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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

다시 陸史를 기린다
이태수 | 조회 807

<세풍>-41-(2003.1.16)

다시 陸史를 기린다

 

 

李 太 洙 <논설위원>

 

 

 “끊임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부분).

 

 오늘은 향토 안동이 낳은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가 순국한 지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1904년 5월 4일 안동시 도산면 원천(원촌)리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직전 해인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열한 번의 옥고를 치르면서 민족저항 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요, 빼어난 시인이다.

 

 오늘 밤, 안동 가톨릭회관에서 육사기념사업회 주최로 그의 생애와 문학을 기리는 ‘추모의 밤’이 열린다.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시인)가 근래에 발견된 육사의 유고시 「잃어진 고향」 등 3편을 분석․평가하는 강연을 하며, 기념사업 등에 대해서도 논의되지만, 이 자리는 그 이상의 큰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도, 문학 풍토도 개인이나 집단이기주의, 걷잡을 수 없는 포퓰리즘(대중적 인기 영합주의)으로 치닫고 있어, 강력하면서도 고고한 그의 생애와 문학은 새롭게 조명되고 귀감이 돼야 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육사는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끊임없이 도전, 강렬한 저항정신에 불을 지피면서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했었다. 많은 문인들이 친일문학으로 기울 때도 굽히지 않았으며, ‘264’라는 수인(囚人) 번호를 필명에 끌어들인 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향토색 짙은 서정적 시풍으로 우리 고유의 정서를 아름답게 길어 올렸다. 당대를 준열하게 살았던 대장부이면서도 어떻게 그토록 빼어난 언어감각까지 구사할 수 있었는지….

 

 그의 시에는 ‘서릿발 칼날 진’(「절정」)과 같은 강렬한 의지의 언어들이 솟아오르고,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청포도」)에서와 같이 조국 강토와 향토적 자연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두드러진다.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라는 우렁찬 목소리엔 나라를 잃은 한과 비애가 꿈틀거린다. 대표작 중 「황혼」, 「절정」 등엔 가열한 저항정신이, 「청포도」 등엔 실향 의식과 그 비애가, 「광야」, 「꽃」 등 후기 작품에는 초인 의지와 그 염원이 녹아들어 있다.

 

 가장 빼어난 작품 중의 하나인 「청포도」는 향토색 짙은 서정적 시풍에 민족 고유의 정서를 아름답게 떠올린다. 상징성을 거느리면서도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짜여져 있어, 당시의 척박한 삶에 대한 디테일을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기도 하다. 강렬한 빛깔을 띠는 작품들과는 달리 맑고 섬세한 표현과 높은 완성도로 새 덕목 하나를 보탰던 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흰 돛단배’나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은 애국지사들의 표징이며, ‘하이얀 모시 수건’과 같은 표현에서는 우리 고유의 정서를 읽게 된다. ‘청포도’ ‘청포’ ‘흰 돛’ ‘푸른 바다’ ‘은쟁반’ ‘하이얀 모시수건’ 등 색깔을 떠올리는 어휘들도 빈번하게 등장해 신선한 이미지를 고조시킨다. 또한 ‘전설’과 ‘하늘’, ‘주저리주저리’와 ‘알알이’라는 대구(對句)는 절묘한 장치이며, ‘전설’의 끝없는 시간과 ‘하늘’의 무한한 공간을 드러내는가 하면, 반복어인 ‘주저리주저리’의 연속성과 끝없이 펼쳐진 둥근 모양의 하늘을 압축한 듯한 ‘알알이’의 공간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시는 전체의 기조색이 청색이며, 백색과 대응하면서 역시 절묘한 이미지와 의미망을 빚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 청색은 아울러 ‘흰 돛’이나 ‘은쟁반’ ‘모시수건’ 같은 백색과 대비되면서 시적 묘미를 증폭시키며, ‘상상의 포도’가 ‘따먹는 포도’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나’와 ‘손님’이 하나의 신체성을 획득한 ‘우리’로 일체화되고 있다. 이 얼마나 준열하면서도 정치하고 언어감각이 빼어난 시인가.

 

 그러나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이어줄 문학상 제정 등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아무튼 안동 출신 문인들이 중심이 돼 내년 5월 4일 그의 탄생 100주년을 목표로 추진하는 이육사 기념관 건립과 생가 복원 등 일련의 기념사업들이 순조롭게 빛을 보게 되기 바란다. 나아가 그런 사업들이 더욱 확산돼 우리 민족사와 문학사에 우뚝한 그의 빛이 길이 우리를 비춰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안동에서의 한겨울 육사 추모의 밤은 그야말로 '홀로 아득한 매화 향기 속의 초인(超人) 기리기와 모시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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