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0    업데이트: 16-06-03 11:24

미술이론

워홀, 현대미술의 심장을 겨누다
아트코리아 | 조회 937

워홀, 현대미술의 심장을 겨누다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미국으로 이주해왔다.

1928년 워홀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안드레이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소재한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 줄리아는 얇은 깡통을 가위로 잘라 꽃 모양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25센트에 팔았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예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워홀은 여덟 살 때인 1938년 가을에 무도병 증세를 나타냈는데, 류머티즘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추체외로계 질환의 하나로 그 보행이 마치 댄스를 하는 것 같아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St. Vitus' Dance로 불리기도 한다.

무도병으로 학교를 장기 결석한 그는 부엌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한 달 동안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다.

이 병의 증세에는 피부부스럼과 조절할 수 없는 흔들림이 포함되었고, 흔들림에 대한 느낌과 피부병학적 외관의 손상은 미래에 반향을 일으켜 성숙한 미술품에서 그는 이런 체험을 굴절시켰으며, 회화, 영화, 그리고 퍼포먼스에서 증상이 반향하게 했다.

그가 유명해졌을 무렵인 1960년대 초반에 피부부스럼은 사라졌으나 청춘기와 초기 성인기에서 얼굴에 흔적을 남겼으며, 온 생애에 걸쳐 나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19496월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대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으므로 1953년에 처음 가발을 구입했는데 스물다섯 살 때였다.

1973년 이후 그에게 담낭수술이 요구되었지만 병원을 두려워했으므로 수술을 미루었다.

결국 1987220일 금요일 오십팔 세에 뉴욕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걸 모르는 간호사는 아드레날린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동요로 인한 심장박동의 정지로 환자가 괴로워하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다른 직원을 불렀으며 그들이 그를 소생시키려고 한 시간을 소비한 뒤 워홀은 631분에 사망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장례식은 1987226일 피츠버그에서 거행되었고 세례자 성 요한 비잔틴 묘지 부모 옆에 묻혔다.

워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열린 무덤에 향수병(에스티 로더)과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지 한 권을 던졌다.

위령제는 뉴욕시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4월 만우절 날에 열렸으며 한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Magic Flute>를 연주했다.

 

 

워홀의 소장품에 대한 경매가 1988423일부터 53일까지 소더비에서 열렸고 $25,333,368이 걷혔다.

생애에 그를 무시한 모마가 1989년에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앤디 워홀 박물관은 1994년에 개관했다.

 

 

 

디자이너로서의 워홀

 

워홀이 어떻게 화가가 되었을까? 그가 하나의 응답을 엮어냈다.

 

아홉 살 때 내게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가 생겼다. 메이벨린의 광고를 보고 헤디 라머(오스트리아의 여배우)를 그렸다. 잘 그려지지 않아 그걸 버렸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화가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워홀은 1960년대 초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건 만화와 광고였다.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워홀 67),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워홀 86),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등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따라서 그를 화가보다는 디자이너로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사람들은 일견에 워홀의 작품이 반복에 근거함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그가 반복을 전문화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평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2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5일 마릴린 먼로(워홀 87)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큰 명성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오브제들이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생산한다.

 

 

또한 워홀은 재난을 실크스크린으로 뜨기 시작했다.

196264뉴욕 미러 New York Mirror지의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워홀 80)이란 주요 제목이 있는 표지를 대참사의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실크스크린 뜨기가 시각적 이해력의 역사적 새로운 다양성을 요구했다.

워홀은 어떤 주제들이 복제하기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흑백 이미지를 어떤 놀라움을 주는 색들이 필히 꾸며주고, 혹은 불쾌하게 해준다는, 그리고 파란색, 혹은 빨간색, 혹은 은색이 그것들을 응시하는 자아를 입증하고 승인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인습타파의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어리석은 리듬이 받아들인 진실을 이화시킬 수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장해물과 결함을 눌러 터뜨리는 방법, 즉 이미지가 선명치 않게 되거나 충분히 적용되지 않는, 혹은 한 이미지가 또 다른 것의 명료함에 돌발적으로 겹치고 망치게 하는 순간 어디에 스크린이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혹은 물감으로 막히게 자리를 잡아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업가로서의 워홀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그림과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 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초상화를 스크린으로 떠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한 점에 5천 달러를 받았다.

그는 한 해에 50점에서 100점을 위임받아 제작했으며, 많은 초상화들이 개인적으로 소장되었고 그것들이 시리즈로 전시된 적은 없었다.

초상화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리즈, 마릴린, 혹은 재키의 이미지들로 표현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초상화가 유명한 개인들일지라도 더 많은 것들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부유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딸, 아들, 아내, 남편을 묘사한 것들이다.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노동집약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약 50개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뒤 그것들 가운데 이상적인 이미지를 선택해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때로는 그가 오래 전에 폐기한 표현주의적인 예술적인 체하는 패러디로 손으로 색을 칠해 과장된 몸짓에 보탰지만 회화적 표현을 압도하는 있는 그대로의 초상을 늘 모색했다.

 

 

워홀의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위임받아 제작한 것들이 아닌 1972년에 시작한 모택동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1974년에 모택동 벽지 위에 모택동을 걸었다.(워홀 165, 166)

모택동들의 흔적을 좇아 1976년에는 소련의 국기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철물상에서 구입한 실제 망치와 낫이 있는 사진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었다.(워홀 168)

그는 또한 지미 카터(워홀 167)와 믹 재거, 그리고 뉴욕시의 술집과 부두로부터 흑인과 라틴 화려한 의상의 여왕들도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보석과 포도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는 두개골을 실크스크린(워홀 169)으로 떴고 자화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영화제작자로서의 워홀

 

19655월 그의 꽃그림들이 파리의 전시회에서 소개될 때 워홀은 회화에서 은퇴하고 영화제작에 온전히 헌신할 것임을 선언했다.

16mm 볼렉스 카메라를 구입한 뒤 그의 최초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는 음란성으로 주목을 받았다.(워홀 150)

F.B.I.는 음란성을 탐색하기 위해 요원을 보내 워홀의 영화를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요원은 본부에 보고했다.

 

 

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모든 남자는 동성애자들로 보입니다. ...

많은 장면이 대마초, 혹은 마약을 복용하거나 술을 마신 뒤에 연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

카우보이들이 여인의 집으로 몰려가 여인의 옷을 벗기고 성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여인의 음부가 관람자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납니다.

사내와 여인의 행위가 매우 교묘하게 나타나는데 카메라가 행위 전부를 노출시키는 건 아닙니다.”

 

 

워홀은 포르노의 방법들에서 일반적으로 예술적 경제를 위한 패러다임을 보았다.

그가 1960년대 말에 영화제작을 근본적으로 중단했을지라도 남은 생애에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으며, 그의 영화들은 미국 예술사에서 그의 캔버스들만큼이나 중요했다.

그가 영화보급을 중단한 건 1972년이었다.

그의 영화는 한 세대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재 그것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영화제작자로서의 성취가 수프와 명사들의 화가로서의 워홀에 대한 제한된 관념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미술의 종말을 고지한 철학자로서의 워홀

 

워홀은 철학자였다.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그는 끊임없이 생산했다.

예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조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1964년 봄에 워홀은 그의 가장 대담한 조각들을 선보였는데, 그것들은 나무상자에 실크스크린을 부착한 것으로 식품점 상자들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그리고 그 밖의 생산품들을 닮게 한 것들이었다.(워홀 123)

그의 만화속의 영웅들과 같이 그 상자들은 거대한 크기, 가장 큰 것이라는 남자다움을 풍자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들은 단지 상자들에 불과하며 기성품을 복제한 것이다.

그에 의해서 미술품과 미술품이 아닌 것이 우리의 눈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미술이 실재의 모방이라는 서양의 오래된 관념이 그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이는 서양미술의 종말을 고지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워홀은 19664월 일련의 은색 구름들을 선보임으로써 미술의 종말을 논리적인 결론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헬륨으로 팽창한, 공중에 떠도는 폴리에스테르 필름 베게들. 그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의 전시장 한 곳을 은색 구름들로 채웠고, 인접한 전시장에는 벽지를 발랐다.

노란색 배경에 동일한 핑크색 암소를 반복한 실크스크린 벽지를 발랐다.(워홀 143, 144)

 

 

금년은 워홀이 타계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서양미술계는 그에 의해서 종말론에 휩싸였다.

그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양식으로 우열을 가렸지만 오늘날 양식은 미술품을 제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고 그 자체 질적 요소를 결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복제도 창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술품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만 마련되면 무엇이라도 미술품이 될 수 있다.

또한 워홀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예술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 중심에 앤디 워홀이 있다.

 

 

 

도판

 

워홀 67 워홀, <딕 트레이시 Dick Tracy>, 1960, 캔버스에 아크릴, 114-201cm.

당시 인기 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이고 옆에 있는 샘 케쳄은 딕 트레이시의 단짝이며 조수이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조수의 턱은 둥글게 했다.

만화와 달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리게 했다.

 

워홀 86 워홀, <푸른 코카콜라 병 Green Coca-Cola Bottles>,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푸른색으로 가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인 요소로 삼았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달리 그렸다.

 

워홀 87 워홀,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62, 캔버스에 아크릴, 41-51cm.

196285일 마릴린 먼로가 죽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삐져나오도록 했다.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으며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바탕의 오렌지색과 어울리지 않게 눈 가장자리와 옷깃을 녹색으로 얼굴을 피부색으로 상대적인 색들을 사용했다.

눈 가장자리의 녹색은 실제 여배우의 화장보다 훨씬 컸다.

마릴린 사진이 수록된 1950년대의 책을 사서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실크스크린으로 뜬 작은 캔버스를 2, 4, 6, 혹은 20개를 병렬하기도 했다.

<100개의 마릴린 초상>으로 불리는 <마릴린 접개>는 두 개의 캔버스로 제작되었으며, 한 캔버스에 50개의 마릴린 초상을 실크스크린하고 다른 캔버스에는 흑백으로 50개의 초상을 실크스크린했다.

캔버스에 먼저 색을 칠해놓고 색이 마르면 그 위에 마릴린의 얼굴을 실크스크린했는데 사진의 이미지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바탕의 밝은 색과 어우러졌다.

 

워홀 80 워홀,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83-255cm.

파리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이 추락한 사건을 다룬 신문 표지기사이다.

워홀은 조수 헨리 젤드잘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 작품을 제작했는데 젤드잘러는 이 신문을 보여주면서 삶에 관해서는 충분하다.

이젠 죽음에 관해 다룰 필요가 있다고 했다.

 

워홀 166 워홀, <모택동 Mao>, 1973,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107-127cm.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과 정상회담을 갖자 워홀도 중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비록 실크스크린이지만 워홀은 아크릴이 젖었을 때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터치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을 주어 자신이 진지한 태도로 제작했다는 걸 구매자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워홀 165 사진: 파리의 갈리에라 미술관에서 열린 모택동 전시회 장면. 모택동의 초상으로 벽지를 만들어 붙이고 그 위에 모택동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걸었다.

 

워홀 168 워홀, <정물 Still Life>, 1976, 캔버스에 실크스크린과 아크릴, 208-183cm.

워홀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소련의 상징인 망치와 낫이 벽의 낙서처럼 보였으며, 그것들 역시 팝의 이미지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워홀 167 사진: 1977614일 백악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초대받은 워홀이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초상화를 선사하고 있다.

워홀은 지미 카터의 초상화를 세 점 제작했으며 정당에서 1만 달러를 받고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워홀 169 워홀, <두개골 Skull>, 1976, 캔버스에 실크스크린과 아크릴, 28-25cm.

워홀은 파리의 고물상에서 해골을 구입해 조수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한 뒤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인터뷰지에서 두개골을 파시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워홀 150 워홀, <외로운 카우보이들 Lonesome Cowboys>, 1967, 영화의 한 장면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내용의 이 영화는 본래의 제목이 <라모나와 줄리앙>이었지만 <외로운 카우보이들>로 바꿨다.

가운데 비바가 라모나 역을 맡고, 오른편의 탐 홈퍼츠가 줄리앙 역을 맡았으며, 왼편의 테일러 메드가 라모나의 간호사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음란성으로 인해 F.B.I.의 조사를 받았고 TV에서는 이 영화를 성범죄로 단정했다.

워홀은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워홀 123 사진: 1964421일 뉴욕 스테이블 화랑에서의 개인전 개막일.

워홀이 브릴로 상자 조각품들 사이에 서 있다. 화랑은 마치 식품창고와도 같았다.

 

워홀 143 사진: 19664월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된 <은색 구름>이 둥둥 떠 있는 전시장 장면. 제작을 도운 조수 클루버는 <은색 구름>을 구입한 사람에게 향후 10년 동안 A.S.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카스텔리는 조그만 수소통을 끼워 구름 한 점에 50달러에 팔았다.

 

워홀 144 워홀, <암소 벽지 Cow Wallpaper>, 1966, 종이에 실크스크린, 각각 76-112cm.

워홀은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은색 구름>과 함께 <암소 벽지>를 화랑 벽에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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