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0    업데이트: 12-11-21 11:57

칼럼-2

‘욕심의 王宮’
이태수 | 조회 786

‘욕심의 王宮’

 

李 太 洙 <논설실장>

 

 

 우리는 저마다 ‘욕심의 왕궁(王宮)’에 살고 있는 걸까. 인간은 누구나 그 왕궁을 몰래 지어 놓고 개미귀신처럼 숨어서 끊임없이 제몫 챙기기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괴로우며, 저마다 속셈을 하기 때문에 서로 맞아들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오로지 제 몫만 생각하므로 서로 믿지 못하며, 경계하고 맞서면서 이전투구를 불사하기도 한다.

 

 욕심의 왕궁에는 미혹(迷惑)을 떠받드는 졸개들이 갖가지의 파수꾼 노릇을 자처한다. 황금으로 기둥을 세우고, 비취로 지붕을 얹는다. 거기다 돈으로 방바닥을 깔면, 그 왕궁에 사는 게 얼마나 멋지겠느냐고 미혹의 졸개들은 아첨을 떤다. 인간들은 마침내 귀가 솔깃해져 그 아첨꾼에게 먹혀들고 만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 왕궁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라고 타일러도 귀가 멀어 있기 십상이다. 이런 아집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그 어리석음은 무명(無明)이며, 미망(迷妄)이다. 그런 쪽으로 속도를 붙이는 미혹의 졸개들을 쫓아내자고 아무리 외쳐도 소귀에 경(經)을 읽어주는 격이 되는 현장이 바로 ‘뒤틀린 세속(世俗)’이다.

 

 하나도 욕심, 둘도 욕심인 그 세속의 벌판에는 깨끗한 마음을 뜯어먹는 짐승들이 제 아무리 설친다고 해도 ‘깨끗한 마음’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미혹을 불살라 버리고 어둠 속에 빛살을 뿌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다름 아닌 지혜(智慧)요, 반야(般若)다.

 

 욕심의 졸개들인 미혹은 욕심 때문에 살아난다. 미혹이 있으므로 욕심이 생겨 인생은 달콤할 수도 있다. 이게 바로 반야를 비웃고 사는 속세의 오만(傲慢)이다. 그러나 그 첫맛은 달지만 뒷맛은 쓰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알면 못난 속인(俗人)이라도 지혜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진실로 달고 멋지게 끌어올리려면 ‘욕심의 왕궁’을 허물어야 한다. 그 성곽을 굳건히 지키고 키워야 한다고 잔꾀 부리는 미혹의 졸개들을 몰아내야 한다. 모래톱 위의 왕궁과 그 성곽이 높고 거창하며 호화로울수록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오래 전에 읽은 한 학자의 글에 담긴 내용의 부분을 더듬어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았지만, 요즘 마음에 새삼 깊이 와 머무는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욕심의 왕궁’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우며, 그 미혹의 수렁에서 뛰쳐나오려는 생각을 얼마나 치열하게 하고 있는가. 자유롭기는커녕 그 큰 고통과 마주치면서도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갈수록 그 ‘욕심의 왕궁’들로 넘쳐나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욕심의 왕궁’이 즐비한 지금 우리 사회는 제몫 챙기기와 패거리 짓기, 줄서기로 어지럽게 돌아간다. 원칙이 무너지고,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있다. 거짓말과 말 바꾸기,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급기야 우리 사회는 자신과 자신이 소속된 ‘패거리’의 이익만 추구하는 ‘삭막한 풍경’ 속에 내팽개쳐지고, 그 세력 다툼이 창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간다면 우리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편 가르기, 그에 따르는 갈등과 대립은 이미 불안한 차원을 넘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한탄들이 터져 나온다. 인격이나 능력보다는 같은 패거리만 중시되고,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다시 건강하게 일어서려면 원칙부터 하나씩 바로 세워야 한다. ‘욕심의 왕궁’들이 모여 벌이는 ‘패거리 문화’는 그 해악이 머지않아 부메랑처럼 자신과 자신의 집단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가슴을 열며, 쓴소리에도 겸허해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욕심의 왕궁’ 허물기다. 지도층부터 깨닫고 솔선해야 한다. 윗물부터 맑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하는 매력과 견인력이 요구된다. 천심(天心)이라 할 수 있는 민심(民心)마저 저버린 채,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패거리만 중시하려 하기보다 화해(和解)와 상생(相生), 나눔과 베풂의 미덕들은 싹 틔우고 가꾸는 아량을 보여줘야 한다.

 

 달마(達磨)는 왜 갈대를 타고 서쪽에서 강을 건넜을까? 산술의 정답처럼 답이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삼라만상이 다양한 세상에 국화만 꽃이라고 우길 수 없는 이치와도 같다. 하지만 ‘욕심의 왕궁’을 허문 사람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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