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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

부끄러움의 미덕
이태수 | 조회 877

<세풍>-54-(2004.9.16)

부끄러움의 미덕

 

李 太 洙 <논설실장>

 

 부끄러움은 양심의 소리에서 비롯되므로 그걸 안다는 건 인간임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성서는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때가 바로 원죄를 저지른 인간의 ‘숙명적인 길 걷기’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삶과 문화는,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부끄러움을 아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 미덕을 저버리거나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스스로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내모는 일이나 다름없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이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법이나 규범의 힘에 앞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더구나 그 행위는 인간 사회의 균형을 지탱하게 해주는 기본적이고 원형적인 안전판이기도 하다.

 

 맹자(孟子)는 일찍이 뜻이 깊고 넓은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 했다. 그렇다면 대장부란 어떤 사람을 일컫는가. “사람이라면 부끄러움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잘 드러나고 있다. 맹자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한 수 높은 위치에 있는 삶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부끄럽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공자(孔子)로부터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인수지변(人獸之辨 )’이며, 이는 ‘사람과 짐승은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이같이 공맹사상(孔孟思想)도 사람과 짐승을 분별한다. 그 기준점을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에 뒀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부끄러움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거나 아예 마비 지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끄러움을 안다면 불미스런 일들이 거의 없어질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부정부패, 파렴치한 사기범, 폭력배, 가정 파괴범 등은 비일비재다. 특히 정치권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끄러움 상실은 위험수위를 한참 넘어서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게다가 누가 꾸짖어 보았자 자기 눈의 대들보를 인정하려 하기보다는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되레 적대감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행태는 보기에 딱하기 그지없다.

 

 경제가 곤두박질하면서 온 나라가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으며, 그 사정은 좀체 나아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갈수록 ‘좌’와 ‘우’로 갈라지면서 자기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풍토가 덧나고 있어 우려를 금치 못하게 한다. 심지어는 그 양상이 마치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의 해방 공간을 방불케 한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는데도 집권세력은 ‘천심(天心)’이라 할 수 있는 민심(民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미덕인 ‘수오지심’마저 잊고 있지나 않은지….

 

 얼마 전에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각계의 원로 1천500인이 시국선언을 했다. 며칠 전에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불교 조계종 법장 총무원장이 역시 집권세력을 향해 무게 있는 쓴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쓴소리 앞에서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는가.

 

 부끄러움의 상실은 곧 인간성 상실을 의미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나만 잘나고 옳다고 나서는 건 ‘철부지’라는 낙인을 면하기 어렵고, ‘억지’에 다름 아니며, 염치를 잃어 추악해진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맹자의 ‘인불가이무치(人不可以無恥)’라는 오래된 말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지금은 마음이 어둬워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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