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    업데이트: 17-06-09 22:43

중국서화미학

虛實
아트코리아 | 조회 1,027

허실

 虚实


 

    '허자공야'니 '실자유야'라. 공과 유, 이 두 글자는 우주 삼라만상의 생겨나고 소멸되는 모든 것이니 공이 없이 어찌 유를 말할 수 있으며 유가 없이 어찌 공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 공한즉 유하고 실한즉 허하니 바로 대도 자연운행과정 중에서 음양이란 두 기운이 서로 자라나고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즉 물과 불이 서로 모이고 번개와 바람이 서로 쏘며 산과 못의 기운이 통하고 천지가 가득차고 기우는 것이다. 이는 바로 매우 다채로운 우주의 공간을 의미한다. 


   한 폭의 그림이 비록 작으나 아주 구체적으로 소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허실이란 바로 이 소우주 속에서의 대도운행규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필묵의 경중, 필색의 농담, 포경의 소밀, 색채의 차고 따스함, 주객의 호응, 크기의 상간 등이 그 규율이다. 즉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화면의 공간인 것이다. 회화에서의 허실은 마치 사람의 두 다리,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이 부족하거나 모자라면 그림이 이루어질 수 없다. 허실은 서로 상반된 위치에서 이루어져 있어 두 다리, 두 날개가 서로 교차하며 근간을 이루고 있는 도리와 같다. 극한의 순간을 넘어서버려 평형을 잃게 될 수 있는데 일단 평형을 잃어버리게 되면 바로 넘어지게 된다. 반천수 선생은 말하길: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허가 없으면 실을 나타낼 수 없고, 실이 없으면 허가 존재하지 못한다. 소가 없으면 밀을 이룰 수 없고 밀이 없으면 소를 볼 수 없도다. 이는 바로 허실의 상생과 소밀의 상생을 말하는 바로 회화는 이에 이루어진다." 허실은 회화예술 구성중에서의 상반되거나 또 상성하는 개념이다. 아주 보편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회화의 한 측면에서는 이 개념이 한 점과 한 획까지에 이른다. 예를 들어보자. 그림을 그리기 전 상태의 종이위에는 광활한 공백이 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는 허실의 대비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종이위에 붓을 대면 그 순간 바로 허실의 대비가 극명하게 보여지게 되며 흑백과 소밀의 관계가 출현한다. 중국서예와 중국회화에서는 장법과 포치상에 있어서의 학술용어로 '포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흑백과 소밀관계를 처리하는 것을 지칭하는 학문이다. 만약 포백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림이 있는 곳이 실이 되고 그림이 없는 곳은 허가 된다. 용필의 각도로 본다면 조중졸후한 곳이 실이 되고 완유한 곳이 바로 허가 된다. 용묵의 입장에서 본다면 농중한 곳이 실이 되고 천담소산한 곳이 허가 된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한 폭의 그림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허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허실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회화학술용어에 있어서의 '허실' 이 두 글자 그 서로 대응하는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고 상반상성적인 관계를 어떻게 장악해야 하는지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돈양불생, 돈음불장"이라고 말했다. 만물의 생화를 말한 것으로 반드시 음양을 갖추어야 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놓여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음양이란 요소는 절대 나누어질 수 없는 대응적인 것으로 서로 밀치기도 하고 흡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음 속에는 양이 있는 것을 소양이라 하고, 양속에 음이 있는 것을 소음이라 부른다. 음을 품고 양을 안고 있다는 '회음포양'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세계가 형성되고 만물이 싹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림18)

 

그림 33

황빈홍 <산중방우도>의 세부모습

화면중에는 집, 인물, 돌의 표정, 나무틈 등 곳곳에 힌 여백을 남기고 있다.

이 흰 부분이 바로 "일거지광, 통실개명"으로, 빽빽하고 실함 속에 비어져 밝음이 통한다.

실한 가운데 허한 것의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허실도 음양과 같다. 한 폭의 그림이란 이 구체적인 소우주 공간을 두 면으로 나눌 수 없으며 둔허와 둔실은 그림을 이루어지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허한 가운데 실이 있고 실한 가운데에 허가 있다. 이러한 태극의 '회음이포양'의 관점 및 불가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도는 매우 흡사하다. 허와 실을 교차하며 순환시키게 되면, 대비와 통일, 자유로운 생동감이 있으면서 질서도 잡힌 화면이 조성된다. 그 예로 중국 당대 회화의 대가인 황빈홍의 그림을 보면, 빈번하게 화면상의 단단혼흑 가운데에 마을과 집 정자와 인물이 있는 곳을 적당하게 하얗게 남긴다. 이 흰 부분은 하나의 빛과 같아서 화면을 돈현영수하게 만든다. 이는 곧 실한 가운데 허함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림33) 내가 그림을 그릴 때도 역시 매번 빈 곳을 남겨 하얀 부분을 광범위하게 처리한다. 배경이나 인물, 작은 동물을 그릴 때도 주의하는데 이것이 바로 허중지실을 추구하는 것이다.(그림34)

 

그림 34

진옥포의 <추운기혜 - 가을 구름이 피어오르네>

이 그림속에선느 흰 구름과 집이 하얗게 남아 허를 만들고 있다.

이로 인해 허는 더 더욱 깊은 산과 빽빽하게 우거지 산림을 두드러 지게 드러내고 있다.

 

 

    반천수는 <청천각화담수필>에서 말했다. "산수화의 포치에서는 허실를 매우 중시한다. 세상의 '허'한 것은 말 달릴 수 있을 만큼 넓고 '밀'한 것은 바람이 통할 틈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황빈홍은 이렇게 말했다. "허한 곳은 공허한 것이 아니다. 더더욱 경이 있어야 한다. 빽빽한 곳은 더욱 입추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절대 사람을 질식시킬 만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허한 가운데 실이 있어야 함을 주의해야 하며 실한 가운데 허가 있어야 함을 주의해야한다. 실한 가운데의 허는 중요한 정도가 커다란 허에 있고, 허한 가운데의 실은 그 중요함이 커다란 실에 있어 커다란 실 보다 어려우니라. 허한 가운데의 실은 더욱이 실한 가운데 허보다 어렵다. 대개 허한 가운데의 실은 포치 밖의 의경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커다란 허 커다란 실은 바로 '허한 곳은 말달릴 수 있게 하고 실한 곳은 바람이 통하지 않을 만큼 하라'는 대비효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허한 가운데 여전히 경이 있어야 하며 빽빽한 곳은 반드시 입추해야한다"는 것은 허하되 공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실한 곳에서는 공령의 대비중의 조화성을 보여주어야 함이 마땅하고 말하는 것이다. 실한 중에 허하다는 것은 커다란 허와 서로 호응한다는 것이다. (양중의 음과 아주 비슷하다. 즉 소음이 태음과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리함에 있어서 大虚커다란 허에 비해 어려움이 크다. 이에 반해 허한 중에 실하다는 것은 大实커다란 실과 서로 호응한다는 것이다.(음중의 양과 매우 닮았다. 소양이 태양과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리함에 있어서 커다란 실에 비해 더 어렵다. 이것은 허한 가운데 실함이 대실대허의 호응관계에 자주 빌려 도와줌으로 인해 사람의 연상을 이끌어낸 후 비로서 연상중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밖의 경치이다. 바로 같은 것은 공백이다. 공백은 구름과 안개로 연상되어질 수 있다. 혹은 물과 하늘 혹은 평지등 각기 다른 경계로 연상되어지는 것과 같다. 그림에 빌려 쓰여지기만 하면 바로 실제 경치의 각기 다른 형상들이 서로 대응하게 되는 예술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림 35)

 

그림 35

청나라 작가 매청의 <문수원>

흰 부부을 남겨 구름이 덮어 비춤을 보이고, 산세는 더욱 침착웅장하며 의경은 더욱 아득하고 깊이있다.

이 흰 부분이 다 허이다. 산은 실인 즉, 허함으로 그 실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를 포치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바로 방안의 공간과 같아서 허가 실이란 존재가 없는 곳에서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방이라는 구성요소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는 흰 종이 한 장을 들 수 있다. 4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면공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이치로, 한 장의 하얀 종이 위에 먹을 떨어뜨리기 전에는 종이는 그저 흰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먹물이 떨어지고 나면 평면공간이 원래 지니고 있던 혼돈의 상태를 깨트려 버리게 된다. 허실이 공존하는 화면을 만들어 나감에 화가기 매번 종이위에 일필(실을 포치하다)을 더하면 모두 다 원래 있던 공간에는 상응하는 변화(허를 포치하다)가 발생한다. 어떤 이는 화면의 흰 부분을 일러 '셩바이'이라고 부른다. 바로 실을 포치한 후에 남겨지는 상응하는 공백(즉 허한 곳 혹은 흰 부분도 하지 않음이 없다)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실을 포치하는 동시에 허를 포치한다는 말은 일체의 허한 곳이 모두 다 실한 곳으로부터 완성되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황빈홍도 이렇게 말했다. "실한 곳은 쉽고, 허한 곳은 어렵다." 실한 곳이 필묵의 흔적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찾아보기 쉬우나, 허한 곳은 묘명현비하여 거의 잡을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 중의 도리를 명확히 꿰뚫었다면 실중지허는 논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허중지실은 또 어찌해서 어려울 수 있겠는가? 사람의 연상능력을 이끌어내어 기묘한 대비를 운용하면 그림 그린 사람이 느꼈던 허한 가운데 공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 그림에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림에 흰 공백을 남김이 지나치게 많아 경치를 그려냄이 적으면 자못 간단하고 쉬운 맛이 나는 그림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고기잡이 배로 공백부분을 적당히 채우고 푸른 물결을 담는다면 바로 허중지실로 보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림37)

 

 

 

그림 37

송나라 하규의 <송계범주도>

두 소나무만 표현하여 실로서 허를 드러내고 있다.

하얗게 남긴 곳은 물이나 하늘 혹은 드넓은 평원과 들로 연상할 수 있다.

한 조각 떠있는 배는 남겨진 흰 부분을 시냇물로 생각하게 할 따름이다.

 

 

   과도하게 표현이 많아 실하게 되어 기운이 막혀 답답하게 된다면 실한 곳은 허가 보이고 공하고 영함이 드러나게 된다.(그림38) 그림 38은 적묵법으로 그려진 무성한 숲이다. 농밀하게 정확히 표현했지만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질식할 것 같은 우려를 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화가는 나뭇가지와 푸른 샘을 하얀 공백으로 남겨두어 이 우려를 해소하고 있다. 이 허한 부분들이 한밤중의 번개로 보이기도 하고 칠흑같은 밤에 투명한 밝음을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허실의 상반상성의 기묘함이다. 

 

그림 38

청나라 작가  공현의 <운학송음도>

적묵법으로 숲을 표현한 작품이다. 짙고 빽빽함 속에 살아있는 눈을 표현하여

질식할 것 같은 근심을 깨끗이 씻어냈다.

특히 나무줄기와 샘물을 하얗게 남긴 것과, 한밤중의 번개는 검고 아득한 분위기를 환하게 투영하고 있다.

이것은 허와 실이 상반 상성하는 기묘함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 예이다.

 

 

    그림 38 작품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먹을 쌓아 나가는 방법으로 무성한 숲을 그려 빽빽하고 먹이 짙다. 검고 빽빽한 가운데 필마다 선명함이 있다. 이에 반해 작은 하얀 공백들을 포치하고 있다. 한 밤중의 별빛이 비춤을 표현한 듯하기도 하다. 실한 가운데 허함을 아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근대 대화가 황빈홍은 실중지허를 아주 잘 활용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농밀한 가운데 투명하고 성길게 한 뜻이 보인다. 어둠속에 밝음이 보이고 복잡한 듯하지만 질식할 것 같지는 않다. 농중하나 막혀 답답함이 없으니 혼후박무한 높은 풍격을 더 더욱 잘 드러내고 있다. 반천수는 말했다. "허는 실에서 나왔고, 백은 흑에서 나왔다. 노자는 '백을 이해하고 흑을 지켜라'라고 말했는데, 백을 이해하기만 하면 흑은 비로서 견고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포국이 실을 포치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허를 포치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실을 포치함에 있어서 반드시 허를 포치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우리에 게 알려주는 것은 실을 포치하는 동시에 허한 곳(흰 부분)을 함께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한 곳을 포치하는 것처럼 허한 곳도 이와 같이 경영해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공백을 잘 파악하고 그려지는 부분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지백수흑'은 바로 허한 곳(흰 부분)에 대한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며 실한 곳에 대해 정확하게 안배할 수 있게 해 준다. 흰 곳을 잘 셈하여 검은 곳을 배당한다는 '계백당흑'의 함의 역시 이러한 생각의 루트에서 나온 인식이다. 

 

그림 36

청나라 작가 <자장산수첩> 그 2번째

흑백이 서로 잘 조화되어 이루어져 있는 미묘한 극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허함을 세 나무가 위 아래로 이어주고 있어 상하의 기맥을 통하게 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 외에도 용필상에서도 허실의 문제는 존재한다. 예를 들면, 농중은 실이요 경담은 허이다. 안과 압은 실이요, 제와 양은 허이다. 기지외장은 실이고 정신내렴은 허이다......
만약 필법이 지나치게 무거워 자주 판각되면 반드시 허로서 보충하여 함축과 영동함을 북돋워주어야 한다. 만약 필치가 너무 가벼워 부박경조하게 되면 반드시 실을 보충하여 단단하고 안정감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용필의 도는 누르고 들어주는 적당한 정도의 힘과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하는 조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질삽이라는 빠른 가운데 느림의 돌아올 수 있는 태도와 가볍고 부드러움이 강하고 맹렬함을 내면에 감춘 기세도 필요하다. 이러한 용필의 도로 종횡으로 휘둘러 허실을 얻었을 따름이다. 이외에도 산수화 의경창조의 허실처리는 더욱 그 경중을 가늠하고 분촌을 파악해 보아야 한다. 혹은 봉과 장을 펼쳐 널려놓는 커다란 실로 기세를 취하고, 혹은 물을 맑게 하고 구름을 가볍게 하는 커다란 허로서 흥취를 드러낸다. 비록 커다란 실이 세를 취하나 영동하는 허의 흥취를 잃치 않게 해야하고, 비록 커다란 허가 치를 취하나 비어허 폐단이 생김에 빠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의경의 필요로 하는 바이므로 실하게 함에 있어서 실하게 하고 허함게 함에 이르러 하하게 하며 감추어야 할 때 숨기고, 드러내야 함에 나타나게 함이니 신비한 용의 머리는 보나 꼬리를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경창작의 허실이 상생하는 묘치는 정말 얻을 만한 것이다. 총괄적으로 회화의 묘함은 실한 곳에서 죽지 않고, 허한 곳은 공허하지 않아서 허한 중에 실이 있고 실한 가운데 허가 있다. 실로서 허를 드러내고 허로서 실을 이룬다. 그러므로 허실은 상반되지만 또 상생하는 것일 따름이다! 크게는 산천 숲 언덕 골짜기 호수 바다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가는 풀 모래밭 연기 그윽한 샘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림 속 일획일묵의 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세와 모양의 포국이 그러하다. 심지어 낙관과 제발에 이르기까지 인을 쓰는 길이가 얼마인지 크기와 경중은 어떠한지에 이르기까지 허실의 상반과 상성으로 기인되지 아니하는 곳이 없어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허실관계의 처리는 회화예술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또한 기묘한 예술수법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고전시가에서의 격률중의 평성과 측성과 같아서 적당한 처리와 안배를 통해야지만,  억양돈좌, 랑랑상구가 발생할 수 잇으니 기운을 사람의 장에서 돌게 하는 음악적 미감에 견줄 수 있다. 그림에서의 허실관계처리의 교묘함은 그림의 형세구성에서의 기복같은 다양한 변화를 더욱 강하게 창조해 낼 수 있다.  경물안배의 참치은현, 필묵운용상의 치빙종회......심지어 화면의 기운이 굽이쳐 휘돌게 하는 움율적 미감에 이르기 까지 분명하게 드러나며 풍부하고, 생동감넘치며 활기 있는 미감을 누닐 수 있게 해 준다. (그림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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