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    업데이트: 12-11-21 15:13

킬럼-1

내일은 선택의 날
이태수 | 조회 864

내일은 선택의 날

 

李 太 洙 <북부지역본부장>

 

 우리 경제가 뒷걸음질하는 어둠 속에서 국제통화기금(IMF) 한파가 몰아닥쳐 마음까지 유난히 추운 한겨울이다. 세계에서 열한 번째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중의 하나로 부상해온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 꼴이 돼버렸는지, 눈물겨울 따름이다.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은 정부가 선진화의 모델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국민들도 근대화 단계의 의식과 생활양식을 벗어나지 못한 데서 찾아지고 있다. 한 경제학자는 우리 정부는 주먹구구식으로 세계화를 겨냥하면서 갈팡질팡했고, 국민들도 출세지향적인 입시경쟁이나 과소비에 정신이 팔려 나라가 이 모양이 됐다고 개탄하고 있다. 더구나 정치 현실은 그보다도 훨씬 더한 폐해를 안겨주었다. 정경유착은 일부 대기업만 살찌우는 한편 엄청난 모순과 비리를 낳게 했고, 급기야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 같은 총체적 위기를 직면하는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대선의 순간이 불과 몇 시간 뒤인 내일로 다가왔다. 상처와 흠집 내기, 정권 창출 욕망과 불신감의 팽배, 현실성이 희박한 공약 남발 등으로 얼룩진 대선 정국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참담한 심정은 마찬가지다. 수렁에 빠진 이 나라를 과연 어느 후보가 구난차가 되어 건져주며, 이 우울하고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밝은 내일을 만나게 해줄 견인차가 돼줄 것인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겨울에 불어 닥친 IMF 한파는 우리 모두의 고통분담과 인내, 끈질긴 노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많은 시간을 이겨내야 풀릴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인 가운데 이번 선택의 결과가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줄 수 있을는지, 생각해보면 암담하기도 하다.

 

 한 철학자는 “정치가는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력을 찾아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갖은 술수를 써야 한다. 그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을 휘두르며 남을 지배하는 데 있다”며, 극단적으로는 정치가를 “도적이 아니면 사기꾼”이라고까지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회, 한 국가의 독립과 번영, 존속을 위해서라도 정치는 필요하며, 정치는 어떤 작업보다도 어렵고 개인적 희생을 요구한다고도 밝히고 있다.

 

 우리의 정치 풍토는 과연 어떠했는가. 선거 때마다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 짓기가 고질병처럼 번졌고, 지역이기주의나 집권의욕이 애국심보다는 훨씬 앞서 있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정권 창출이라는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정치인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곤 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도 그 사정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며, 최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는 데 있다. 다시 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모든 국민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정치가의 가면을 쓰고 설치는 깡패나 사기꾼의 벌거벗은 꼴을 가려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이 선택의 기회마저 포기한다면 또 한 번의 죄를 짓게 되는 셈이다.

 

 선택의 기준은 물론 개인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다만 이 수렁과 같은 난국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진실하고 정직하며, 우리를 따스하게 안정시켜주고, 진정한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선택하는 지혜 짜내기는 아무리 강조돼도 좋을 것이다.

 

 미디어선거 시대를 열면서 우리는 TV 화면으로나마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는지, 믿을 만한 지도 대충 짚어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과연 어떤 후보가 난국을 극복하고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높여줄 비전을 지닌 인물인지도 나름대로 가늠해보았을 것이다.

 

 대선의 주인인 우리는 모두 투표장에 나가 주인 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선택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이끌며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우리에게 따스하고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대통령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의 정치현실을 개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치풍토가 기대치를 한참 벗어나 회복의 기미마저 보여주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판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정치가들이 철새 떼처럼 몰려다닌다. 마치 먹이를 따라 이리저리 유영하는 물고기와도 같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치적 신조나 국민을 위한 헌신의 자세보다는 오직 집권 야망에 불을 지피거나 이해(利害)를 따라 움직이고 옮겨 다니는 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같은 정치현실을 지켜보면서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와 로리메타르케스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가 새삼 생각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기초를 다지면서 실권을 잡았다. 이때 트라키아의 왕 로리메타르케스는 아우구스투스와는 대립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아우구스투스와 동맹을 맺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 이 두 사람이 함께 앉게 됐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사람들과는 술잔을 나누면서 로리메타르케스는 무시해버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로리메타르케스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배신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배신자는 좋아하지 않아”

 

 이 짤막한 교훈은 오늘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로마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줏대가 없는 로리메타르케스와도 동맹을 맺었지만, 그 배신자를 끝까지 경계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배신으로 얼룩져 있다. 이해타산에 따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이야기가 암시하듯 배신자는 결국 깊은 상처를 안게 되기 마련이다.

 

 동지를 배신하는 자는 동지들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받는 동지보다는 그들을 배신한 그 자신이 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런 비참한 상태를 잊으려면 배신자는 결국 그 자신까지도 배신해야 한다. 그것이 배신의 생리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뒤 무화과나무에 목을 매 죽은 것도 배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준다.

 

 정치를 하면 카멜레온을 닮는다고 하지만 우리 정치인들은 철새를 생리를 너무나 닮아 있는 것 같다. 지조나 절개는 그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이 돼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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