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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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7    업데이트: 23-05-04 15:19

자유게시판

[매일춘추] 롤모델 황진이 - 2014-09-30
아트코리아 | 조회 1,607

시를 쓰는 여류 몇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같은 여자가 봐도 여자에게 반할만한 여자가 누구냐는 말을 하기에, 망설임 없이 ‘황진이’라고 말하였다. 필자가 황진이에게 은근히 반한 연유는, 총명함과 천부적인 예술재능도 물론이겠으나 서녀(庶女)로 태어났어도 그 타고난 재능을 끊임없이 갈고닦아 학자, 문인, 일류 명사들과 교류하여 남성 위주의 시대를 오히려 휘저어 놓았다는 점이며, 또한 미모로만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익은 과일 물이 절로 바깥으로 술술 배어 나오듯이, 풍류의 멋이 뚝뚝 듣는 향기로운 여인이라는 점에서이다. 하여 필자는 황진이를 참으로 은혜하고 예인으로서 동경하는 그 첫 번째 여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천마산 지족암에서 십 년 동안이나 수도에 정진하던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킬 만큼 서사(書史)에도 정통할 뿐 아니라 그녀가 남긴 시(詩)가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학행사 뒤풀이 자리에서 남자 시인 한 분이 필자를 향해 “아이구 황진이 아닙니까” 하지 않는가. 왜냐고 묻고 싶지가 않았다. 그 호칭이 좋았다. 또 그분이 왜 그렇게 불러주는지를 이미 감을 잡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필자의 시가 다소 에로틱하다는 말을 그분이 몇 번이나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속으로 늘 황진이처럼 불후의 시를 한 번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벽계수 같은 남자를 보면 황진이가 되어 한 번 유혹해보리라는 언감생심, 그런 야무진 생각의 집을 무수히 짓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일렁이던 어느 날 저녁 산책을 하는데 자꾸만 누가 뒤따라오는 예감이 들었다. 휘파람을 날리기도 하고 ‘가을비 우산 속’이란 노래를 흥얼흥얼거리기도 하였다. 다행히 가로등이 비추고 있어 그리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안보는 듯이 곁눈질을 하여 살짝 뒤를 엿보았는데, 후리후리한 키에 하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이 남자가 혹 나에게 관심이 있나, 어쩌나 보려고 에이 모르겠다, 누각으로 사뿐히 올라갔다. 마침 만삭의 보름인지라 환한 달을 올려다보며 황진이가 벽계수를 향해 읊은 시조-청산리 벽계수야~ 수 이감을 자랑 마라~.(후략)


언젠가 황진이를 동경하며 약간 배워둔 시조창을 용기 있게 읊어버렸다. 그랬는데 아, 이 남자 분, 가던 길 멈추고 서서 조용히 경청하질 않는가! 서툰 솜씨로 끝을 맺고 나니 박수를 크게 보내온다. “잘하시는데요. 이 가을 달밤에 아주 멋지십니다.” 어머나, 가슴이 콩닥콩닥 마구 방방이질 해댄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넓은 길 다 놔두고 저를 따라오셨지요?” “아, 예. 지금 그쪽이 입은 운동복 새로 사셨나 봅니다. 등 뒤에 텍을 그대로 달고 계시기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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