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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노트

꿈꾸는 접시 '신화적 자연'으로의 귀환
아트코리아 | 조회 1,672

꿈꾸는 접시 '신화적 자연'으로의 귀환

글 / 허  정  선 (미학·미술비평) 2005

 

 

 

 

1. 반복성 or/and 유일성?

"접시가 가지는 완벽성에서 출발하는 나의 작업은 접시를 세우고, 눕히고, 찢고, 말고 두드리는 분리·해체 작업을 통해 불완전한 형태미의 형상들을 빚어낸다. 이러한 형상들이 인간이나 신화적 동물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 나는 또 다른 유희를 느낀다." (작가 노트 중에서)
 

이점찬의 '접시'들은 첫 번째 작업과정에서 일상적인 접시의 형태로 똑같이 만들어지는 반복성(repetition)을 내포하고 있다. 단지 크거나 두께에서 차이가 있을 뿐, 이 접시들은 과일이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일상적 관념의 접시들이다. 둥글고 납작한, 정형화된 접시들은 작업의 이치적 과정에서 세우고, 눕히고, 찢고, 말고, 두드리는 분리·해체의 행위를 통해, 일상적인 접시의 형태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된 '부정형의 접시'들로 탄생하게 된다. '부정형'의 접시'란 접시라는 일정한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를 잠재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부정형의 접시'는 더 이상 물리적 그릇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나 세계의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이상적 관념으로서의 용기이다.

 

  

꿈꾸는 접시 / φ40×113cm, φ32×109cm

처음 반복성을 통해 형성된, 정형화된 접시들은 일상적인 접시 형태의 완전성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 똑같은 접시의 형상은 의도적으로 반복·재생된다. 그러나 정형화된 접시들이 부정형의 접시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임의성이나 우연성의 개입은 작품의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정형화된 접시들을 분리·해체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유기적인 형상들은 마치 동물과 인간이 서로 몸을 끌어안고 밀고 당기며, 뒤섞여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뒤섞임은 반복되지 않는다. 임의성과 우연성은 절대로 같은 형상의 꼴을 두 번 다시 재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음으로써, 작품의 유일성(singularity)을 부여한다.

 


꿈꾸는 미소 / 25×15×73cm / 조합토, 청동유

 

이점찬의 작업은 반복성과 유일성, 완전성과 불완전성, 의도성과 우연성 등과 같은 상보적 관계의 이원항들이 빚어내는 하나의 '울림'과도 같다. 이러한 울림은 이점찬의 순수조형도예는 물론 실용도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그의 실용 그릇들은 자신의 독특한 솜씨에 의해 다른 도예가의 그것들과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고, 성형된 그릇이 가마에서 소성 될 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적으로 그릇의 형태가 변형되기도 한다. 조형도예와 실용도예작업을 겸하고 있는 이점찬은 양자에 대한 엄격한 분리를 거부해 왔다. 사실 반복성과 의도성을 주로 실용예술의 속성으로, 반면에 유일성이나 독창성을 순수예술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근대적 예술개념의 산물일 뿐이다. 근대는 실용예술이 반복성을 갖는다고 하여 그것에 미적 가치의 결핍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순수예술에는 독창성이라는 진정한 미적 가치를 부여해 왔다.

 

  

꿈꾸는 접시 / φ41119cm, 38×37×118cm

 

순수예술이든 실용예술이든 모든 예술에서 반복성과 유일성, 의도성과 우연성은 개입된다. 반복성은 틀림없이 공예의 기초적이고 지배적인 속성이지만, 그것이 공예만이 갖는 유일한 속성은 아니다. 순수예술창작에서도 독창성(originality)을 담보하는 예술가의 유일한 솜씨와 반복성은 동시에 요구된다. 미국의 진보적인 여성미술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미니멀리즘회화에서 "격자무늬(grid)"의 반복성을 통해 근대이래 보증되어온 '순수예술(fine arts)'의 독창성이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공예가 반복적이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 또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와 실용. 미와 용(用)을 날카롭게 분리시키는 이분법은 근대적 예술 개념의 병폐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점찬의 이번 전시는 공예는 물론 모든 예술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같다.

 


 

環 / φ71×11cm, φ73×12cm


環 / φ70×10cm / 조합토, 청동유+보라유

 

2. '신화적 자연'으로의 귀환

유기체로서의 인간과 동물의 희노애락은 추구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은 산업사회의 진통을 겪으면서 '동물적'감각을 외면하고 '기계적'감각에 보다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기계적 감각에 의존해 온 인간의 삶은 인간 소외의 갈등은 물론 생태계의 파손과 핵전쟁의 위협 등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마저 겪게 된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자연을 문명의 대립적 개념으로 간주하면서,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 미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산업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 기계의 매카니즘에서 벗어나 동물적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리듬(rhythm of nature)'에 동화하는 유기체적 존재의 속성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이브로의 여행 / 36×16×29cm / 조합토, RAKU소성

 

이점찬은 인간과 동물의 형상이 임의적으로 뒤엉켜 있는 '부정형의 접시'들을 통해 이 시대를 구원해 줄 「꿈꾸는 접시」를 기다리고 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 자연에 대한 문명의 우위가 아니라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화의 유기적 질서를 회복하는 '접시', 그것을 그는 꿈꾼다. 말하자면 타자를 억압하고 동일자를 끌어 모으는 근대적 의미의 기념비적인 영웅으로서의 '접시'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불일치와 부조화를 끌어안는 '접시'이다.

 

이브로의 여행 / 20×20×30cm / 조합토, 보라유
 

현실 속에서 이러한 접시를 꿈꾸는 것은 신화를 향한 열망과도 같다.  흔히 신화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의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작품에 장식된 푸른 색조의 유색(釉色)은 이러한 신화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집트에서 푸른 색조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부활의 의미를 갖는 신성한 색으로 간주되었다. 손의 촉감을 이용하여 흙의 물성을 극대화시킨 「이브로의 여행」연작은 푸른 물결 위에 여성나상을 띄우고 있는데, 이 나상은 신화적 자연의 세계 '이브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하다. 예술가가 그려내는 것은 현실에 기초해 있지만, 어떤 점에서 예술은 현실에서 벗어나 일탈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예술을 통한 정서적 해방감이 작가에게는 원초적 자연의 모습만이 아니라 신비감을 자아내는 신화적 자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동물과 인간 그 유기적 형상들의 뒤섞임에는 억압의 모든 사슬을 끊고 신화적 자연의 세계로 회귀하고픈 자유의 노래가 깃들여 있다.

 

        

      꿈꾸는 접시 / φ42×118cm / 조합토, 청동유          THINKER / 36×12×52cm / 조합토, 적철유+골드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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