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0    업데이트: 16-06-03 11:24

미술이론

공예는 생활의 미래다
아트코리아 | 조회 809

공예는 생활의 미래다

 

1956년 영국 화이트 채플(White Chaple)에서 <<이것이 내일이다(This is Tomorrow)>>라는 전시가 열렸다. 당시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은 그 전시에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1956)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그 해밀턴의 그림은 영국 팝아트의 최초 작품으로 간주된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내일이다>>라는 전시 타이틀이나 해밀턴의 그림은 미래의 가정을 지향한다.

그러나 해밀턴의 미래의 가정은 사진으로 꼴라주 된 가정,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해밀턴의 그림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공예다. 왜냐하면 공예야 말로 미래의 가정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작품·상품이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공예가 여타의 예술장르와 다른 점은 바로 쓰임때문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백화점이 미래의 미술관이 될 것(department stores are kind of like museums)”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백화점은 이미 미술관이 되었다. 왜냐하면 백화점은 명품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명품에는 히스토리가 있다. 따라서 명품은 브랜드()가 있는 상품·작품, 즉 기능과 미가 함축된 공예다.

워홀은 백화점이 미래의 미술관이 될 것으로 예언했는데, 필자는 여러분의 집이 미래의 미술관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싶다. 왜냐하면 공예야 말로 미래의 미술관(여러분의 집)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작품·상품이기 때문이다.

 

관객과 만남을 찾아서

 

오늘날 모든 분야는 고객중심주의로 이동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소비자(관객)보다 생산자(작가) 중심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리빙 퍼니처>는 관객중심주의 전시를 고려하였다. 우리는 관객중심주의 전시 연출로 우리 생활공간을 모델로 삼았다. 따라서 관객은 중성적인 전시장이 아닌 마치 이웃집을 방문하듯 가정집에 설치된 작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리빙 퍼니처>는 생산자(작가/작품)와 소비자(관객)가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관객과 만남을 찾아서를 지향한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전시장은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1층 전시장을 거실로 연출했다. 그리고 2층은 크게 2개의 전시장(2전시실과 3전시실)이 있는데, 우리는 2전시실에 파티션을 제작하여 아이방과 서재로 연출했다. 마지막으로 3전시실을 우리는 침실로 연출했다. 기면의 한계로 각 전시장, 즉 각 방들을 이곳에서 모두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거실의 풍경만 간략하게 스케치해 보도록 하겠다.

거실 중앙에는 이광호의 전선(electric wire)으로 만든 라이트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이광호의 라이트 작품 주위로 각종 테이블-작품들(김경순, 김은학, 김재경, 김현정, 박정수)과 의자/방석-작품들(김정희, 박계훈, 박용선)이 비치되어 있다. 하지만 테이블-작품들은 실용적인 반면, 의자-방석-작품들은 비실용적이다. 따라서 관객은 의자나 방석에 앉지 못하고 서서 테이블-작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테이블-작품 위에는 각종 도자기-작품들(손경희, 손종목, 이강호, 이경환, 이승희)이 비치되어 있다. 물론 그 도자기-작품들은 사용가능하다. 머시라? 어느 그릇 위에 포도송이가 있다고요? 근데 그 포도는 뼈로 갈아 만든 포도(이인희)이기 때문에, 관객은 으로만 먹을 수 있다. 뭬야? 먹을 수 없는 사과(신혜진)도 있다고요? 글타! 그 사과는 으로만 먹을 수 있는 재생지-사과이다.

물론 거실에는 카펫(김미진), 병풍(박미향), 서예(김종칠), 달력(낸시랭), 가구(김미진, 김경록), 패션(정두섭)뿐만 아니라 회화(윤지선, 이정민)와 사진(박원우, 안시형) 그리고 조각 작품들(김윤재, 이준용, 이준익)도 설치되어 있다. 관객은 거실에서 TV를 통해 영상 작품들(김태은, 유비호, 정윤석, 정흥섭, 홍성재&신윤, 윤나)도 볼 수 있다. 깜빡할뻔 했다. TV에 연결된 오디오(이탈영) 역시 작품이다.

 

관객은 작품의 운명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집의 거실 풍경이지만, 거실에 연출된 모든 살림살이가 작가들의 작품들이란 점이다. 나는 그 작품들을 리빙 퍼니처(living furniture)로 부른다. 리빙 퍼니처는 기존의 홈 퍼니처(home furniture)에 공예에서 말하는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를 접목시킨 내가 만든 신조어이다. 리빙 퍼니처는 한결같이 일상품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미적 작품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리빙 퍼니처가 목적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술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개념화된 것이다. 따라서 미술의 고향은 생활세계이다. 생활세계로부터 가출한 현대미술 이전인 조선시대를 보자. 조선시대 미술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감상미술로만 국한되지 않고 생활미술혹은 실용미술로도 기능했다. 살림살이하는 우리 주부들이 잘 알고 있듯이 당시 집안에는 장벽화와 족자화 그리고 병풍 등의 그림들 이외에 각종 그릇(도자기)에서부터 그림이 새겨진 장과 농 등의 각종 가구 또한 그림이 수놓아진 (이불에서 보자기에 이르는) 각종 자수 작품도 비치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우리 조상의 집은 미술로 도배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미술은 당시 일종의 살림살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은 장구한 미술의 고향이었던 생활세계에서 가출하여 미술세계라는 살림을 차렸다. 따라서 더 이상 미술은 일상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소독된 중성적인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박제화 되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간주되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한 전시가 바로 <리빙 퍼니처>이다. 결국 <리빙 퍼니처>는 미술을 미술의 고향인 일상세계로 되돌려 보내고자 기획된 전시인 셈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리빙 퍼니처>는 관객 없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글타! 관객은 작품의 운명이다.

독립큐레이터 류병학

* 이 서문은 지난 20081231일자 중부매일 류병학의 <집이 미래의 미술관이다!>를 부분 인용하여 각색한 텍스트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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