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3-12-13 15:49

언론 평론

야정 서근섭의 서화세계
이태수 | 조회 1,259

 

첨예한 감수성, 빼어난 에스프리의 예술가

-야정 서근섭 교수 서화집 발간에 부쳐

 

 

 

 

이 태 수 <시인, 전 매일신문 논설주간>

 

 

 

 

 

ⅰ)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적인 공간 속으로 가져올 수 없어 모방(模倣)을 통해 예술(藝術)의 길을 텄다.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예술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빚는 형상(形象)은 자연처럼 살아 숨 쉬는 유기체(有機體)는 아니지만 ‘에스프리’라는 인간 정신으로 채워진 ‘유기체 아닌 유기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유기체들에는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물론 이를 떠올리는 선이나 색채, 그 형상에 숭고(崇高)한 인간 정신이 깃들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 대상은 절제(節制)의 미학 속에 농축시킨 선과 색채로 변형되거나 변용돼 거듭나면서 새로운 미학적 매력을 발산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예술 양식인 서예(書藝)와 문인화(文人畵)는 화선지(한지) 등 흰 화폭 위에 침묵으로 말하는 먹을 위주로 고매한 인간 정신을 드러내 보이는 예술이자 도(道)라 할 수 있다. 이 양식에는 절제에서만 발견되는 기하학적(幾何學的)인 은유(隱喩)의 미학이 자리매김하며, 인간적인 이 미학에는 절제를 통한 균형(均衡)과 조화(調和), 투명한 빛이 중요한 미덕(美德)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서예가(書藝家)는 기하학적인 구도와 틀 속에 ‘마음의 그림’들을 압축하고 절제해 나름의 빛깔로 형상화하는 예술가다.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예술가의 경우 신비롭고 광활한 미지(未知)의 세계를 추구, 일상적인 경험의 공간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삶의 진폭을 넓히고 고양(高揚)시켜주는 새 지평(地平)의 조형언어를 향한 꿈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다.

 

ⅱ) 반세기 넘게 서예와 문인화의 외길을 걸어온 야정(野丁) 서근섭(徐根燮) 교수는 바로 그런 예술가다. 그는 오랜 전통이 쌓이면서 굳어져버린 형식과 내용의 한계를 첨예한 감수성과 빼어난 에스프리, 치열한 실험의식(實驗意識)으로 무너뜨리고 뛰어넘는 창조적인 조형언어(造形言語)들을 빚으면서 참신한 미학적 공간을 열어 보이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시대에 걸맞게 현대적인 감각과 발랄한 상상력으로 국제적인 문맥에 놓일 수 있는 새로운 필법(筆法)과 화법(畵法)을 지향하면서 장르의 벽까지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거의 어김없이 전통적인 서예와 문인화에 뿌리를 두면서 그 정신의 깊이와 높이에 맥을 대는 양면성을 거느리고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형식에 있어서는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을 아우르며 새로운 길트기에 무게중심을 두는 듯한 그의 근래의 작품들은 화선지와 안료(顔料)뿐 아니라 천(광목)과 다양한 물감 등 새로운 재료들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다. 최근에는 회화(繪畵)의 추상표현주의 기법이나 설치작품과 같이 평면을 일탈해 입체성(立體性)으로 그 영역을 과감하게 확대하는 ‘파격(破格)’마저 불사한다.

이 때문에 그의 문인화들은 단순한 선(線)들과 과감한 붓 터치 등으로 대상의 내면을 형상화하거나 대담한 구도(構圖), 생동감이 넘치는 필획(筆劃)이 두드러지는 비구상(非具象) 작업으로 비약되기도 하고, 서예작품들마저 문자와 회화의 접목, 문자의 상형(象形)에로의 회귀나 그 조형성의 극대화(極大化)로 나아가는 새로운 화법을 펼쳐 내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그의 실험은 소밀(疏密), 고졸(古拙), 균제(均齊) 등 기존에 중시돼온 개념들을 뛰어넘기 시작했으며, 재료의 다양화를 통한 회화성 떠올리기로 변모하면서 점차 꼴라주나 흘리기 등 현대회화의 기법들이 구사되고, 이중희 교수(계명대학교)의 풀이대로 “전통적인 문인화와 현대적인 문인화가 공존하는 화면, 구상화와 추상화가 공존하는 화면, 서예와 회화가 한 공간에 표현되는 화면”을 함께 끌어안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서화세계를 구축해 보인다.

 

ⅲ) 야정의 이 같은 미래지향적 현재진행형의 모색과 도전은 오랜 세월 동안 전통 서예와 문인화에 천착하면서 각고의 수련과 끊임없는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쳐 다다르게 된 필연(必然)의 문맥 위에 놓인다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된다.

더구나 한국 서예계의 우뚝한 봉우리인 선친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선생의 재능을 타고나 그 슬하(膝下)에서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지도를 받았고, 그 예술혼(藝術魂)을 이어받아 오랜 세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일궈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도 한다.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까지 선친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배우며 ‘따라하기(전수)’에 무게를 싣는 한편으로 안진경, 구양순, 저수량, 육조의 해서와 왕희지의 행서 등을 두루 익히고 섭렵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석고문’ 등을 통한 전서, ‘장천비’, ‘사신비’, ‘조전비’ 등을 통한 예서 연마에 매진해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선친의 지도에 힘입어 이런 힘든 과정들을 거친 그는 1970년대 중후반부터 선친의 작품을 방불케 하는 작품들을 선보여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78년 선친이 별세한 뒤 그는 그동안 천착해온 고전(古典)에서 자신의 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초서와 갑골문, 금문, 청대 하소기의 예서와 행서 등 한문(漢文) 오체(五體)의 빼어난 개성적 작품들까지 연마의 폭을 넓히고, 사군자, 산수, 인물, 기명절지 등에 이르는 표현기법들을 갈고닦았으며, 국전(國展) 등을 통해 서예가로 지명도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부터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는 서예와 문인화를 발표해 이 분야의 개척자로 떠오르고, 파격적인 구도와 죽농의 영향을 넘어서는 대범한 필획 구사 등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일구는 길을 열정적으로 모색해 한국의 대표적인 서화가(書畵家)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오늘에 이르는 초석을 놓고 다졌다고 할 수 있다.

 

ⅳ) 야정 서근섭 교수는 서화가로서의 활동과 병행해 후학(後學) 양성과 서단(書壇) 발전에도 열정적으로 이바지해왔다. 1992년 계명대학교에 서예과가 개설되면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같은 대학교 예술대학원에 서예 전공을 신설(미술학과장)해 1백여 명의 석‧박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출범한 교남(嶠南)서화연구회의 후신인 영남서화회를 주도한 선대(先代)의 유지를 받들어 그가 계승해 이끄는 사단법인 죽농서단(竹儂書壇) 이사장으로서도 40년 넘게 활약해왔다. 1923년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선생이 개설하고 죽농 서동균 선생이 운영해오던 영남서화원을 1973년부터 맡아 지도‧운영해왔다는 사실은 서예사적 맥락으로 볼 때 여간 소중하고 귀중한 일이 아니다.

그는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 외에도 영남서예가협회 회장, 대구서예가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등으로 미술‧서예단체들을 이끌고, 국전(國展)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비롯해 각종 서예공모전의 운영과 심사에 참여하면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2009년에는 한국 서화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에서는 최초로 동방대학원대학교 서화심미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야정 서근섭 교수는 이제 한국 문인화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서화대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어언 원로(元老) 반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젊은이 못잖은 열정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며 서화예술의 현대화와 세계화(世界化)를 향한 꿈에 불울 지피고 그 성취(成就)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오늘날 한국 서예계가 가장 주목하는 서화가로서 확고한 위상에 오르게 한 것으로도 보인다.

한국서단의 우뚝한 봉우리로 떠오른 그의 영향력 역시 날로 증폭(增幅)되는가 하면,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 영역도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무대로 확대하면서 국제문맥 속의 한국 현대서화의 위상제고(位相提高)에 무게를 싣고 있기도 하다. 그런 도전과 활약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게 하는 이 과정에서 마련되는 그의 서화집 발간을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해마지 않는다.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