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    업데이트: 12-01-26 16:10

작가노트.평론

생명(生命) 그리고 무한(無限) - 정 진 수(영남대학교 교수)
설희자 | 조회 869
생명(生命) 그리고 무한(無限)

정 진 수(영남대학교 교수)
설희자의 산죽은 잎사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개체로 느껴지고 그들의 생기는 화폭을 가득하게 감싸고 있다. 그 산죽의 잎들에서는 꽃과 같은 결정화된 온전함을 느끼게 한다. 사계절 내내 지지 않는 푸른 꽃들은 화가의 내면의 세계에 만발해 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자연주의적 실체에서 기대하지 않은 초현실의 모습과 추상의 세계가 그의 작품에 드리워져 있다. 생기 넘치는 그의 작품 도처에서 내면의 눈으로 본 「생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바탕에 깔려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생명2000」의 극사실적인 묘사에서 산죽의 강인한 삶을 강조하였고 또한 산죽이 뿌리박고 있는 토양은 활력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산죽의 그림자는 몸부림치는 생동감 자체를 말하고 있다. 산죽과 대지는 힘을 모아 몇 잎을 개화하게 하였고 이제 그들은 들판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푸른 축제와 삶에 대한 갈구는 엮어져 있고 그들은 하나의 실체에서 양면의 리얼리티이며 서로 다른 표현이다. 화가의 내면세계에 재현된 리얼리티에서 초현실의 음영이 스쳐지나간다. 달리의 「내란의 예감」에서 보이는 생존의 이슈가 설희자의 무의식의 영역에 잠재해 있는 것 같다.

산죽의 푸른색과 잎사귀의 형상은 항상 변함이 없다. 유기적 생명체이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자연소재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절대성으로 표현된다. 수묵화로 다루어지던 대나무가 유채화로 채색되어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산죽의 회색 그림자는 수묵화와 흡사하게 보이고 여전히 동양적 추상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자는 풍부한 표정을 지닌 사실에서 투영된 단순한 음영이지만 화가는 외형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산죽에 투사된 자아를 추구하고 있다. 현실을 초월하여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고요하여 무위(無爲)로 가라앉는다.

자연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 불리는 가우디는 과거에도 존재하였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연을 화석화된 해초로 재현하였으나 설희자의 산죽의 세계는 자연 생명체를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도 시간과 유기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절대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의 산죽에서 계절의 음영은 그것이 조화나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말하고 있다.

눈 속에 피어 있는 산죽의 잎사귀는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보인다. 설희자의 겨울 산죽은 깊은 세월을 배경 삼아 더욱 푸르게 빛난다. 겨울의 우주는 단순화된 우주이고 모든 계절 가운데 겨울은 가장 나이 많은 계절이라고 한다. 겨울은 추억 속에 연륜을 넣는 것이고 그것은 오래된 과거로 우리들을 되돌려 보낸다고 한다.(가스통 바슐라드) 눈 밑에서는 '산죽'도 나이가 많아진다. 겨울의 산죽에서 '태고의 과거'에 뿌리를 둔 세월을 읽는다. 화가는 세월의 심연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다. 어느 겨울날 치악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화가는 겨울햇빛이 내려 쪼이는 눈 속에서 푸른 산죽을 발견하고 강한 인상을 느꼈다. 햇빛과 산죽과 눈 위의 산죽 그림자와 눈의 갈라진 틈 사이에 삐죽 드러난 토양 등 화가의 겨울에서 시간은 극복되고 있다.

「무한」에서 화가는 더욱 큰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산죽으로 가득 찬 들판은 티베트의 평원을 가득 덮은 노란색 유채꽃의 평면을 연상하게 한다. 지상의 수평면과는 다른 차원에서 펼쳐진 색채 면을 마음속에 그리게 한다. 지상의 수평면과는 다른 차원에서 펼쳐진 색채 면을 마음속에 그리게 한다. 근경의 산죽은 싱싱한 토양에 뿌리 내리고 대지의 기운과 어우러져 있다. 화가는 겨울산죽에서와 같이 산죽과 풍요로운 대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있다.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소박한 예술을 모범으로 삼는 라파엘전파의 자연주의 사실(로세티)에서 느끼는 뭉클한 감동이 「무한」의 근경에서 재현 되고 있다. 원경으로 펼쳐지면서 실체로서 색체의 세계는 점점 투명하여져 채색 빛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클림트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호수를 가로질러 멀리 떨어진 풍경과 집들을 그렸다. 그의 풍경화에서 자연 경관은 그 부피를 상실하고 이차원의 색채 면으로 전화되었고 이제 물질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무한」에서 실체에서부터 비 물질화의 과정은 근경의 감동을 색채를 지닌 빛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빛으로 바뀌면서 자연은 물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산죽의 평원은 설희자의 추상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자유를 느끼게 한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의 색채와 같이 그것은 비물질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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