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0    업데이트: 16-06-03 11:24

미술이론

그림을 통해 보는 중세와 오리엔탈리즘
아트코리아 | 조회 1,172

Benjamin-Constant (1845-1902)

Empress Theodora (500-547)

오리엔탈리즘 회화 (orientalist painting)

Eugène Delacroix (1798 – 1863)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Gentile Bellini (1429-1507)

II. Mehmet (1432-1481)

Jean Leon Gerome (1824-1904)

Benjamin-Constant (1845-1902)

프랑스 출신의 유명한 오리엔탈리즘 화가이자 초상화 화가입니다.

영어 발음으로는 콘스탄트이지만 꽁탕으로도 호칭 됩니다(불어는 어려워 ㅜㅜ)

파리의 에꼴데보자르에서 수학했고 1872년 모로코를 여행하며 강한 영감을 받습니다.

오리엔탈리즘하의 로맨틱한 화풍이 특징이며 1880년 이후 부터는 화풍을 바꾸어 수많은 벽화와

초상화를 그리며 명성을 누립니다.

 

The Empress Theodora at the Colisseum

Oil on canvas (157.5 x 133.4 cm)

 

칼리시엄의 푹신한 의자에 편한 자세로 누워 있다시피한 여인이 있습니다.

붉게 채색된 벽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의상 그리고 온몸을 장식한 황금 장식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손에 꽃을 꺽어들고 시선은 약간 내린채 경기장을 내려보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다보면 처음

느꼈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앙다문 그녀의 잎에서 어떤 결의나 굳은 의지를 느낄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왜 저런 결연한 모습으로 저곳에 앉아있을까요? 그녀는 그냥 궁전의 이쁘고 가녀린 왕족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나라를 움직이던 황후였기 때문 입니다. 그냥 직위만 황후가 아닌 탑 브레인이자 실세몸통인 황후.

그녀의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재위)의 황후 테오도라 (500-547)입니다.

때때로 여인은 남자보다 훨신 큰 힘과 현명한 지혜와 과감한 결단력과 용기를 보여줍니다.

역사를 보면 그러한 여인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끔 출현하여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이집트에서는 클레오파트라란 여걸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양귀비가 한국에서는 장희빈이..

콘스탄티노플에 곰조련사를 아버지로 둔 결혼한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일이 없을때는 털실을 만드는 일로 연명하기도하는 한아이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테오도라.

어느 동화에서나 나오듯 그녀 앞에 백마탄 왕자님이 등장 합니다. 왕자님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유부녀인 그녀에게 흠뻑 빠진 왕자는 테오도라를 연인으로 삼았고(여기서 부터 동화에서 성인 소설로 급반전이,,)

평범한 평민인 그녀를 귀족으로 만들어 결혼을 합니다. 전남편과 아이는 어찌 되었는지 아무리 자료를 찿아봐도..

그녀는 남편이 황제가 되자 뛰어난 두뇌와 수완으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남편이 마땅히 해야할 일들까지 모두 맡아 처리합니다.

예를 들면 외국 사절단 접견하기..국제문서 서명하기,,법률제정과 승인등등...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재임중 제정된

법령에는 대부분 그녀의 서명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있을 정도라고 하니 실제론 남편과 공동통치를 한것이나 다를바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녀의 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한 정치세력의 배반으로 죽음의 코앞에서도 피난 권유를 물리치고

성안에서 버티며 결국 측근 장군의 반란 세력진압으로 제국을 유지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Empress Theodora and attendants (mosaic from Basilica of San Vitale, 6th century).

 

 

또한 그녀는 어쩌면 역사상 최초의 여성 페미니스트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어린 소녀들에 대한 강력한 인신매매 금지법을 제정하였고 여성에게 유리한 이혼법을 개정하였으며 여성의 권리를

인식한 최초의 통치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쯤되면 모든 여성분들은 테오도라에게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녀가 4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하자 남편인 유스티니아누스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는 그녀 사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죽기까지(547-565) 중요한 법령이 거의

제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무려 18년 동안이나..)

그녀의 존재감의 무게는 그시대의 미술작품에도 잘나와 있습니다.

예수도 성모도 황제도 아닌 황후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메인에 표현된다는것은 이전, 이후시대에도 찿아 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위의 작품은 모자이크작품인데 당시의 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 회화(orientalist painting)

위의 꽁탕의 그림을 설명하며 잠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이 나왔었습니다.

서양미술에서의 최초의 오리엔트의 이미지는 당연히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의 무대와 동방박사.

동방박사의 출신지는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였고 그래서 서구인들의 동방에대한 표현은 대부분 터번을 쓰고

이슬람풍의 복장을 한 어두운 피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르네상스시기의 오리엔트인은 당시 이태리와 많은 교역을 하던 오스만 투르크족이었습니다.

르네상스이후의 오리엔트에 대한 표현법에도 이러한 관습은 20세기 초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몇일전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르누아르 전에서도 이러한 오리엔트풍의 복장을 한 여인을 그린 작품이 눈에 띄더군요.

동양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오리엔탈과 서구인들의 오리엔탈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오리엔탈에는 당연히 아시아 지역이 포함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Eugène Delacroix

 

The Women of Algiers 1834,

Eugène Delacroix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입니다. 1830년 그는 정부특사의 일원으로 모로코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큰 영감을 받습니다. 무려 6개월이라는 기간을 체류했고 프랑스로 귀국하는길에 알제리에서 경험한

장면을 그린것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David and Uriah 1665 Oil on canvas, 127 x 117 cm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회화의 역사는 제법 장구한 편입니다.

대가인 렘브란트도 신비스러운 오리엔탈리즘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던 작가였습니다.

특히나 성서의 내용을 많이 그렸던 그에게 오리엔탈은 그의 작품세계의 큰원천이자 보고였습니다.

서구인들에게 오리엔탈은 신비가 가득한 경이로운 세계였으며

그들이 믿는 종교의 산지이자 신성함과 혼돈의 덩어리 였습니다.

또한 신화로 가득찬 별천지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들이 그린 오리엔트는 대부분 직접 본것들이 아닌 책과 입소문과 다른 동료화가가 그린 그림을 통해

알고있던 오리엔트 였습니다.

물론 일부 작가들은 아프리카나 가까운 모로코, 알제리등을 여행하며 작업을 작가도 있었지만.

 

Gentile Bellini (1429-1507)

메메드 2세의 초상 Portrait of Mohammad Ⅱ(1480경,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Gentile Bellini (1429-1507)

 

메메드 2세 또는 정복왕이라고도 불리는 이슬람 술탄2세의 초상입니다.

젠틸레 벨리니 작품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파의 거두인데 특이하게도 그의 집안은 모두 화가들입니다.

아버지 야코포 벨리니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그의 동생은 그 유명한 죠반니 벨리니입니다.

술탄은 이슬람권의 절대적 통치자입니다. 기독교 세계의 적이라고도 할수있는 이슬람의 최고권력자의 초상을 그린

이태리의 화가.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단하나. 힘 입니다.(power)

AD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서양 기독교 문명의 방파제 노릇을 해 온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는 단 53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스물한살 약관의 한 사내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천년이 넘는 싸움에 종지무를 찍은 21세의 남자가 바로 메메드 2세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메드2세는 많은 화가들을 초청합니다.

일종의 문화정책의 한 일환이었던 셈입니다. 동로마제국과 이미 많은 갈등으로 좋지았은 관계를 유지하던 서로마로서는 그러한 이슬람권의 유화정책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지금까지 동쪽에서 외세의 침략을 막아주던 밉지만 한편으로 든든하던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방파제가 무너진 이상

로마는 현실적인 정책을 펴나갈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이러한 시대환경에서 탄생한 작품이 젠틸레 벨리니의 술탄 초상입니다.

작가는 서양의 제단화양식에 술탄의 초상을 그려넣고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크라운을 무려 여섯개나 그리는

성의를 발휘합니다. 아라비아풍의 무늬가 들어간 천에도 중앙에 크라운을 그리고 진주로 장식하여 주인공이

왕중의 왕이라는 표현을 강조합니다.

젠틸레 벨리니는 직접 오리엔탈 문화를 2년간 접하여 그것을 회화로 표현한 작가라고 할수 있으며

서구 오리엔탈 회화의 맏형격이라 할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전후 시기이후 수많은 오리엔탈 회화가 그려졌지만 가장 양적으로 풍부한 작품이 탄생한 시기는

19세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오리엔탈리즘 회화가 장마비 내리듯 쏟아져 내린 시기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이유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와 관련이 있습니다.

 

 

Bonaparte Before the Sphinx(1867-1868)

쟝 레온 제롬 (Jean Leon Gerome. French, 1824-1904)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이 시기 오스만 튀르크의 쇠퇴로 인해 소아시아와 발칸 지역이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영국의 인도 및 이집트 지배가 이어지면서 오리엔트 지역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는 18세기 끝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오리엔트 지역에 대한 학문적·문화적 탐구 열풍을

불러온 것과 맞물려 적극적이고 왕성한 예술적 표현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이전의 오리엔탈리즘 회화와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국주의적 팽창이전의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성격은 조금 더 순수한 환상과 미지에 대한 동경에대한 표현이었다면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 회화는 이전의 회화들보다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정적적 의미로서의 오리엔탈리즘, 즉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고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태도’가 그림들 속에서 또렷이 형상화되기 시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Cleopatra and Caesar

by Jean-Leon-Gerome(1866)

 

 

역시 제롬의 1866년 작품중 하나입니다. 클레오 파트라 카이사르라는 작품인데요.

서구인들의 조상격인 시져가 정복자의 신분으로 거의 반라 상태인 클레오파트라를 의자에 앉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궁전인듯한 곳에서 클레오파트라는 하인의 도움을 받으며 거의 무방비의 상태로 남자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고 뒤의 원로원 신분인듯한 남자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광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요즘에 저런 그림을 그리면 팔리긴 고사하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먹이감이 되기 딱 좋은 그림이군요.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과 자만심은 불치의 수준이었슴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자아의 파악이 오늘날의 심각한 혼란의 근원임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요?

테러와 납치가 거의 매일의 일상처럼 발생하고 기독교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대립이 점점 첨예화되는 이시기에

마치 우리가 천 몇백년전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와 오스만 투르크가 전쟁을 하던 시기로 되돌아간듯한 느낌을 받는것 이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대국이 다른 문화권과 벌이는 이 치열한 전쟁이

앞으로 어떤 결과로 종결되어질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거 역사의 사이클을 돌아보면 그 누구도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는 겁니다.

위에서 살펴본 메메드2세가 거대 기독교제국을 멸망 시켰지만 그 지역도 지금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지금은 EU에 가입하려고 안달하는 작은 나라로 축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이후 영원히 유럽과 러시아까지 통합한 거대제국을 만들것 같았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역사의 거대한 굴레에서 볼때는 삼일천하에 불구할정도로 덧없는 것이었고 히틀러는 나폴레옹에 비하면 몇시간도 안되는 힘의 유희에 놀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것을 보면

지금의 이 어수선한 국제사회의 힘겨루기는 암담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암담한 이 현실속에서 한가지 분명한것은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기록되어진다는것 입니다.

승자와 패자가 갈려지긴 하겠지만 이긴자도 패배한 자도 나름대로 계속 삶을 영위할것은 분명하고 어느순간

뒤바뀐 자신들의 입장도 확인하며 그렇게 살면서 많은것들을 많들어 내겠지요.

무기이든 예술이든.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