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18-04-11 15:30

칠곡이야기

대구 칠곡 관음공원의 관음루기(觀音樓記)
아트코리아 | 조회 893

1993년 한국토지개발공사가 택지개발을 하면서 주민들 휴식공간으로 세운 관음루


2015년 새로 세운 현판, 글은 필자가 쓰고 글씨는 이병택님이 썼다.


일부 틀린 곳을 수정한 구 현판
 

대구 칠곡 관음공원의 관음루기(觀音樓記)

 

 

대구시 북구 관음동의 관음공원에는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93년 토지개발을 하면서 한국토지개발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지은 관음루(觀音樓)가 있다.

2층 누각에는 누각을 지은 이유와 칠곡의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오청(五靑)이라는 분이 쓴 기문이 있었다. 어느 날 토박이 한영기님의 안내로 누에 올라가 보았더니 칠곡의 옛 이름인 팔거(八莒)의 감자 거(莒)자를 음률 또는 땅이름 여(呂)자로, 지금 성주의 옛 이름인 경산부(京山府)의 서울 경(京)자를 경사 경(慶)자 경산부(慶山府)로 써 놓았다.

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고 특히 현재 토박이들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대로 두면 대구 칠곡의 역사가 외곡 될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미 22년 전에 달아 놓았고 그동안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지만 고치지 않고 있는데 나라고 특별히 관심가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칠곡발전협의회와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원이기도 한 배석운님을 만나 이야기를 했더니 그렇다면 당장 고쳐야 한다며 북구청(공원계)을 찾아가 담당 김태규 계장을 만나 현판을 바르게 다시 써서 달면 그 비용은 구청이 부담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며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했다.

부탁을 받고 보니 나 역시 3여 년 전 이곳으로 이사 와서 칠곡사람이 되었으니 봉사하는 뜻에서 수락하고 글을 쓰고 글씨는 같은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문화분과위원장인 이병택님이 썼다.

현판을 새로 달던 날 칠곡향교의 김상길님이 오셔서 구 현판도 내용을 수정하여 그대로 달아 놓는 것도 좋다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새로 마련한 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산(架山)에서 발원한 팔거천이 기름진 들판을 이루어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찬란한 청동기문화를 꽃 피우고 함지산과 옥녀봉이 우뚝 솟아 산자수명한 고장 대구 칠곡은 신라시대에는 팔리현(八里縣)이었다.

고려 초에는 경산부(京山府, 현 성주) 팔거현(八莒縣)으로 별칭을 칠곡(七谷)이라 불렀다.

1640년(인조 18)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될 때 팔거면, 퇴천면, 문주면이었다가 1895년(고종 32) 칠곡군으로 개칭 칠곡면이 되었다.

1980년 칠곡읍(漆谷邑)으로 승격되고 이듬해 1981년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칠곡출장소가 되었다.

대구광역시 북구 관문동, 태전1동, 태전2동, 구암동, 관음동, 읍내동, 동천동, 국우동 등 8개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누각은 1993년 한국토지개발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택지개발을 시행하면서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건축했다.

누(樓) 이름 관음(觀音)은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준말로 관음사(觀音寺)가가 있어 관음동(觀音洞)으로 불리던 마을이름에서 따왔다.

예부터 ‘검소함을 즐겨하고 순박(淳朴)하고 근신(謹愼)함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였다.

 

구 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 현판

 

대구 칠곡은 신라 조에 팔거리현의 일부였다가 고려조에 팔려로 현종 때 칠곡이라 개칭, 慶山府의 속현이 되었다가 조선조 인조 때 칠곡도호부를 설치하여 팔려면, 문주면, 퇴천면의 3개면으로 칭하여 오다가 1914년 4월 10일 칠곡군 칠곡면이 되었으며 1980년 12월 1일 읍으로 승격 1981년 7월 1일자로 대구직할시에 편입되었다. 본 누각은 한국토지개발공사의 대구칠곡지구 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주민들의 편익제공을 위하여 1993년 신축하게 되었다. 五靑

松 停 정운복 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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