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8    업데이트: 24-03-26 13:33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정선(1676-1759), ‘도산서원’
아트코리아 | 조회 244

종이에 수묵담채, 21.2×56.3㎝,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연두빛, 초록빛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계절이다. 이 그림도 푸르름이 화면에 가득해 정선은 녹음이 무성한 여름 도산서원을 찾아갔던 것 같다. 퇴계 선생을 사모한 누군가가 그림으로 그려 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살았던 곳이고, 그의 학문과 인격을 상징하는 곳이어서 많은 후학들이 찾아갔고 그림으로 그려져 간직되기도 했다. 성호 이익의 부탁으로 강세황이 베껴 그린 '도산서원도'도 남아 있다.

지금도 이 그림과 비슷한 모습인 산기슭에 높이 자리 잡은 도산서원의 기와집 여러 채가 담장과 외삼문에 둘러싸여 화면 한 가운데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뒤로는 도산(陶山) 봉우리가 우뚝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이황의 고향은 도산 뒤쪽을 감싸고 흘러 낙동강으로 합수되는 토계천(兎溪川)이 있는 온계리이다. 이황은 46세가 되는 1546년(명종 1년) 장인의 장례를 치르러 돌아왔다가 조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토계를 '물러날 퇴'의 퇴계(退溪)로 바꾸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황이 살았던 곳은 도산서원의 외삼문 아래 왼쪽에 바자울로 둘러싸인 도산서당이다. 서당 옆에는 농기구인 듯 한 물건을 어깨에 멘 한 인물이 작게 그려져 있다. 이황이 이곳으로 삶의 터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57세 때다. 집터를 물색하고 새로 집을 짓기에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오년이 걸려 환갑이 되어서야 도산서당과 농운정사(隴雲精舍)가 다 지어졌다. 이황의 거처이자 학교인 도산서당의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연꽃을 심은 작은 못은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 지었고, 기숙사인 농운정사의 서재는 시습재(時習齋), 방은 지숙료(止宿寮), 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라고 했다. 이황은 도산서당에 살며 자신을 닦아 기르고, 공부하며 가르치다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산이었던 이곳에 살면서 이황은 도수(陶叟), 도옹(陶翁), 도산진일(陶山眞逸), 도산병일수(陶山病逸叟), 도산노인(陶山老人) 등 도산을 호로 삼았다. 선생의 육신이 생전에 거주한 도산이라는 장소는 도산서당을 완공한 환갑 때 지은 '도산잡영(陶山雜詠)', 65세 때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등으로도 남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 준(寯)을 불러 자신의 묘비에 '퇴도만은(退陶晩隱)'으로 새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록의 졸기에 나오는 이황의 품계와 관직인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대신.

도산서당 위쪽에 도산서원이 지어지고 석봉 한호가 쓴 '도산서원'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된 것은 선생이 돌아가신 5년 후인 1575년(선조 8년) 여름이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은 「옹주마퇴산모정기(邕州馬退山茅亭記)」에서 "아름다움은 저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된다.", "미불자미(美不自美) 인인이창(因人而彰)"이라고 했다. 도산과 퇴계는 이황으로 인해 불멸의 장소, 불후의 이름이 되었다. 나를 길러준 여기에 모두 빚이 있다. 다시 스승의 날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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