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0    업데이트: 16-06-03 11:24

미술이론

앙드레 드랭 [1880.6.10~1954.9.8]
아트코리아 | 조회 757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프란시스 쉐퍼-

 

역사와 문명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인간의 사상에서 유래되며, 인간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인간의 사상이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는다. 이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재, 즉 인생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방법, 기본적 세계관, 자신의 틀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바로 이 인간의 기본적 전제가 잘못되어 가면서,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상실되어져 왔는가,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서 상실되어져 갈때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역사의 과거를 통해서 살피고 있다.

 

쉐퍼는 고대 로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고대로마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인류역사의 큰 획을 그을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것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여러 방면에서 로마는 위대했음데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가 당면한 기본적인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로마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지만 그 신들의 神性人性에 의해서 설명되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신은 절대적인 신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신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는, 그 만큼 그들의 가치체계에 절대적인 것이 없었고 빈약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체계는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 당면한 인생의 긴장점들을 감당하기에 흡족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결국 로마인들이 가졌던 인간 신들은 빈약한 존재들이었고 그러한 기초 위에 있는 로마는 멸망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절대적 기반이 없이, 연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한 문명이나 개인은 단지 그것에 대해서 압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을때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강하고 위대하며, 그들의 마저도 상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로마는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로마의 멸망은 외부의 침입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로마 사회를 유지할만한 내부적 기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야만인들의 침입은 그들의 멸망을 조금 더 빠르게 완결지어주었을 뿐이었다.

 

이 고대 로마시대가 끝나고 중세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우리가 중세 시대를 생각하면서 한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중세는 아무런 유익도 없었던 암흑기의 시대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초기 중세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지,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면서, 철저하게 기독교적으로 고심했고 노력했던 흔적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도원 운동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것은 좀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서 행해졌었고, 경제적, 도덕적 원칙에 있어서도 절대성을 제공하였다.

 

또한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중세교회가 많은 업적을 남겼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중세가 진행되면서, 계몽된 문화, 지적 생활, 自虐된 경건 등으로 중세가 특징지워지면서 그와 동시에, 성경적으로 교회와 교리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의 사상은 토마스 차퀴나스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리스시대의 아리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이런 중세 시대에는 너무나 理性을 억압했기 때문에, 이성의 억압이 점차적으로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첫째가 르네상스이고, 둘째가 종교개혁이다.

 

르네상스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중세 시대의 오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은 완전한 상위에 두고, 인간은 완전한 하위에 두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과소 평가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게 되고 인간의 자율권을 강조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척도가 되고, 또한 자율적이며 완전한 독립적 존재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르네상스의 예술을 보면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위대하게한 문화라고 말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을 보면 실제로 성경이 나타내는 연약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섬세한 다윗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굉장이 우람하고 근육질의 강인한 남성미를 보여준다. 이것은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굉장히 위대하게 만들어 낸 상징으로 바라볼 수 있다.

 

중세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위치가 확실하게 구분되어지는데 하나님이 점차로 낮아지고 인간은 점차로 하나님의 위치로 올라 가면서 가운데 교차점을 이루는데 이 싯점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이성을 가운데 두고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는데 반해,

 

종교개혁은 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인간을 만물의 중심영역에 두지는 않았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 모든 것의 궁극적 해답은 오로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해 준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상의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르네상스의 운동으로 이어받은 것이 계몽주의 운동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굉장히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개혁, 르네상스, 근대과학의 발흥 등을 동시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근대과학의 과학자들은 종교개혁의 맥락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초기 근대 과학자들은 거의 90%이상이 신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예를 들어 뉴우톤과 같은 사람은 '왜 내가 과학을 해야하며, 왜 내가 만물을 연구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갈등이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질서가 았고 나름대로 모든 아름다운 법칙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전제되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떤 법칙이 있다. 그리고 어떤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실을 가졌고, 그 발견에서 내가 왜 과학을 하는 지에 대한 회의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근대과학이 발흥할 수 있었던 것은 뉴우턴과 같은 개방된 세계관을 가진 과학자들이 그 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 당시의 과학자들이 왜 과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와같은 근대과학이 발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초기 과학자들에게는 전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과학이 하나님을 상실해 가면서부터는 과학자들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내가 왜 이것을 발견해야 하나?" 라는 질문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컵이 하나 있다면 컵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우주의 어떤 법칙을 발견한다면 그법칙이 왜 존재하는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해답들을 찾을 수 없게 되버리고 말았다. 결국 과학 역시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 것이다. 단지 과학이 과학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의 발달이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쓰여진다 해도 거기에는 그냥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적인 면에서 처음에는 르네상스를 겪고, 또 계몽운동을 겼으면서 인간의 이성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치루면서 이성의 무한한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 인간의 이성으로는 유토피아가 건설되기는 커녕, 오히려 인간의 이성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인간 이성의 꽃이라는 과학의 발달을 통해 얻은 것은 전쟁과 죽음의 비참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이성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현대철학 역시 몰락의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이젠 뭐가 있느냐?"라는 또 다른 물음아래 그 대안으로 '상위개념'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을 상위개념으로 보고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하위개념으로 보는데 이 둘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둘은 상위개념에 의해 하위개념이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루소에게 있어서는 자발적 자유와 자발적 자연으로 이어지고 칸트에 와서는 의미적, 관념적인 실체의 세계와 경험적 형상의 세계로 구분된다. 이러한 두 가지 개념에 있어서, 이성을 문제 해결의 실패자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위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이성을 염세주의로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그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가 없으머 이성으로서는 그것을 추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철학과 과학은 몰락되었고, 이성이 아닌 다른 영역, 좀 더 뛰어 넘어가서 비이성의 영역 에서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 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 싯점부터, 즉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취치에다 올려 좋은 그 싯점부터, 인간이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왔지만 결국은 그것이 모두 다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非理性의 영역이란, 이성의 영역의 실패로부터 넘어 온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을 처음으로 이야기 했는데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비이성의 영역이란 신앙을 뚯한다.

이 신앙에서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쉐퍼의 비판은 "키에르케고르가 하나님의 사람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비이성의 영역에다 가둬 두는 올를 범했다"라는 것이다. , 우리의 이성의 부문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현상의 세계, 이성의 세계에서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비이성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이성의 영역을 정말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것의 한 가지 방편으로 1960년대에는 마약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마약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실예를 들면, 60년대 전세계를 휩쓸었던 비틀즈의 가사내용이나 싸이먼과 가펑클의 가사 내용 중에는 은가루, 즉 마약사용을 예찬하는 내용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은 염세주의로 빠질 수 밖에없지만 비이성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낙관주의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이성의 영역에다만 가두게 되었다. 이때문에 하나님은 이성의 영역, 즉 실제의 삶속에서는 사실 자리를 상실하고 말았다. 단지 신앙, 비이성, 교회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신학도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비이성의 영역, 즉 새로운 사상이나 마약으로 자기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도 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 이상 마약이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지 안는다. 하나의 이데롤로기로서 마약 사용을 주장한 사람은 알더스 헉슬리라는 사람인데, 그는 "마약 사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유토피아로 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다시말해,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종교적 의미로서 마약 사용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르네상스 이후로 하나님이 서야 될 위치에 인간의 이성, 자유성, 독자성이 위치하면서 점점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운동은 인본주의(Humanism)을 연상케 하는데, 이것은 이난의 존엄이나 복지를 강조하는 말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는 포장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본주의의 중심에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서게 된 것이고, 이것이 르네상스, 계몽주의, 인본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중심에 위치한 인간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우연한 존재이며 굳이 목적과 필요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시말해, 인간을 가장 중시해서 만들어낸 인본주의가 결국 인간을 가장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비참해 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자칫 하나님이 인간의 중심에 계시면 "그럼 인간은 뭐냐 종이냐?" 라는 질문의 위험속에 빠져 버릴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 들여야한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비침한 존재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최고의 피조물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최고의 피조물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것, 인간의 가치, 인간의 의미를 찾고 인간을 가장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모든 만물의 핵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길 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프란시스 쉐퍼가 문화 (영화, 사진, 미술,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의 의미를 상실해 왔는가를 기록한 것은 현대인의 가치관,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 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본주의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주의적 세계관으로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 가자는 것이며 그 대 회귀력의 뿌리와 열쇠는 "다윗의 뿌리와 열쇠이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성경에서 올바로 해석하는 길이다.

 

출처:싸이버 미술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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