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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

한 ‘思夫曲’의 일깨움
이태수 | 조회 765

<세풍>-48-(2003.12.11)

한 ‘思夫曲’의 일깨움

 

李 太 洙 <논설위원>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했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께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어찌 그런 일들을 생각지 않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중략>…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조선시대의 한 여인이 남편을 먼저 다른 세상으로 보내면서 쓴 한글 고어체의 글을 지금 표기법으로 바꿔 옮긴 편지글의 한 부분이다. 이 아름답고 절절한 사부곡(思夫曲)을 검은 돌판에 새겨 높이 2.5m 등 크고 작은 네 개의 자연석에 붙여 만든 비석이 지난 8일 안동시 정하동 녹지공원(귀래정 옆)에 제막돼 훈훈한 화제를 낳고 있다.

 

 ‘원이 엄마의 애절한 글’이라는 이 편지는 고성 이씨 이응태(1556~86)가 30세에 병환으로 숨지자 아내가 안타까운 마음을 써서 관속에 넣어둔 것을 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 때 발견해 뒤늦게 빛을 보게 됐지만, 그 어떤 시보다도 아름다운 감동을 자아낸다.

한 여인의 애타는 사랑과 그리움, 생전의 사연들을 애절하게 담고 있는 이 글은 가족 해체 풍조가 만연하는 이 삭막한 세태에 신선한 청량제일 뿐 아니라 비석의 구성도 큰 돌 두 개는 부부를, 나머지 두 개는 원이와 유복자 등 두 자녀를 표현해 가족과 가정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다.

 

 가로 58㎝, 세로 33㎝ 크기의 한지에 ‘원이 아버지에게’라고 시작되는 이 글을 쓴 이씨 부인은 남편의 병환이 깊어지자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 줄기로 미투리(신발)를 삼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쾌유를 기원했다니, 그야말로 ‘오래된 한국판(조선판) 사랑과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동대 박물관은 이 편지글을 비롯 미투리, 의복, 만시(輓詩) 등의 유물들을 보관․전시하고 있으며, 지금 ‘450년 만의 외출’이라는 특별전도 열고 있지만, 이들 부부의 ‘사랑 외출’은 이 시대가 잃어가고 있는 가정과 가족들에게 보내는 경종이자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요즘 이혼율이 급증하고, 미혼모 문제, 이민 교육 열풍에 따른 이산가족 형태인 ‘기러기아빠’ 등 ‘한 부모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정이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결혼과 출산 기피, 가정 폭력 만연 등의 문제가 불거지는가 하면, 버림받고 학대받는 아이들과 노인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청소년들은 부모와 대화를 단절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공간에서 머물며 게임이나 인터넷 중독을 앓고 있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게다가 출세 지향적인 부모들의 성향과 입시 위주의 과열교육, 인성교육의 약화로 자녀들이 가출.성매매.자살 등이 빈발해 병이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다.

 

 가정은 한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이며 최소단위이다. 그 최소단위와 근간이 깨어지면 사회와 국가도 흔들리고, 그 골이 깊어지면 결국 깨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처럼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모두가 이기주위에 빠져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뒷전인 채, ‘나 살고 너 죽자’는 식이다.

 

 올해도 거리에는 벌써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일부 기독교.불교 단체나 사회 단체들이 사랑과 나눔, 가정의 의미를 일깨우는 운동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다가오는 새해를 ‘가정의 해’로 정하고, 가정 공동체 해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가정의 사랑 공동체 만들기에 나설 움직임이다.

 

 하지만 일부 단체나 사람들, 미봉책을 벗지 못하는 국가 정책으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간 우리는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관심이 사회와 개인에게만 돌린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회 전체의 발전 논리에 파묻혀 가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으며, 가족을 하나의 단위로 지원하는 통합적 구조도 너무나 취약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이씨 부인의 편지글이 일깨우고 있듯이, 가족과 가정은 사랑과 희생으로 연결고리를 달고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가정 문제를 더 이상 미봉책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그 건강성 찾기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으며,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가정 공동체의 확산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사회와 국가를 기약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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