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8    업데이트: 21-07-26 12:31

강문숙의 즐거운 글쓰기

강문숙의 ‘소소한 문학산책' 13
강문숙 | 조회 758

- 옛어른들은 2월을 ‘바람달’이라고 했답니다.

아마도 봄이 오기 전에 봄샘바람, 꽃샘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인 모양인데,

꼭 그 이유만도 아닌 것 같죠? 요즘은 정치바람도 유난히 거세게 불고요.^^

마음 얹어둘 곳이 없는 사람들에겐 바람 숭숭 스며들어 더 추운 때이기도 하기 때문일까요?^^

정말, 따뜻한 말 한마디, 한 줄의 시가 그리운 때입니다.

 

# 특히, 사랑시가 그리워요. 요즘 시들은 너무 난해한 면이 있어서

독자들이 다가가기에 참 부담스럽기도 하거든요^^

 

-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음악의 경지’라고 했는데,

제 생각에는 서정시가 가장 음악의 경지에 근접해 있는 사조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연체동물이 가장 오랜 지구의 역사를 살아온 생물인 것 같이,

어깨 힘 빼고,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서정시야말로, 시의 본령을 가장 오래 머물게 한다고나 할까요.

 

- 그런데, ‘사랑’에 관한 시는 만남에서부터 이별 후에까지도 우리 마음을 울리는 힘이 강한 것 같아요.

시인들은 자주 그런말을 한답니다. ‘진정한 사랑시는 이별 후에 쓰는 것’이라고요^^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겠지요.

교과서에도 나오고, 또 그 ‘님’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탐구하면서, 신이냐, 조국이냐, 또는 어느 여인인가를 따져보기도 하죠.

 

만해 한용운은 아시다시피 승려시인입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는데, 첨부터 승려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아마도 개혁정신이 투철한 성격이었던가봐요.

약관의 나이에 이미 고을원의 악정을 규탄하기도 했고, 26세때에 거액의 관금을 빼내어 이를 군자금으로 휴대하고 동학에 투신하였는데,

동학이 실패하고 산으로 흩어져 피신해 있을 때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종교관에 의해서보다는 구국의 충심이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죠,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자천하고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의 낭독하면서 투옥된 것만 봐도 말입니다.

그러다가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4년만인 1926년에 시집 < 님의 침묵>을 출간합니다. 65세에 입적했으니 생애 단 한권의 시집이죠.

 

시집을 읽으면서 보니...어떤 감이 오는 거예요.

흔히 만해문학을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하지요.

물론, 그 님의 대상이 누군가 하는가에 따라서 읽는이의 감동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별하는 데서 시작이 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연작시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 궁금한데요...흔히 만나고 이별하는 순서가 아닌가요?

 

-바로 그런 <다름>이 만해 문학의 특징이죠.

만해의 ‘님’은 여인이나, 국가이기보다는, 종교관에 의한 결과물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별- 갈등- 희망- 만남....

이러한 구조는 종교의 핵심인 인간성의 회복, 구원에 맞닿아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시집에 수록된 시로 그 궤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님의 침묵>을 통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이별은 미의 창조’ 라는 시가 이어집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지말라고 울부짖기도 하죠.

 

또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것에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더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한다든지

 

‘정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의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옅다‘고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합니다.

 

또 있네요.

가히 이별의 아름다움의 극치라고나 할까요. 이런 시도 있습니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라는 시..이별 예찬 같기도 하죠?^^

 

#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만해는 남자인데, 어째서 항상 여성의 어조로 님을 노래하는가...

 

-네 그렇죠?.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도 여성이고, 시적 정감도 여성적이죠. 그리고 수를 놓는다 라거나, 꽃밭을 맨다 라는 여성적인 한과 매저키즘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 한시, 가사, 민요 등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이를 통한 한과 눈물의 애상적인 정서로 되어 있다는 것과 상통합니다.

그러고 보니 니체의 말처럼 ‘여성적인 것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철학과 통하기도 하네요.

 

 

# 재밌는 것은 요즘 시집의 ‘자서’, 혹은 ‘시인의 말’이라고 하는 글이 있는데요,

만해의 시집에는 <군말>이라는 제하를 써서 이런 내용을 담았더군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렇게요^^

 

# 오늘 읽어줄 한편의 시는요~

 

네, 생각 같아서는 서너편 연작으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만~ ^^

아까 말씀드렸죠. 만해의 문학이 이별~ 갈등~ 희망~ 만남..의 구조라고.

마지막장에 있는 시입니다.

앞의 이별과 그리움과 기다림을 지난 후의, 마치 해탈의 경지처럼, 구원의 약속처럼

님을 만나는 세계를 나타냅니다. 좀 생소하겠지만 한번 들어보시죠^^

 

 

  

<사랑의 끝판>

-한 용 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것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컷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퍼(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어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날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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