓은 색면들은 각각 고유한 시공간을 지닌 기억의 집합이다. 이 집합은 특정한 하나의 사건에 대한 흔적이 아닌 작가를 동요하게 만든 우발적인 자극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 형상 대신 선택한 수평의 흐름과 색의 스펙트럼의 추상성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경은 이야기 대신에 이미지의 경험을 제안한다. 이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사상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 목소리를 지우고 수도자처럼 매일 색면들을 만들어 평행의 쌓기를 계속한다.

참고 - 들뢰즈와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453쪽

색면의 집합 또는 수평의 색면들은 숭고한 수평선을 그리기도 하고, 뇌편 (雷鞭)의 파열처럼 보이는가 하면, 또 때론 웅장한 산맥의 겹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보는 이에 따라 이경의 회화는 자연현상이나 풍경으로 비추어지겠지만, 그것은 해석의 자율성의 덕목일 뿐 작가는 이에 어떠한 주석도 달지 않는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예술은 실재를 친밀하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술은 실존하는 대상을 반영한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경의 회화는 ‘영도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언제라도 누구인가에 의해 갈등으로 균열로 붕괴로 보여질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자유와 평화를 찾아낼 지도 모른다. 굳이 작가가 구체적 개념으로 해석을 덧붙이지 않는 까닭은 그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형상도 의미도 이야기도 지우는 작가의 태도에는 작가와 관객, 예술작품과 감상이란 구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권위의식을 지우겠다는 의지가 스며들어 있음을 놓치지 말자.

참고- 헤르타 뮐러, 숨그네, 문학동네, 145쪽

같은 책, 144쪽

같은 책,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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