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업데이트: 12-10-19 12:50

시가 있는 아침

자루 속에서
강문숙 | 조회 798

<3>

자루 속에서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낱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 밤을 완두콩과,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의 속은 또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 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 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 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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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을 예사롭지 않은 미세함까지 봐야하는 통찰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주방 구석에 팽개쳐진 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허름한 자루 하나. 그러나 자루 속에서는 오래된 완두콩이 바구미에게 제 몸을 갉아 먹히고, 더불어 생명을 얻은 미물이 살아가고 있었다. 쓰레기통에 그대로 쏟아 붓기에는 왠지 주춤거리는 마음이다. 그 들썩거리는 자루는 이 세계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제나름의 모양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 거대한 우주라는 자루 속. 따스하게 굴러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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