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    업데이트: 16-06-15 21:18

미술 감상

대구 미술의 대부-서동진
아트코리아 | 조회 1,021

1. 대구미술의 대부

소허 (小虛) 서동진(徐東辰) (1900-1970)은 근대 양화도입기에 수채화라는 장르를 통하여 대구화단을 독특 개성을 가진 미술계의 명문으로 키워 갔던 사람이다. 화가로서의 형성기 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펼쳤던 그는 이인성같은 화단의 준재를 키워낸 후학양성자였으며. 항일운동가이자 미술운동가였다.

1900년 대구의 부유하면서도 진취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학교 재학시 학생운동관련으로 퇴학당하고 상경하여 휘문고보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춘곡 고회동이 미술교사 로 있어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26년 대구로 돌아온 서동진은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차려놓고 대구미술계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고, 1930년 (향토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대구화단의 대부가 되어갔다.

(대구미술사)는 인쇄소와 각종 상업미술 및 순수회화 등 일종의 종합미술 센타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결속되어 일제에 대항한 민족적인 조직으로서의 의의도 갖는 곳이었다. 또한 (향토회)는 일본인 화가들의 세력 속에서 본격적으로 결성된 한국인만의 양화단체로서. 향토회의 주요멤버들은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서진달, 이인성, 김용조 등이었다. 향토회는 30년 10월에

조양회관에서 창립전을 가진 이래 34년 5회전까지 매년 가을 정기 발표전을 열었는데. 이는 대구화단 이라는 지방주의를 벗어나 1930년대 범 한국화단사 속으로 포용될 수있는 수준급의 전람회였다. 대구화단의 전성기가 20년대 중반부터 향토회가 해체되는 30년대 중반까지 대략 10여년이 되는데 이는 서동진의 왕성한 활동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서동진이 대구화단의 실질적인 주역이 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후진양성이라는 활목할 만한 성과도 이룩했다.  즉, 교남학교에서 15년간 무보수로 재직하면 서 후진양성을 하였고, 대구미술사도 후진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30-40년대에 서양화단에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한 이인성 , 김용조 등을 발굴한 것도 서동진의 업적이다. 학교를 마치고도 집안이 어려워 미술공부를 할 수 없었던 이인성은 서동진의 눈에 띄어 대구미술사의 일원이 되면서 그의 천재성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1929년 제8회 선전에 대구에서는 서동진과 그의 제자 이인성만이 입선하였는데 이때 서동진은 자신의 입선보다 이인성의 입선을 더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인성은 1931년부터 6회나 연속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는 등 일제시대 대구출신의 최정상급 작가가 되었다.

이와같이 서동진은 대구화단의 지도자로서 중앙중심의 미술운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아니 라 누구보다도 수채화에 대한 인식을 높여 대구화단을 수채화의 본산지로 정착 시키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지만, 50년대 중반 이후 국회의원 등 정치가로 변신하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그의 창작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II. 수채화의 선구자

1920년대 이래 감작스런 미술문화의 폭넓은 성장은 미술인구의 급증을 낳았고. 신미슬의 정착은 서서히 그 기반을 다져 30년대의 풍성한 토착화의 과정이 있게 된다. 20년대를 기 점으로 하여 활발해진 대구 지방의 신미술운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수채화의 활발한 전개이다. 흔히 수채화라하면 유화를 배우기위한 기초과정의 하나로 간주하여 본격적인 미술장르로 존중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는데. 이미 양화의 도입기에 수채화라는 독특한 매체가 독립된 장르로 또 한 지방 특유의 분위기로 조성되었다는 것근 참으로 홍미로운일이며 , 이런 분위기를 형성해 낸 사람이 바로 서동진이었다.

안료를 물에 풀어 쓴다는 넓은 의미로서 수채화는 구석기시대 동굴벽화까지 을라갈 수 있고. 문명이후 이집트화가들의 프례스코기법이나 동양화가들의 수묵담채화. 페르시아 및 인도. 이슬람 지역에서는 또 다른 형식의 수채화가 발달하여 수채화의 역사는 고대나 중세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수채화가 회화의 한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일본의 경우 영국 의 알프레드 이스트의 체일활동예 힘입어 우리보다 한 세대 앞서 수채화가 사용되었는데. 1906년 (수채화회)의 창립에 이어서 수채화 전문잡지 (미즈에)지가 창간되는 등 수채화의 전성시대를 맞이하 였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일본화단에 1920년대 중반경 서동진이 도일하여 수확한 것이 대구화단에

수채화가 자리잡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수채화는 '물' 이라는 재료를 사용함으로 '기름'을 사용하 는 유화에 비해 동양문화권의 감성에 적합하여 더욱 쉽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927년 서동진은 민족색이 짙은 인사들이 모이던 조양회관에서 동아일보 대구지국의 주최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그 명칭부터가 (서동진 수채화전람회 )였다. 대구일원의 현장에서 제작된 풍경화등을 비롯한 45점이 출품된 이 전람회는 대구에서 처음 이루어지는 수채화전람회였으며 전시기간 중 약화. 만화 및 초상화 등의 공개시범도 있어 관람객이 매일 일천여명 에 달하는 대성황을 이루어 새로운 표현매체인 수채화의 지위를 확보 하는데 커다란역 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 라 미술인구의 저변확대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리라 색각된다. 이러한 열기에 힘입어 사동진은 이듬해인 1928년 두번째 개인전을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였는데 <성탑 과 부락>을 비롯한 46점의 작품이 출품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구 양화단 중진작가' 로 지칭되면서 '조선미술계에 일대활약을 시하는 화백' 이라고 격찬받았다

III. 선전출품작들

이렇게 대구에서만 활약한 서동진이 서울의 중앙화단에 연결된 것은 몇 번 참가한 선전뿐이었다. 대구같 은 지방의 경우에는 유일한 신인들의 등용문로 선전(鮮獲)이었다. 박명조가 제5회전(1926)에 입선하 였고 김호룡 제6회전에 참여한 바 있으며 . 서동진은 제7회전(1928) 부터 선전에 참여하게 된다. 서동진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은 총4점인데 모두가 수채화로서 첫 수채화 작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다. 서동진이 처음으로 선전에 출품한 <역부근>(제7회전. 1928년)은 대구역 건물과 마부와 먹이를 먹고 있는 말의모습 그리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 밑에 한복입은 남녀가 보이는 풍경화이다.그는 여기서 피압박 민족의 애수를 담아보고자 했다고 한다. 제8회전의 작 <역구내>(1929)는 기차역의 내부 모습으로 화물열차가 뒤로 보이며,.앞의 넓은 마당에는 원목들이 널려있는 수작이다. 앞의 작품과 더불어 기차역을 제재로 삼은 것은 당시 신문물의 풍경으로서 역시 새로운 재료와 기법에 새로운 이야 기를 담은 시대적 소산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잘 보존되어 오다가 근 년에 이르러 망실되었다고 한다. 제10회전의 출품작은 <오후 풍경> 으로 마을 개천의 다리 아래에서 두 여인이 빨래를 하는 장면이데 그 오른 편에는 가정 주택이 길가를 따라 자리해 있고 왼편의 작은 언덕 위로는 녹음이 짙은 나무숲이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선전의 마지막 참가가 되는 제11회전의 참가작 품은 <뒷골목>으로 대구시의 한 뒷거리 풍경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그림이다. 목조건물이 들어서 있는 길한편에 리어카 행상이 있고 행인도 몇명 보이는 한적한 거리의 풍경이다. 이 작품에서는 수채물감을 다루는 원숙한 경지가 엿보이며 구도나 소재의 해석을 통한 형상 력이 무르익은 훌륭한 작품이다.

이번 우리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수채화 작품은 <오후풍경>과 <뒷골목> 두점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품 팔레트에 유화 자화상을 그려넣은 작품 <팔레트속의 자화상>(1930년대)는 서동진의 재기발랄함과 현대 적 조형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으로 이 작품 역시 이번에 우리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대구미술사)와 (향토회)등을 결성하여 화단을 이끌었다든지 후진양성에 헌신했다든지하는 행동적인 측면을 별도로 한다면, 서동진은 2번의 개인전과 4번의 선전출품 및 몇몇 단체전에의 참가등이 전시활동 으로 남는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발굴해 낸 화단의 천재 이인성 등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서동진의 작품 활동은 점차 침체되어 갔다. 그리고 그는 50년대 이후가 되면 완전히 작가로서의 활동을 접어두고 정치 가로서 변신하게 되는데, 젊은시절 대구의 미술운동을 이끌었던 행동파적 면모가 이런 정치가로서의 변신을 잠재적으로 담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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