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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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2    업데이트: 17-01-26 11:30

자유게시판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황영숙 | 조회 2,271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황영숙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자고

친구가 전화를 했다

건강을 위해서 한 번쯤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중요한 일인 줄은 알지만 병원의 이곳저곳은

언제나 두려움으로 기억되므로 잠깐의 갈등을

지우고 단호히 거절했다

 

재산증식을 위해 명품아파트나 우량주식을

사두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생활이라고

친구가 열변을 토했지만

그것도 가만 생각해 보니 보통 부담되는 일이

아니라서 그만두었다

 

두려움도 없고 부담도 없는 너무나 행복한 일은

방금 싹튼 풀꽃 화분에

신나게 물주는 일

그 작은 풀들이 꽃대를 내밀면

같이 눈 맞추며 웃어주는 일

 

어스름 달빛 속에 오래오래 별똥별을 기다리다

지치는 밤이면

달빛과 더불어 밤이 이슥하도록

시를 쓰는 일

 

- 시집『은사시 나무숲으로』 / (한국문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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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가치관과 사는 형편이 다 달라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딱 부러지게 말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돈, 건강, 사랑, 가족, 명예 등을 꼽으며 특히 개인적인 소망으로 건강과 돈을 최우선시 한다. 건강을 잃으면 돈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는 것이 되기에 그렇고, 또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보니 그러기도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암 발병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뜻밖에도 서울 강남구라고 한다. 하지만 암으로 인한 조기사망률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측에 속한다. 그만큼 조기검진 조기치료가 보편화되었다는 의미다. 시인은 대구에 거주하지만 서울로 치면 강남권의 생활수준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종합검진’을 ‘단호히 거절’하다니그 이유가 꼭 두려움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한국인의 돈에 대한 집착과 재태크에 대한 관심은 미국인의 3배, 일본인의 2배에 달한다. 그러나 투자든 투기든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시인은 그 부담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그 또한 간이 좀 작은 게 이유의 전부로 이해하긴 어렵다.

 

 ‘두려움도 없고 부담도 없는 너무나 행복한 일은 방금 싹튼 풀꽃 화분에 신나게 물주는 일’이고, ‘작은 풀들이 꽃대를 내밀면 같이 눈 맞추며 웃어주는 일’이라니 숨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구나. 흔히들 말로는 물질보다 정신이라 하지만 실상은 세속적 욕망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등한히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밤이 이슥하도록 시를 쓰는 일’을 제일로 치는 시인은 확실히 좀 달라 보인다.

 

 ‘작은 집에 살면서 워릭성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워릭성에 살면서 감탄할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할지 모른다’는 존 러스킨의 말이 생각난다.

 

권순진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 황영숙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기사 입력시간 : 20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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