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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

다가선 ‘게놈 시대’
이태수 | 조회 785

<세풍>-43-(2003.4.17)

다가선 ‘게놈 시대’

 

 

李 太 洙 <논설위원>

 

 

 생명의 신비는 인류 역사 이래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릴 수 있게 됐다. 그 신비의 베일을 벗겨 보려는 다각적인 시도 끝에 그 단서가 담겨 있는 ‘게놈 지도’를 완전 해독함으로써 생명공학의 새 지평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미국·영국 등 6개국 컨소시엄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민간기업 ‘셀레라 제노믹스’가 추진해온 이 연구는 근년 들어 급진전, 지난 14일 미국에서 결실을 보게 되면서 인간의 달 착륙을 능가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놈 지도는 인간의 모든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총집합체로 ‘생명체의 청사진’이라 일컬어진다. 이 ‘인간 생명 설계도’의 해독으로 인간은 무병장수를 꿈꿔온 오랜 소망에 한결 가까이 다가서게 됐으며, 생명공학의 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시대를 예고한다.

 

 아직은 새로운 출발점이어서 실제로 적용되려면 적지 않은 세월이 요구되겠지만, 유전자 염기 서열의 규명은 인간이 태어날 때 결정되는 유전학적 숙명까지도 의도대로 바꿀 수 있는 토대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가 진전되면 특정 질병에 관련된 정보를 풀어 읽을 수 있게 돼 암·당뇨병·알츠하이머병 등의 불치병·난치병과 유전병 치료와 예방, 운명으로 여겨왔던 생로병사(生老病死)까지도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들 유전자의 기능을 파악하고, 응용 방법을 점차 개발하게 되면, 인간 생명의 비밀이 감춰져 있는 유전자들을 찾아내 유전병을 막고, 이를 치료하는 신약의 개발이 가능해지며, “치료 약품이 교도소를 대신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게도 한다.

 

 더구나 게놈 연구는 그 자체를 데이터 베이스로 구축해 팔 수도 있게 돼 바이오산업이 차세대의 핵심 산업으로 급격히 부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판도라의 상자’도 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낳고 있다. 이미 선진국들 사이에는 이 산업을 선점하기 위한 다국적 기업 경쟁이 ‘소리 없는 전쟁’의 양상으로 가열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게놈 지도 완전 해독을 마냥 밝게만 볼 수는 없으며, 걱정스럽고 우려되는 점들도 적지 않다. ‘위험한 요술상자’일수록 뇌관을 제거하고 삶에 요긴하게 사용해온 게 인류의 역사였다고 하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만약 이 연구 결과가 오용되거나 남용될 경우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소수집단의 권리가 침해될 수도 있다. 유전자 정보 공개로 취업이나 보험 계약 같은 일상생활에서 열성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차별 받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더구나 인체의 개조나 맞춤형 인간의 탄생과 연결된다면 문제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생명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지고, 인간의 본성마저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진다. 나아가 자연의 거역은 물론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넘나들게 됨으로써 가공할만한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다.

 

 특히 소수 인종 집단에 대한 유전학 연구는 ‘인종적 공격’ 가능성을 내포하므로 더 높은 생명 윤리가 전제돼야 한다. 게놈 지도의 완성에는 법적·윤리적·도덕적 감시의 강화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우려도 그 때문이다. 유전자 정보의 상업화에 따른 지적재산권 논쟁과 선진 강대국들의 정보 독점 같은 일도 크게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 점에서 일부 선진국 외에는 박탈감에 시달리게 될 것도 뻔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빈부의 차이로 게놈 정보의 이용에서 차별이 생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우수한 형질을 조합한 새 인간이 태어남으로써 인류 사회는 또 하나의 갈등 구조를 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게놈 프로젝트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못한 만큼 정부·학계·기업이 공동으로 참여해 시스템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와는 차별화된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시설 투자와 함께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해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가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바이오산업을 적극 육성하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놈 시대’가 과연 우리를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줄지, 더욱 불행하게 만들 건지는 미지수다. 반인륜적 사태를 철저히 경계하고 겸허하게 자제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을 게다. 이를 얼마나 현명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달라지겠지만,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더욱 앞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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