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    업데이트: 17-06-09 22:43

중국서화미학

渾厚
아트코리아 | 조회 1,024

悦豫且康

혼후한 장초

 

열예차강,  장초 : 예서 느낌의 초서

 

 

 弦歌酒宴,接杯举觞。

 矫手顿足,悦豫且康

천자문 구절


指谬:95期《书谱》折页王世镗草书《悦像且康》应为:悦豫且康

 

오류수정 : 중국 서예 이론 전문지 <서보> 95기의 부록인 왕쓰탕 선생의 초서

<悦像且康>는 <悦豫且康>로 쓰여져야 한다.

 

前几天,青凯兄带来95期《书谱》,中有一折页,为王世镗先生草书,我当时即释作:

悦豫且康,但青凯当时喜形于色,随口说出:悦像且康,并向我解释了一通,说这个意思好。

当时也就没太在意。

 

몇일 전 칭카이 형이 중국 서예 이론지<서보>를 가지고 왔다.

 그 전문지 속에 접혀있던 부록 칼렌더 작품이 있었다.

왕쓰탕 선생의 초서 작품이었다. 나는 당시에 속으로  <悦豫且康>로 해석했다.

하지만 칭카이는 환한 기색으로 아무생각없이 따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悦像且康>라." 해석해 주면서 이 뜻이 참 좋다고 덧붙였다.

그 당시에는 그리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但今早偶然看到这个折页,还是觉得不对,

因为在我脑海中《十七帖》中有这个“豫”字的草法。

记得当时日课的时候,对这个字还在意过,因此有些印象。

草书初学有些容易产生习惯性误释,除了这个“豫”字,还有如“疾风”的“疾”字,

初学者往往会误释为“庆”字,等等.

 

한데 오늘 아침 우연히 이 부록을 보고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면 내 기억속에는 왕희지 법첩인 <십칠첩>중 “豫”자의 초서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낮 수업중에 이 글자의 뜻을 헤아려 본 기억이 어슴프레 났다.

이에 조금의 인상이 남아있던 것이다.

초서를 처음 배움에 있어 습관적으로 쉽게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 '예'자 이외에도 질풍의 '질'자 를 초학자들은 종종 '경'자로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误释本来不是什么大事,因为草书、篆书的释读本来就是一个认识的过程,误释在所难免!

但把“悦豫且康”释错了从一个侧面反应出另一个问题,却是值得我们思考的。

“悦豫且康”出自《千字文》,意思是“快乐又安康”,其中“豫”是快乐的意思。

我最近看《和谐拯救危机》,其中讲到的危机即包含文化的危机,

 

사실 잘못 해석하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초서 전서에서는 인식 과정중에서 잘못 해석되는 경우를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悦豫且康>를 잘못 해석한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 점을 주의깊게 살펴볼 만하다.

<悦豫且康>는 천자문에서 즐겁고 또한 편안하다는 뜻이다.

그 중의 '豫'는 쾌락의 의미이다.

나는 최근 <조화가 위기를 구원한다>를 보았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위기는 문화의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

 

<조화가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중국 净空법사의 강의 보기

http://v.youku.com/v_show/id_XMTUyNjMzMDEy.html

 

 

《千字文》在古代是蒙学丛书的一种,是必学的,

我想,这个“悦豫且康”在古代可能六岁孩童也不会释错的,

因为他首先懂得“悦豫且康”的出处和意思,而对于我们今天的人,

连《千字文》都成为国故了,都成为国学了,

 

천자문은 고대 계몽서의 일종으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 <悦豫且康>는 옛날에는 6세 아이들 조차도 잘못 해석할 수 없었을 것이라 본다.

왜냐면 그 당시에는 <悦豫且康>의 출처와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배우기 때문이다.

반면에 현대의 우리는 <천자문> 조차도 한 나라의 고유한 문화나 국학처럼

아득하고 어려운 학문이 되어버렸다.

 

且如我们书法界,《千字文》是历代名家常写的内容,

历代累积的《千字文》书法文本不下百千,都视而不见,不求甚解不说,

作学问或对待艺术的方法和态度显然是被“科学化”了,

只关心技术,而忽视文化,所以连《千字文》都能释错。

 

우리 서예계에서는 <천자문>은 역대명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내용이다.

역대로 쌓여 내려온 <천자문> 서예문본이 무수히 많다.

하지만, 눈을 뜨고 보아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책을 읽을 때 깨닫기만 할 뿐 자구를 제대로 깊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문을 하거나 예술의 방법과 태도를 대함에 "과학화"되어지고 있어서

오직 기술에만 관심을 두고 문화를 홀시하고 말았기에

<천자문>마저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我曾经在一篇文章中自省:

我们这一代面已经丧失了直接阅读文言文的能力,不靠白话翻译不行了。

这对于文化来讲,是一种危机。

 

 나는 일찌기 문장 한편을 지어 스스로 반성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미 직접 문언문을 읽을 능력을 상실했다. 백화문의 번역을 통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이 사실은 문화적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위기이다.

 

《千字文》曰:“弦歌酒宴,接杯举觞。矫手顿足,悦豫且康。”

意思是:奏着乐,唱着歌,摆酒开宴;接过酒杯,开怀畅饮。

情不自禁地手舞足蹈,真是又快乐又安康。

 

천자문에 이르길 "현가주연, 접배거상. 교수돈족, 열예차강."

그 뜻은 연주하며 즐기고 노래하며 술을 차려두고 연회를 베푼다 :

술잔을 마주하고 흉금을 터놓고 마음껏 먹고 마시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흔들리며 발이 춤춘다 정말 또한 즐겁고 편안하지 않은가

 

但以我们今日的态度和作为面对文化,面对历史,危机临面前而不自知,

如扁鹊见桓公,以为“寡人无疾”,又怎么能真正的又快乐又安康呢?

 

하지만 우리가 지금의 태도와 행위로 문화와 역사를 대함에

 위기에 맞닥트린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편작이 환공을 알현하고, "과인이 병이 없다"라는 줄 알고

"또 어떻게 진정 즐겁고 또 편안할 수 있겠냐?"고 하는 것과 같다.

"니 우째 그리 편할 수 있겠노?" 라고 하는 것과 같다.

 

 


                                                                      四千七百六年十二月十七  丁剑略记于北京

                                                                     4706년  12월 17일   띵찌엔뤼 북경에서 쓰다.

 

草书

초서

 

초서의 종류는 장초, 금초, 광초가 있다.

 장초 = 예서+초서,  한나라 말기에 유행했다.

한예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글자마다 떨어지는 특색이 있다.

금초 = 해서+초서 , 동진시대 유행한 초서이다.

글자끼리의 필획이 서로 연결되는 오늘날 우리가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초서형태이다.

광초는 금초를 방종하게 휘갈려 쓴 것으로 당나라때 유행했다.

 

유명한 서예가로는  

장초는 장지(한 나라말), 황상(삼국시대 오나라), 삭정(서진시대), 송극(명나라 초)

 금초는 왕희지(동진시대), 왕헌지(동진시대-왕희지의 7번째아들),

지영(진, 수나라때로 왕희지의 7대후손), 손과정(당나라) 등이 있다.

 광초는 장욱(당나라), 희소(당나라) 등이 유명하다. 

 

 

장초에 대한 미학적 단어

浑厚

 

무던하다 꾸밈이 없고 선량하다 수수하다 순박하고 정직하다

낮고 우렁차다 무던하다 둔탁하다 둔탁한 힘이 있다 우렁차다 소박하고 중후하다

 

동양미술 참고서적을 보면 혼후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대부분의 번역서를 보면 '혼후하다'라고 쓰고 있다.

전혀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다.

'무던하다 꾸밈이 없고 선량하다 수수하다 순박하고 정직하다'

이렇게 쉽고 이해하기 좋은 말이 많건만 ...

 

장초는 혼후하다

정말 우리 한국 사람들 같다.

홍사만 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이런 순박함이 사라지고 있다.

감정이 많은 수수하고 선량하고 정직한 우리 민족의 특징이 사라지고 있다고 아쉬워 하셨다.

 

지난 주 첫 수업시간에 홍사만 선생님의 감수성을 느꼈다.

나는 누구보다도 더 선생님의 마르티즈 이야기가 와닿았다.

왜냐면 어머니도 9년 넘게 마르티즈르 길러오셨기 때문이다.

아들이 7년가 먼 타국에 있는 동안 나 대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 준 녀석인데

대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본 아버지가 멀리 요양소로 보내셨다.

어머니의 애잔한 마음을 홍사만 선생님을 통해 되뇌이게 되었기에...

이런 감성이 많은 우리 민족의 특징이 바뀌고 있음을 걱정하시는 듯했다.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과 학생간의 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뭐 꼭 인연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의 사제간의 그런 정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한국사람에겐 정이 강한 것 같다. 때로는 독이 될 때도 있지만..

 

章草 

 

장초는 예서로부터 발전하여 이루어진 서체로서 예서의 초서인 셈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나라 재상 두도가 이 체를 잘 썼는데,

 장제가 그것을 좋아해서 그어게 글을 써어 올릴 때 초서로 쓰게 했다고 하여「장초」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초의 기원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견해가 분분하여, 본절에서는 일일이 들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허신(許愼)ㆍ조일(趙壹)ㆍ위항(衛恒)등의 설에 의하면

진말한초에 장초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변천발전의 방법은 예서체를 풀어서 간편하고 쓰기 쉬운 쪽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예서를 장초와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매우 현저히 드러나는데,

장초의 용필은 예서를 답습한 것이므로 기필하는 곳과 특히 날획의 끝은 완전히 예서이다.

하지만 장초는 각 글자마다 필획 가운데 이미 휘감아 이끄는 필법이 있어서

「금초(今草)」의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필세에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서체와「고예(古隸)」는 변화발전되어

「금예(今隸:지금의 해서)」로 되었으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후한ㆍ장백영은 장초에 뛰어났다고 전해지고 금초 역시 그가 창조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는 연대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장회관은《서단》에서

「장초의 글씨는 글자마다 구별되는데, 장지가 금초로 변화시켜 속도를 더하여,

 띠의 뿌리를 뽑으면 서로 엉켜서 쭉 이어나오듯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이끌며

 윗 글자의 끝을 빌려 아래 글자의 시작을 사모, 기이한 형태가 흩어졌다 모이니

여러가지 의도가 아울러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평론은 더 없이 명쾌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초와 금초의 형체와 기세에 대한 다른 분석으로써,

장초가 비록 여서체를 흩트렸지만 아직도 예서의 형세는 남아있어

제각기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도 이어지지 않고

 단지 글씨를 쓸 때예서보다 더 간략하고 민첩하게 했을 뿐이다.

 

장초의 특징은 글자마다 구분되어서 서로 이어지지 않아서 형태와 흐름이 예서의 방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가로획의 끝은 위로 치켜올려지고 왼쪽의 삐침과 오른쪽의 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필획이 휘감기며 이끄는 곳은 왕왕 아지랭이처럼 가늘고 둥글둥글한데

이것은 예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금초에서는 항상 있는 것이다.

 이 또한「필획엔 모남과 둥금이 있고, 법은 사전을 겸한다.」는 운필법이다.

 

결론적으로 장초의 가로ㆍ세로획의 옛스럽고 질박함은 예서와 같고,

필획이 휘감기며 이어지는 것은 금초와 같으니 이것이 장초의 기본 법식이다.

게다가 장초는 필획이 평정하여 금초와 같이 비뚤게 기울어져 형세를 취하지는 않으니,

필법에 예서의 근원을 갖고 있어서 질박하고 혼후한 면모를 포함하고 있다.

 

장초는 초서 가운데 가장 옛스럽고 점잖은 것으로,

한대의 저명한 초서가인 사유ㆍ두조는 모두 장초로 후세에 이름을 날렸고,

장지ㆍ황상ㆍ삭정및 왕희지 등도 모두 장초에 뛰어난 서예가이다.

장회관은 이들을「장초의 귀신」이라고 칭찬했다.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오늘 중국 서예 이론 전문지인 <서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서보> 95기 속에서 부록인 왕쓰탕 선생의 초서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천자문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아버지는 동방연서회에서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 서예를 배우셨다.

그래서 왕희지를 제일 숭상하신다. 그 영향 때문인지 금초를 제일 좋아하신다.

나는 금초보다는 장초에 끌리는 맛을 느낀다.

순박한 느낌이랄까.

 

금초가 완벽하고 유미하며 절제된 형식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장초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그러나 겉으로는 미숙한 듯한 천민이 쓴 듯한 자연그러움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맛이 감성을 더 자극하는 듯하다.

한국사람은 후자가 더 비슷하다.

 

요즘 대구 경북대에서 한국어교육전문가과정을 듣고 있다.

어제 배운 부분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한국어의 특수성

음운, 어휘, 문법, 문자

이 네가지로 나누어서 한국어의 특수성을 배웠다.

그 중에서 어휘편의 두 번째 (나) 항목이

한국인으로서의 서예를 연구하는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중국에서 오랜기간 살아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 혼란이 생기려는 무렵에

우리민족의 우수함을 깨닫게 도와주신 홍사만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나) "한국어는 감정, 감각 표현어가 아주 발달되어 있다. "

 

 "그 나라의 문화역사와 언어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조상은 굉장히 감성적이었다.

과거의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한국을 세 가지로 표현했다.

첫째, 한국인은 흰빛을 좋아한다. 순결 순수한 민족임을 상징한다.

 둘째, 가무에 능통하다. 이것은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암시한다.

셋째, 장례가 아주 거창하다. 3일장 5일장 49제등 복잡하다. 종교성 미래 내세중시한다.

이 셋을 종합하면 한국민족은 자고로부터 이성적이 아니라 감성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은 아주 재주가 많은 우수한 민족이다.

김연아를 보라. 좁은 땅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말이 부족하다.

'빨갛다' 종류가 40개나 된다 

 벌겋다 붉다 붉구쭉쭉... 등이 있다. 다들 사전에 있는 것이지 사투리가 아니다.

 달다 달콤 달싹지근 덜큰 달큰 ..."

-홍사만-

 

한국어학, 한국어문학, 한국문화를 배우고 있다.

진정한 한국서예를 쓰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 것 같다.

원래 목적은 한국서예를 찾아가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인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가서 듣게 되었는데 정말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수업이 너무 좋다.

특히 어제 경북대 국문과 홍사만 선생님의 한국어학 개론 수업이 좋았다.

한국인의 특성은 감성이 풍부하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했다.

개별언어학에 들어가 한국어만의 특수한 성질들을 배우고 난후 장초를 떠올렸다.

한국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장초인데 ...

한국에서의 서예교육은 전문 금초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적인 서예작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로서는 큰 수확이었다.

 

 

 

卢卡奇

루카치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경북대 대학원동 104호에서 한문연수강의가 있다.

월요일에는 맹자, 금요일에는 초서원전강독이 있다.

여기서 한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의 친구분이 경대 독어독문과 교수님이시라고 하셨다.

인사드리러 올라갈 때 대학원동 4층에서 독일미학가 강좌 홍보전단지를 보았다.

 

중앙대 독어독문과에서 개최하는 금요 콜로키엄 강좌이다.

미학의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이었다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에 열리는 강좌였다.

02) 820-5105

장소는 중앙대 아트센터 9층 10901 호

www.ikdk.net

 

루카치의 미학은 서울대 임홍배 선생님이 맡으셨다.

 

<미적인 것의 특성>

 

현실의 미적반응과 과학적 반응을 대비시키면서 마르크스의 미학의 기초를 구축하고자 한 저작

나의 박사 지도교수님이 마르크스 민족미학을 하셔서 루카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사실은 중국어 발음이 가장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외운 이름이었다.

 

(처음 미학, 철학 공부할때 서양철학자 이름을 중국어로 새로 외우는 쉽지 않았다.

루카치는 발음이 가장 비슷해서 가장 쉽게 다가왔고 인상에 깊이 남았다. ^^)

 

 

良宽

료칸


일본의 유명한 스님이신 료칸 [야마모토 에이조]법사의 글에서도

열예차강의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良宽


료칸 (일본 승려)  [야마모토 에이조]

1758 일본 이즈모자키[出雲崎]~1831. 2. 18 에치고 구니[越後國].
일본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 후기의 선승.
본명은 야마모토 에이조[山本榮藏]. 시인이자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촌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17세경에 출가하여 다이구료칸[大愚]이라는 법명을 얻어 승려가 되었다.

 21세 때 순회 승려인 고쿠센[國仙]을 따라 비추 구니[備中國]의 다마시마[玉島]에 있는

엔쓰 사[圓通寺]라는 그의 사찰로 갔다.

거기서 12년 동안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으며 고쿠센이 죽은 뒤에는 탁발승으로 일본 전역을 돌아다녔다.

노년에 고향인 에치고 구니로 돌아와 만요슈[萬葉集]와 고대 서예를 연구했다.

그는 젊은 여승 데이신[貞心]과 깊은 사제관계를 이루었는데,

 이 여승은 료칸이 죽은 후 그의 하이쿠[俳句]와 와카[和歌]들을 모아

〈연꽃 위의 이슬 蓮の露〉(1835)을 편찬했다.

그는 또한 우아한 필치로 높이 평가되는 여러 편의 서예문을 쓰기도 했다.

 

 

신사년 2월 16일 밤 삼성三省 두 글자를 꿈 속에서 보고서 나 스스로를 독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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