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8    업데이트: 23-02-16 09:38

언론, 평론

이인숙 평론
관리자 | 조회 1,075
뜰 앞에 달 떠있는데 소나무엔 그림자 없고,
난간밖엔 바람 없는데 대나무에서 소리가 들리네.

 
 
庭前有月松無影
欄外無風竹有聲
 
전시를 앞 둔 김봉천 선생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붓을 들어 써 보여 준 것은 이 두 구절의 한시였다. “뜰 앞에 달 떠있는데 소나무엔 그림자 없고, 난간 밖엔 바람 없는데 대나무에서 소리가 들리네.”
 
앞 일곱 자와 뒤 일곱 자가 뜨락과 난간(庭/欄), 앞과 밖(前/外), 있고 없음(有/無), 달과 바람(月/風), 소나무와 대나무(松/竹), 없고 있음(無/有), 그림자와 소리(影/聲)로 글자마다 짝을 이룬 대구로 서예작품의 대련이나 사군자 대나무의 화제로 간혹 쓰이는 구절이다.
대략 4년 전 어느 날 밥을 먹다 식당 벽에서 본 이 시구가 그 이후 그리고 이번 전시의 작업을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 때 이 시가 김봉천 선생의 머리 속에 환기 시킨 것은 “고요함 속의 움직임”(靜中動)의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림자와 소리(影/聲)라는 마지막 글자들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이 시구를 계기로 작업의 내용이 변화되었다.
2002년 이전의 아홉 차례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업들보다 담백해지고 깊이 있게 되었다고 할까. 바위와 바람의 필선이 날리던 웅장한 배경이 발(簾)과 창호지, 창문, 물결로 간 것이나 채색을 버리고 수묵으로 간 것은 분명 담백해진 것이고, 한 계절 피었다 지는 (애인같은) 꽃 대신 해마다 나이테가 늘어나는 (친구같은) 나무가 등장한 것은 분명 깊어진 것이다.
어쩌다 부딪친 우연이 평생의 필연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듯, 희구하는 바가 마음속에 있을 때 만난 이 구절은 “靜中動”으로 각인되어 작업의 화두가 되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 대상은 모두 이차적으로 표현되어 “숨음과 드러남”(隱現)의 경계에 있다. “고요함과 움직임”(靜-動)이라는 상호 모순 되는 화두가 “숨음과 드러남”(隱-現)이라는 조형의 과제로 제시된 것 같고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다양한 차폐물들로 보인다.
발(簾)과 창호지, 창문, 물결은 모두 표현 대상을 “숨김”(隱) 속에서 “드러남”(現)으로 존재하게 하는 장치들이다. “숨음과 드러남”(隱現)의 양가적 표현은 또 다른 함의를 창출했다. 숨김 속에서 드러나게 된 대상은 그 즉물성이 제거되어 베일이 드리워진 미인이나, 안개가 자욱한 풍경과도 같다. 미인이나 풍경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베일과 안개로 인해 일상성이 소거됨으로서 대상은 더욱 미적으로 수용된다.
물결의 높낮이에 따라 일렁이거나, 발의 틈새로 비치거나, 창틀의 격자로 나뉘거나, 창호지에 어리는 영상들이 현현하는 김봉천 회화의 미적 아이덴티티는 “韻”이다. 요즘말로 운치, 여운, 이미지성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氣와 韻이 살아 움직인다”(氣韻生動)는 말은 6세기 중국에서 탄생하여 기와 운을 회화의 중요한 목표로 제시했다.
우연히 만난 한 시구는 靜-動으로 받아들여져 隱-現의 조형으로 해석되고, 詩情韻味의 필연을 낳게 되었다.

옛사람들이 말장난으로 시를 지은 것은 별로 없다.
바람 없는 날 대나무를 흔든 것은 무엇이며, 왜 달빛은 소나무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했을까?
눈(雪) 때문이었다.
소나무 그림자는 눈(雪) 속에 잠겼고, 댓잎은 무게를 못 이겨 후두둑 눈(雪)을 떨궜던 것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라는 익숙한 표현이 있듯 눈(雪)의 표상이 “고요함 속의 움직임”(靜中動)으로 나타난 것을 김봉천 선생은 이 시에서 회화적 이미지로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유식한 말로 詩情畵意라는 것으로, 동양에서 회화의 기본 정신이 되어온 이상이다.
지필묵연이라는 도구가 생산자와 소비자 양측에서 거의 소통 불능에 빠져버린 지금, 조형에서 “동양”이라는 어휘가 소용이 된다면 그것은 이러한 “정신성”의 기반 위에서 소통 가능한 매체를 확보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조형이 시각과 감각을 떠날 수 없지만, 그것뿐이라면 예술이라고 이름붙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로서 표현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방법들을 통해 내용이 확장되고 심화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차폐와 분절의 장치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씨디케이스이다. 기력이 집중된 8점의 큰 작업에는 한 작품 당 14×15=210개의 씨디 케이스가 소용되었다. 각 케이스에 담긴 210개의 분절된 풍경들이 모여 전체가 이루어진다. 氣와 달리 韻은 미묘한 디테일들이 점층되고 변주되어 “형상 밖의 형상”(像外之像)으로 맺어질 때 발산된다. 화면이 14× 15cm로 분절되어 온 것은 이러한 韻에 대한 생각이 김봉천 선생의 머리 속 한 켠 에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긴 것이라, 건투를 빈다.
 
이천육년 시월 이인숙 씀
 
 
 
* 덧붙임
이 시구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던 <지봉유설>의 작자인 이수광이 10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의 시에는 欄이 아닌 檻으로 되어있다. 하루는 눈(雪)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 보라고 했더니 이렇게 읊어서 신동임을 재확인시켰다고 하는데 이수광은 열여섯 살(1579년)에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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