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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이야기

이태수 선생님께 김상환 上
아트코리아 | 조회 1,030

이태수 선생님께

 

‘무명(無明)’과 ‘고독’에서 문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나는 이후로도 문학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집 『침묵의 결』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몸’을 가진 인간의 고통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마음의 집’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이 얼마나 오래고, 크고, 높은지요. 인간의 비극은 어찌 보면 자연과 하나 되지 못하는 데서, 아니면 신체(몸)와 영혼(마음)의 불일치, ‘무명(無明)’과 ‘미망(迷妄)’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요?

 

“어디론가 갈 수는 있어도/되돌아가지는 못하는” (길), “그 그윽한 길을 더듬어 헤매는 나는/하염없이 무명 속을 떠돌고 있다”(「갈 수 없는 길」)

“새봄은 어김없이 돌아온다/아무리, 그 누가, 막아도 먼 길 돌아서 온다”(「새봄은 어김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가 자꾸 작아진다//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점이 된다//점이 점점 더 조그마해진다//눈 뜨지 않고 앉아 있으면//보일 듯 말 듯하던 점 하나//차츰차츰 더 커지기 시작한다//구르는 눈덩이처럼 자꾸 더 커진다//또다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진다” (「미망迷妄」)

 

그러나 문제는 다시 ‘마음의 집’이거나 ‘침묵’입니다. “침묵의 거처/침묵의 화신/침묵의 심연/시원의 침묵/침묵의 벽/침묵의 틈/침묵의 소리/침묵의 결”에서 보듯이, 이번 시집에 미만해 있는 침묵의 의미와 반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먼 데 희미한 빛에서 신성한 말이 들리는 순간, 성스러운 빛과 소리의 무늬가 현현하는 순간이 침묵의 정적인 경우라면, 「겸구箝口」(“한낮의 침묵은 여전히 견고한 담장,/새들의 조잘거림도, 아이들의 종알댐도/그 담장에 부딪쳐 튕겨 나가는 탁구공 같다”)는 동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중심에서 솟아오르며/다시 그 중심으로 되돌아가는 물”(「분수噴水」)처럼 말의 세계 또한 그렇습니다.(“세상의 모든 말들은/당초 한 중심에서 비롯됐겠지만/이내 그 심연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분수噴水」). 말과 침묵의 ‘사이’야말로 어느 모로 시와 시인이 거처하는 ‘차이’의 세계이자 ‘심연’이라면, 시작(詩作)은 ‘연잎에 맺힌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아닌지요?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을 달밤」), 시나브로 가을 강물이 깊어만 갑니다. 한편으로, 기억의 눈과 빛이 선명한 이번 시집에서 「안개길」은 다른 반향과 울림이 있습니다.

 

안개 속으로 한참 달리다 보니/잘 보이지 않던 길이 되레 선명해진다/진정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지만/도처에 길들이 기다리기 때문일까/찾으려 하면 잘 안 보이지만 그냥 따라가면/길이 길들을 열어줘서 그럴까//생각해보면 나도 저 안개 입자의 하나,(「안개길」)

 

내내 건승하시길……

 

2014년 10월 6일 아침, 김상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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