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    업데이트: 18-03-22 16:19

칼럼-4

총 1개 1/1 page
<2015년 이후의 칼럼>
작성자 아트코리아 | 작성일 2018/03/22 | 조회 66
<2015년 이후의 칼럼>
 
노블레스 오블리주—경북신문 2015. 4. 1
 
 
세계에서 가장 오래 부(富)를 누렸다는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는 부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을 안겨준다. 이 가문에는 여섯 가지 ‘가훈’을 비롯해 ‘육연’, ‘가거십훈’ 등이 언제나 떠받들어져 왔다. 고운 최치원의 후손인 이 가문은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부를 지키고 키웠으며, 사회 환원으로 마감한 전설적인 부자였다.
9대에 걸쳐 진사를 지낸 양반 집안이었지만 지탄의 대상에서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정당하게만 부를 축적하고, 적절히 사회에 환원해 존경받았다. 마지막 부자 최 준은 막대한 돈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썼고, 인재 양성을 위해 1947년 대구대학(1967년 청구대학과 통합해 영남대학교)을 설립해 모든 재산을 바쳤다.
오래전이지만, 이런 내용을 소상히 다룬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단숨에 읽게 된 건 오늘의 사회나 부자들이 그런 덕목들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엔 당대뿐 아니라 후손과 이웃에게까지 펼쳐지기를 꿈꾸는 ‘아름다운 비전’이 부각돼 있다.
그 첫 번째 덕목은 근검절약정신이었다. 인조 때 최진립이 일으킨 ‘청백리정신’을 후손들이 저버리지 않았다.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는 가훈은 그런 정신의 소산이다. 두 번째 덕목은 정당성과 도덕성을 담보로만 재산을 늘렸다는 점이다. 최국선(1631~82)에서 최 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흉년 때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 실천 덕목이 가훈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같은 선린정신은 부자들이 엄청난 수난을 당한 동학혁명 때도 완전히 예외의 자리에 놓이게 했다. 재지지주였지만 마름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각별히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농민들의 아픔을 최소화하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가훈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가 말해주듯, 부를 크게 키울 수 있어도 적정 이윤만 도모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주지 않아 원성을 사지 않았다.
조선조에는 양반 신분(진사 이상) 유지가 곧 부의 유지 조건이기도 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란 가훈은 그래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학문으로 양반반열에 오르되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데는 권력에 맛들이면 그 다툼에 휘말려 보복 당할 경우를 우려하는 지혜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철저한 정경분리주의였던 셈이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집안 인심 홍보 효과는 물론 문화교류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가훈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나누고 베푸는 공동체적 노사관계 맺기로 불만 세력을 잠재우는 전략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자손 대대로 부가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정치는 금력을 이용하고, 재력가는 금력으로 세력을 매수하려 했다. 이권을 얻어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정경유착으로 이룬 부는 오래지 않아 정적들에 의해 파멸에 이르게 마련이었다.
속담에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부자가 되기 어렵지만 부를 지키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최 부잣집의 비결은 청렴한 선비정신과 투철한 국가관, 충절과 애민정신에 뿌리를 두는 데 있었다. 빈민 구제를 통한 재산의 사회 환원도 크게 돋보이는 대목이다. 특히 가훈에 나타난 경영철학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도 여전히, 어쩌면 더욱 소중한, 일깨움을 안겨준다. 성서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기록돼 있다. 부유해질수록 마음은 가난해지는 사회, 부익부 빈익빈을 넘어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받들어지는 사회는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일까. <시인>

 
 
 
‘가정의 달’ 유감—경북신문 2015. 5. 4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오월이다. 온갖 봄꽃들이 산과 들판, 도회의 거리까지 화려하게 수놓고, 초록물결 속에서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오묘한 질서를 깨닫게 되는 은총(恩寵)의 계절이다. 어떤 시인이 오월을 “찬물에 얼굴 씻어낸 청년의 참신한 모습”에 비유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여왕의 계절은 ‘가정의 달’이자 ‘청소년의 달’이기도 하다. 지난 1일은 삶을 영위케 하는 동력인 노동과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 ‘근로자의 날’이었다. 5일은 미래의 주인공들이 될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날’, 8일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어버이날’이다.
11일은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새 삶의 계기가 마련되는 ‘입양의 날’, 15일은 숭고한 가르침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승의 날’, 19일은 ’성년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이며, ’부처님 오신 날‘도 25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과 가족, 자신과 타인, 사랑과 화해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우며 우리 자신을 깊이 들어다보게 하는 계절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과 가정이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시련을 이겨내는 미덕(美德)을 보여 왔다. 나아가 가정은 보다 풍요롭고 밝은 미래를 꿈꾸는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해 왔었다. 그러나 요즘의 우리 현실은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사회의 기본요소이자 마지막 보루(堡壘)라 할 수 있는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이 불협화음을 낳는 세태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아버지가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해 가정 불화-이혼-가출로 이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버지가 가족의 운전사이거나 아내에게 돈 버는 기계가 아니면 ‘변강쇠’가 돼야 대접을 받을 판이라면 난감하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기(氣)를 살려주고 방황하는 가족들을 감싸 안는 사랑과 화해의 울타리로서의 가정, 그런 본래의 가정과 가족을 되찾는 일은 아무리 강조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고령화 사회의 속도가 붙으면서 오래 사는 것도 ‘욕’이 되는 세태이다. 고령화는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지만 ‘시한폭탄’이라는 양면성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맞벌이 부부도 크게 늘어나 홀몸노인이 증가할 요인은 점점 커지고 있기도 하다. 질병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벌어지고 있어 ‘나 홀로 노인’ 문제도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가 삶의 가치를 지나칠 정도로 부(富)에 두게 돼 그런 가정에서 정서적 불안을 겪으면서 자란 어린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걱정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인륜(人倫)과 도덕이 무너지고, 사도(師道)마저 이지러지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가치관의 혼란으로 사회지도층까지 실망을 안겨주는 경우마저 비일비재다.
가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시발점이자 그 울타리이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를 기약해 주는 꿈나무들이다. 이 때문에 가정 일으켜 세우기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이 건강하지 않으면 사회도, 나라도 건강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외환위기 이래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데도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아주는 사랑과 화해(和解)의 정신이 요구된다.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는 사회는 잔인할 정도로 등 돌리고 배반하는 현실을 낳을 뿐이다.
사랑과 화해의 정신은 먼저 가정에서부터 싹이 트고 자라야만 한다. 그런 다음 마치 물 흐르듯이 사회로 번지고, 나라로 확산되는 것이 수순이요 이치(理致)이며, 바람직한 흐름이다. 그런 흐름이 성숙하고 돈독해질 때 우리 사회는 따스하고 풍요로워지며, 자연스럽게 ‘바로 서는 나라’까지 기약해 주게 될 것이다. <시인>

 
 
 
따스한 세상, 멀기만 할까—경북신문 2015. 6. 1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적잖아 안타깝다. 세상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제대로 안 돌아갈 때 드러나는 병리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치․경제․사회적 갈등과 불안이 보통사람들을 지칠 대로 지치게 해서 그렇다면 더욱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죽기보다 살기가 어렵다’는 말은 들리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불행하게도 지난 2004년부터 세계 1위라는 불명예의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80세 이상 고령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가운데, 연령대가 내려오면서 낮아진다고 하며, 남성 자살률은 여성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과연 무얼 말해주고 있는가. 특히 중년남성의 자살은 실업과 생활고 등 경제 상황 때문이라면 대책이 시급하다. 또한 노인들의 자살 요인이 가족 해체나 노후대책 부재 등 고령화 사회의 그늘 때문이라는 점도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되는 조기 퇴직과 실업 행렬, 대책 없이 황혼을 맞이하는 노인 문제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노인의 70%가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들을 기다리고 건 빈곤, 질병, 소외와 ‘할일 없음’이고, 이들을 부양해야 할 중년층의 고충까지 떠올린다면 한숨이 안 나올 수 있겠는가.
옛날 클레오파트라 집권 시절 ‘자살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사회 공인이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을 때 소신이나 약속을 죽음으로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에서도 그런 자살이 영웅시됐다. 그러나 명예를 건 ‘명분 자살’이 허용되던 유럽에서도 13세기부터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살은 타살보다 죄가 무겁다.’는 해석을 체계화한 이후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자살을 죄악시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카락 한 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게 유교의 신체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신체관을 받드는 사회에서의 자살 문제에 대해서는 사족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그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만 있는지…….
자살의 유형은 물론 여러 가지다. 개인의 억울함, 분함, 고달픔에서 오는 ‘개인중심형’과 조직과 ․집단의 의리나 명예로 인한 ‘집단중심형’이 대표적인 예다. 어느 쪽이든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생명의 존엄성이 허물어지고 목숨을 경시하는 가치관도 큰 문제다. 그러나 오죽하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겠느냐 하는 데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 살림과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계층 간의 위화감이나 박탈감이 해소되지 않고 양극화로 치닫는 한, 이런 사정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건 그야말로 ‘먼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반목과 갈등, ‘나’만 아는 이기주의의 깊은 골,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에선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보통사람들은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를 우려해 왔다. 악화일로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경제를 크게 걱정해온 것도 물론이다. 나빠지기만 하는 그런 수렁에서 벗어나게 해줄 지도자를 한없이 목말라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가 잦은 나라로도 악명이 높다지만,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보다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니 그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반시장적 포퓰리즘과 ‘코드병’을 벗어던지지는 못하고 있으니 이 역시 ‘마이동풍’이기만 한 것일까.
어린 시절, 어떤 시인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러나 요즘은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 예찬이 무색할 지경이다. 올해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꽃샘바람과 미세먼지가 유난스러웠고, 날씨가 변덕 그 자체였다. 봄이 너무 일찍 오는 듯하더니, 한여름 같은 봄이 이어져 어떤 친구는 ‘날씨마저 세상을 닮아 미친 여자 널뛰듯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자살을 권할 정도로 난국이라면 지나친 말이기만 할까. 정녕 이제부터라도 달라질 수는 없을까. 다리걸기를 일삼는 정치 풍토가 바뀌고, 경제가 살아나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절망뿐일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아쉬운 대로 기댈 언덕이 생기고, 인정이 되살아나며, 살만한 ‘따스한 사회’로 거듭나려면 정치가 등 사회 지도층부터 달라져야만 한다. 보통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오만과 독선, 눈앞의 이기주의를 벗어버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끌어안아 일으키고 나누려는 마음에 새롭게 불을 지펴야만 할 세상이다. <시인>
 
 
 
 
 
아름다운 마음 가꾸기의 여유를—경북신문 2015. 7. 1
 
 
우리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은은하게 안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멋과 자연스러움에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해본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를 부드럽고 너그럽게 끌어안아 주는가 하면, 그 안으로 자신도 모르게 깃들이게 하는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하기보다는 담백하고 단순하며, 간결하면서도 품위와 고아함을 거느린다고나 할까. 우리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이같이 사람을 위압하지 않고, 슬며시 끌어당기는 그 무언가를 느끼게 해준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곡선’과 빈 듯 비어 있지 않은 ‘여백’의 어우러짐, 가라앉거나 고이는 듯한 온화함, 절도 있는 억제(절제)와 말 없는 말(침묵) 등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자연,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던 건축물들도 하나같이 이 같은 미덕들을 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산은 둥근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줄기들도 완만하게 겹쳐지고,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듯이 어우러져 있다. 가파른 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이 그러하다. 하늘과 닿으며 만드는 곡선들이 부드럽고, 그 곡선들이 겹치면서 빚어내는 너그러움 또한 얼마나 정겨운가. 산에 올라보아도, 계곡을 낀 산자락이나 중턱에 사찰이 고즈넉하게 들어 앉아 있으며, 계곡의 물은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게 마련이다.
어릴 적의 기억이지만, 야트막한 산에 올라 굽어보면 산의 형상을 닮은 초가집들이 편안하게 옹기종기 모여 엎드려 있은 것 같았고, 기와집 지붕들도 추녀가 버선코처럼 반달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했었다. 뿐 아니라 봄과 여름의 풀들과 나무,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꽃들, 가을이면 어김없이 산을 물들이는 단풍들은 역시 얼마나 정겨웠던가.
더구나 꽃이든 단풍이든 내세우기보다는 뭔가 안으로 다소곳하게 절제하고 있는 듯한 겸손 그 자체이면서 사람을 푸근하게 품어주는 느낌을 안겨주곤 했다. 선으로 치면 모두가 곡선이었다. 그 곡선 속에는 산을 그대로 닮은 무덤들이 여기저기 서로 끌어당기듯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멧새들은 하늘에 이따금 포물선을 그리며 지저귀고, 하늘의 구름들도 나뭇가지에 매달리다가 스르르 미끄러지거나 느릿느릿 흘러가는 모습이었다. 산에 깃들이고 있는 산짐승들도 그리 무섭거나 위압적이기보다는 나무 뒤로 숨거나 종종걸음치곤 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여백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크게 강화하는 ‘말 없음의 말’로, 되레 말의 힘을 증폭시키거나 더 아름답게 보완해주고, 의미망을 확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의 언어들이 그러해야 하듯이 여백이 절제와 안에서 배어나오는 ‘말 없는 말’과 미감의 공감대를 오히려 강화한다. 우리의 자연은 그렇게 부드럽고 넉넉하게 우리를 끌어안아주며, 그 위의 하늘 역시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옥빛이나 푸르른 옷자락을 펼치고 있다면 조금 과장된 말일까. 아무튼 우리의 조상들은 그런 그림 같은 산수 속에서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미술사학자 김원룡은 『한국미의 탐구』라는 저서를 통해 ‘부드러운 산수 속에 한국의 백성들이 살고,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의 세계요, 이 자연의 미가 바로 한국의 미’라는 요지의 예찬을 한 바 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자연에 인공적인 것이 끼어든다면 순수한 자연이라 할 수 없다. 다만 바로 그 자연을 닮고, 이윽고 하나가 되는 우리의 소박한 집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사찰 정도는 ‘또 다른 자연’ 쯤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바로 거기 동화되려 하지 않았을까.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시인 박목월(1916~1978)은 경주 출신답게 신라 고도가 지니고 있는 정서를 밀도 높게 그려 보여 시에 있어서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시에 포착되는 자연의 모습은 외관적으로 보이는 인간과 자연의 대상들이 아무런 균열 없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자연 속에는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아무런 갈등을 하지 않으며, 시간의 진행을 암시하는 자연 변화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우지도 않고, 생존을 위한 인간의 행보가 자연의 풍광에 이질적인 것으로 각인되지도 않는다.
어수선한 요즘 세상,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요즘 세태가 너무 삭막하고 가팔라 뜬금없는 것 같기도 한 이런 생각을 한참이나 해보았다. ‘세상 모르는 소리’쯤으로 여길 사람들도 없지 않을는지 모르겠으나, ‘세월호 참사’ 이후 또 오래지 않아 ‘메르스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황폐한 마음자리에 놓을 이런 ‘한담’도 한 번쯤은 꺼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닮으려 하고 동화되려했던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너무 각박해진 지금의 우리를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들여다보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감싸주는 자연 가까이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어보려는 여유가 가장 절실해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
 
 
 
 
한여름의 한담(閑談)—경북신문 2015. 8. 3

 
이제 메르스 공포에서 가까스로 자유로워졌지만, 아직은 산 너머 산이다. 열대야를 동반한 삼복더위가 연일 기승이며, 가뭄도 그 끝이 아직은 잘 안 보인다. 바다나 산으로 더위를 피해 떠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버티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한때’라 마음을 느긋하게 가져갈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말복이 오는 12일이지만, 주말(8일)이면 어느덧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이지 않은가.
어제 오후 늦게는 내가 사는 마을 인근 산자락 팔각정의 노인들 자리에 끼어들었다. 나보다 훨씬 연로한 노인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요즘 세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상이 옛날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각박하고 삭막해지고 있어 늙는다는 게 서럽다고들 했다. 젊은 세대라면 지금뿐 아니라 어느 때든 안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반문을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요즘 세태는 ‘황량 악화 일로’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한 노인은 오십대의 아들도 ‘백수(白手)’가 되어 함께 헤맨다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한심스럽다고 한탄했다. 나이 든 만큼의 제자리에서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는 뜻도 담고 있었다.
옛사람들은 나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거기에는 귀감이 돼야 할 지혜와 순리(철리)가 깃들어 있다. 마흔은 불혹(不惑), 쉰은 지천명(知天命) 또는 지명(知命), 예순은 이순(耳順), 예순하나는 환갑(還甲)이나 회갑(回甲), 일흔은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이라고 부른 것만 해도 그렇다. 마흔은 사물의 이치를 알고 흔들리지 않는 나이, 쉰은 천명을 아는 나이, 예순은 인생의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 나이, 예순은 한 갑자를 돌아온 나이, 일흔은 뜻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은 옛날과 판이하게 다른 고령화 사회(또는 고령사회)임에도 사람들이 제 설자리 때문에 좌왕우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십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천명(天命)을 알고 있더라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게다가 인생의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졌을 때(예순)는 이미 ‘버스가 지나간 뒤’이기 일쑤인 세상이다. 사람의 수명은 점차 길어지는데 ‘폐기처분’은 빨라져 나오는 한탄일 것이다.
더욱 서글픈 건 ‘한 갑자’를 돌아온 회갑 때 자축은커녕 숨기려 하는 세태지만, 그 이후의 문제는 심각하게 마련이다. 몸과 마음이 멀쩡해도 추억이나 반추하며 살아가야 할 판인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뜻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일흔에 이르러서는 시간을 죽이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지고 있는가.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데 ‘뜬금없이 케케 낡은 이야기냐’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령별 호칭이 시사하는 바, 그 뜻들을 오늘에 비춰보면서 겸허하게 자성의 한때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더 거슬러 오르면, 열다섯은 지학(志學-학문에 뜻을 둠), 남자에 한해 스물은 약관(弱冠)이라 한다. 서른은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고 이립(而立), 마흔여덟은 십(十)이 네 개와 팔(八)이 하나인 글자(桑)로 풀어서 상수(桑壽)다. 일흔일곱은 희(喜)에 칠(七)이 세 번 겹쳤다고 희수(喜壽), 여든은 산(傘)에 팔(八)과 십(十)이 들어 있어 산수(傘壽), 여든여덟은 쌀농사가 여든여덟 번의 과정을 거쳐 쌀이 된다는 데 근거해 미수(米壽)라고 한다. 옛날엔 장수하는 경우가 드물었겠지만 아흔이 되면 졸수(卒壽), 거기 한 살이 더해지면 백수를 바라본다는 뜻에서 망백(望百)이다. 아흔아홉은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빼면 흰 백(白)이므로 백수(白壽)이며, 백 살이 되면 최상의 수명을 누렸다는 의미로 상수(上壽)라 했다.
따지고 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요, 예지 넘치는 의미 부여였다. 더구나 이런 말들이 만들어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잇값은 여전히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화두로 넉넉하게 값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는 ‘앞뒤곱사등이’가 돼 버렸다고나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리 됐는지 모두 자성해야겠지만, 화살을 잦게 맞는 정치․사회 지도자들부터 뼈를 깎는 각성과 함께 분위기 바꾸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날씨가 너무 무더워서 그런지 한담도 무거워져 버렸다. 우리 모두 연령별 호칭이 뜻하는 바 제자리에서 화해로, 젊은이와 늙은이가 두루 더불어, 그 호칭의 의미를 증폭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트고 닦아나가야겠다. <시인>

 
 
 
광복과 평화의 노래—경북신문 2015. 8. 31

 
며칠 전(8월 28일) ‘광복 70주년 기념 경축음악회’가 대구시, 광복회 대구시지부, 대구예술가곡회 공동 주최․주관으로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대극장)에서 열렸다. 지난 몇 달 동안 경향각지에서 광복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마련되는 가운데, 대구에서 마련된 이 공연도 뜻 깊은 무대였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의 광복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구순의 노년층에서 청소년들까지 객석을 꽉 메운 이날 음악회에서는 광복을 주제로 새롭게 창작된 교향곡과 우리가곡들, 감격의 그날을 기리고 우리민족의 밝은 내일을 향해 도약을 꿈꾸는 노래들이 다채롭게 연주돼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이날 대구MBC교향악단과 소프라노 이화영, 유소영, 바리톤 김승철이 새로 작곡된 교향곡 「광복 서곡」(진영민 곡)과 창작가곡 「광복의 노래」(이태수 시, 김정길 곡),「내 노래의 끝까지」)(서종택 시, 임우상 곡), 「빛으로 오신 이」(이기철 시, 정희치 곡) 등을 대구에서 초연해 관객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박영국(성악가) 대구예술가곡회 회장으로부터 광복을 주제로 한 창작곡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받아 노랫말을 만드는 과정에서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가곡들을 찾아보았으나 「광복절 노래」(정인보 시, 윤용하 곡) 외에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창작가곡의 노랫말은 「광복절 노래」를 염두에 두면서 광복 이후 일흔 해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쉬운 구문으로 만들어 보았다. 작곡가도 이 점을 감안,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곡을 붙였다고 한다.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1) 우리의 잃었던 말과 얼을 다시 찾았던 그때/ 그날의 그 환희를 어찌 잊으리/ 꿈엔들 그 감격을 어찌 잊으리/ 아픔과 어둠을 밀어내며 일으켜온 우리 조국/ 너와 나 우리 피땀으로 가꿔온 대한민국/ 번영의 길로 도약의 길로 달려서가리/ 아아 우리 대한민국 더욱 빛나리
2) 우리의 잃었던 말과 얼을 다시 찾았던 그때/ 그날의 그 환희를 어찌 잊으리/ 꿈엔들 그 감격을 어찌 잊으리/ 시련과 질곡을 뛰어넘어 도약하는 우리 조국/ 아시아의 빛, 세계의 빛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 통일의 길로 평화의 길로 뛰어서가리/ 아아 우리 대한민국 길이 빛나리 -「광복의 노래」 전문
 
이번 경축음악회를 열면서 김명환 광복회 대구시지부장은 “우리가 광복절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일이야말로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듯이, 이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번영을 누리게 된 우리나라지만 민족동질성 회복은 절실한 지상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는 이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국가다. 얼마 전에도 북한의 무력도발로 남북 간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가 가까스로 대화의 실마리를 찾긴 했으나, 우리는 여전히 남북의 갈등이 풀리지 않는 비극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이태 전에는 필자가 민족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랫말을 짓고 젊은 작곡가들이 같은 노랫말로 여러 곡을 작곡한 바 있으며, 여러 차례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남북분단의 비극과 아픔을 넘어 민족동질성을 회복하고 통일의 날이 밝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 심정으로 창작가곡 「평화를 위하여」 노랫말을 옮겨본다.
 
1) 평화의 새로운 길을 더듬어 꿈꾸며 나아가리/ 이 시대의 아픔과 어둠에 불 하나 밝혀 들고/ 너와 나 따스한 마음,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드넓은 바다로 가리/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너와 나, 우리 모두 가슴 열고 달려가야 하리
2) 평화의 새로운 길을 더듬어 꿈꾸며 나아가리/ 이 시대의 아픔과 어둠에 불 하나 밝혀 들고/ 너와 나 따스한 마음,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장막 헤치고 벽을 넘어서 밝은 내일로 가리/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나누고 베푸는 세상, 넉넉한 세상을 위하여/ 너와 나, 우리 모두 손 맞잡고 달려가야 하리 -「평화를 위하여」 전문
<시인>
 
 
 
사랑의 사회를 위하여—경북신문 2015. 9. 30

 
 
우리는 제몫 챙기기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제몫만 생각하므로 서로 믿지 못하며, 경계하고 맞서면서 이전투구를 불사하기도 한다. 이런 아집은 어리석음이며, 무명이요, 미망이 아닐 수 없다.
욕심의 졸개인 미혹들은 욕심 때문에 살아난다. 미혹이 있으므로 욕심이 생겨 인생은 달콤할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속세의 오만이다. 그러나 그 첫맛은 달지만 뒷맛은 쓰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못난 속인이라도 지혜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몫에만 눈이 어두운 ‘욕심’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욕심과 욕망들의 도가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금 우리 사회는 제몫 챙기기와 패거리 짓기, 줄서기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원칙이 무너지고,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 거짓말과 말 바꾸기,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급기야 우리 사회는 자신과 자신이 소속된 패거리의 이익만 추구하는 삭막한 풍경 속에 내팽개쳐지고, 그 세력 다툼이 창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간다면 우리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편 가르기, 그에 따르는 갈등과 대립은 이미 불안한 차원을 넘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한탄들도 터져 나온다. 인격이나 능력보다는 같은 패거리만 중시되고,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다시 건강하게 일어서려면 원칙부터 하나씩 바로 세워야 한다. 패거리문화는 그 해악이 머지않아 부메랑처럼 자신과 자신의 집단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가슴을 열며, 쓴소리에도 겸허해질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욕심 덜어내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도층부터 깨닫고 솔선해야 한다. 윗물부터 맑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하는 매력과 견인력이 요구된다. 천심이라 할 수 있는 민심마저 저버린 채,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패거리만 중시하려 하기보다 화해와 상생, 나눔과 베풂의 미덕들은 싹 틔우고 가꾸는 아량이 요구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소유양식’이 지배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본래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존재양식’은 희석되고 밀리는 형국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존재’라는 삶의 두 가지 양태를 테니슨과 바쇼의 시에서 추출하면서 소유양식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는 테니슨 시의 화자는 꽃을 소유하려 한다. 하지만 꽃은 그 결과 죽어버린다. 시인이 꽃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해버린 셈이다.
바쇼의 경우는 대조적이다. 그는 ‘가만히 살펴보니 / 냉이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라는 하이쿠를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는 꽃을 꺾으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을 대는 일조차 삼갔다. 다만 바라보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만 했다.
‘소유’와 ‘존재’의 차이는 ‘인간에 중심을 둔 사회’와 ‘사물에 중심을 둔 사회’로 변별된다. 프롬에 따르면 소유를 지향하면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삶의 지배적 주체가 된다. 반대로 존재양식은 소유하지 않고,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세계와 하나 되기에 이른다. 이같이 존재양식은 부단한 자기발전과 자기창조에로 나아가지만, 소유양식은 충족 또는 만족이면서 동시에 자기고정이어서 변화, 모험, 실험 등을 이반한다.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 고뇌는 어디에 뿌리가 내려져 있는 것일까? 아마도 소유양식에로의 기울어짐이 아닐까 한다. 프롬의 주장대로, 그 같은 고뇌를 벗어나려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방향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우울해진다.
자연은 언제나 하늘을 따른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양식의 지향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에 다름 아니다.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하늘을 따르는 ‘평상심’으로 돌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지게 될까. 그 평상심의 핵은 바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어른 공경의 미덕 회복을—경북신문 2015. 11. 2
 
 
 
오늘날 대학의 풍속도가 지난날과는 크게 달라져버린 것 같다. 젊은이들과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교수가 인기를 누리는 반면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는 밀리는 형국이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으로서보다 직업학교처럼 그 성격이 바뀌면서 권위의 상징이었던 노교수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져왔기 때문이다.
연륜과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학문적 깊이나 높이보다는 사회에 진출하면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리(實利)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의 본래적 기능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가치관을 바로 일으켜줄 기초과학(인문학)의 위기는 그야말로 문제다.
우리 사회는 더욱 그렇다. 옛날 마을 공동체엔 동네 어른의 말과 지혜, 불호령이 곧 권위 그 자체였다. 질서와 규범, 올바른 정신의 구현은 그런 어른들이 주도했다. 공동체 속에 어떤 갈등이나 시비가 생길 경우 어른들이 설득력 있는 판단을 내려줬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상담했고, 부도덕한 행위엔 노인들의 충고와 경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동네 어른이 전천후(全天候) 지도자였던 셈이다.
동네 어른은 전통적인 경로효친(敬老孝親)사상과 도덕적 관념의 상징이었으므로 그 권위가 온 마을에 미쳐 질서와 안녕이 지켜지는가 하면, 공동체의 정신을 구현해 외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런 노인의 판단엔 군소리가 있을 수 없었다.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같이 노인들이 받들어졌다. 특히 농경(農耕)사회에선 어른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농사엔 경험이 중시되고, 노인들은 그런 경험이 많았으므로 효용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 실제적인 능력이 효도(孝道)사상과 맞물리면서 노인 중심의 문화가 형성됐으며,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엔 노인의 영향력이 막강했었다.
국가 차원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연로한 왕과 일흔 살 이상의 문관 중 정2품 이상 고위관료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우대받았다. 예순 살 이상의 노인에게만 응시자격을 주는 기로과라는 과거제도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 같은 국가 정책은 평화로울 땐 충(忠)보다 효(孝)를 중시하며, 효행을 추켜세우던 가치관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노인들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혜와 지식은 밀려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시대역행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허구(虛構)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도시화와 개인주의화로 치닫는 핵가족사회에선 지난날과 같은 권위나 설득력은 박물관의 전시품에 다를 바 없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효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미덕(美德)이다. 하지만 시대가 크게 바뀌어 이 미덕이 점점 더 희석되고 있는 형편이다. 노인들이 받들어지지 않아 나름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고 있다. 노인 학대 건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체면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노인들을 떠올린다면, 그 정황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식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노인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무관심과 홀대의 정도도 심해지는 세태는 우려된다. 지병을 앓던 노부부가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동반 투신자살한 경우도 있었고, 유산을 일찍 획득하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 데다 수명은 길어지면서도 건강수명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며. 건강하지 않은 부모를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그와 비례해서 많아지는 것이 문제다. 이 때문에 효(孝)의 미덕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세태와 맞물려 가공할 반인륜적 사건들이 일어나고,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 게 아닐까.
효도와 어른 공경심과 가치관 바로 일으키기는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지상의 과제다. 어떤 노인들은 자식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탄하기까지 한다. 낳고 기른 보답이 외로움과 서러움뿐이라든가, 차라리 자식이 없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푸념(절규)하는 노인들도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가위 연휴 때마다 귀성행렬이 전쟁을 방불케 해 아직은 큰 위안되고 있다고 누군가가 귀띔해주었다. 낙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어른을 받들고 찾는 마음자리가 평소에도 한가위 귀성행렬의 반의반만 되더라도 이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질까.
<시인>

 
 
선비정신과 귀욕(貴慾)—경북신문 2015. 12. 1

 
아직도 “언론사 퇴직 후에 왜 아무 자리에도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다. 몇 년 전까지는 그런 질문을 자주 받곤 했다. 연봉이 꾀 높은 ‘장’자리 하나쯤 차지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러느냐는 뉘앙스를 묻히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 아니다. (실제 그런 기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순이 넘도록 생업으로서의 일을 했으니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한다.”거나 “이제 선비로만 살고 싶다.”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사실 언론사 퇴임 후, 최소한 5년까지는 반드시 지키기로 한 ‘나만의 불문율’ 다섯 가지가 있었다. ‘아침부터 출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 관계 외의 글은 쓰지 않는다’, ‘현역(권력층)에게는 찾아가거나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후배들의 대접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이성(여성)에 대한 금기 사항 등이 그것들이었다. 전업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5년을 넘기도 보니 그래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벼슬이나 감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자리를 좇는 모습이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듯이, 그런 사람들은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공통분모인 것 같다. 하지만 성취감 이후가 문제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개 물러날 때를 내다보지 않는 듯하며, ‘추락의 섭리’도 모르는 듯하다. 아니라면, 내다보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런 마음의 눈을 애써 가리고 있을 것이다.
‘권력은 달아오른 난롯불 같다.’고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이 타버리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추위에 떨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권력의 함정이요 모순인지도 모른다. 타지 않으면서 춥지도 않으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책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 없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권력 구조와 그 속성이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까 한다. 물러날 때를 내다보지 않고 ‘추락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막무가내’식 권력 추구엔 분명 문제가 있다. 남의 허물만 탓하고 자신의 허물은 애써 감추려는 사람들, 권력이라는 난롯불에 마냥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세 역시 그렇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끼리 다투는가 하면, 그 반대편 사람들과도 수시로 부딪치기 때문에 세상은 어지럽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어진다.
정치인들이 나라를 움직이는 원동력인지도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선량’인 그들의 의해 이끌려 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으키는 파행적인 분열과 갈등은 국민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하부구조를 극심한 분열로 몰고 가 갈등과 반목을 증폭시키고 있다.
인간 세상에 분열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정도가 문제다. 지난날 우리 사회는 분열됐더라도 수습할 수 있는 처방이 있지 않았나 싶다. 유교적 전통의식이 그것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선비정신’이 완강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선비는 학식이 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사람, 어질고 순한 사람을 일컫는다. 아무튼 ‘풍류정신’에 뿌리를 둔 선비정신은 격이 높았다. 그윽한 정신세계에서 물질을 탐하지 않았으며, 권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양심과 지조를 지키고, 가난해도 체면을 알았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받들었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아무래도 그런 ‘고결한 정신’과는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유교적인 전통에 모순이나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일반에까지 선비정신이 파고들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는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일그러지고 뒤틀린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길, 서둘러 키워야 할 덕목은 바로 선비정신의 회복과 현대적 계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은 군자(君子)에게는 귀하게 되려고 하는 귀욕(貴慾)이 있고, 소인(小人)에겐 부자가 되고자 하는 부욕(富慾)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선비정신을 받들면서 다산이 말한 귀욕을 끊임없이 지향한다면 세상은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부자가 되려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더욱이 이 두 가지를 다 손아귀에 넣으려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사람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덕담이 일상화된다면…—경북신문 2016. 1. 2
 
 
새해가 밝자 덕담(德談)이 넘쳐났다. 며칠이나 휴대전화 문자나 이메일의 대부분이 그런 메시지들이었다. 길지 않은 이 메시지들은 삭막해진 마음에 짜릿한 전율을 안겨주는 경우도 적잖았다. 몇 해 전부터의 현상이기는 하지만, 연하장이 현격히 줄어든 대신 문자메시지가 성행하는 것은 이 바람이 아날로그 세대에까지 거의 일반화됐다는 방증인 것 같다.
설령 상투화된 문장을 담은 경우라 하더라도 덕담은 많이 주고받을수록 좋은 미풍양속(美風良俗)이 아닐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덕담들은 들을 때도 좋지만, 그런 말을 할 때가 기분이 더욱 고조되기도 한다.
일찍이 사학자 최남선(崔南善)은 덕담이란 단순히 “그렇게 되십시오.”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그렇게 되셨으니 고맙습니다.”라는 언령관념(言靈觀念)이 배어 있다고 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지만, 분명 말에는 그렇게 되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어떤 신비스런 힘이 들어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럴까. 새해 덕담 나누기는 지구촌의 공통적인 풍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뉘앙스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미국에서는 “해피 뉴 이어”가 대변하듯 행복 추구가 주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쿵시화차이(恭喜發財)’처럼 재물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배어있는가 하면, 일본에선 “새해가 시작되니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주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 덕담에 복(福)을 많이 받으라는 말이 주류인 것 같다. ‘복’이라는 말에는 재물, 출세, 자식, 배우자에 대한 복 등 많은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게다가 이 덕담에는 ‘복’이라는 추상성 뒤에 구체적인 덕목이 보태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득남, 건강, 치부, 승진 등 상대방의 처지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태의 변화와 덕담이 맞물리고 있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과거 한동안은 “부자 되세요.”가 회자(膾炙)돼 우리의 가치관에도 물질적 풍요가 주요 미덕으로 자리매김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이 가치관은 중산층이 무너지고 절대빈곤층이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정치권이나 일부 계층에서 수백억대의 돈이 오가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나 박탈감과도 무관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동안 바람을 일으켰던 이 덕담이 이젠 거의 꼬리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 사정과 서민들의 얇아지는 주머니 탓으로 그런 소망마저 시들해져 버린 것인지, 아예 포기해 버렸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추호도 물신주의(物神主義)나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지양되거나 극복된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사실 평소 우리 사회에는 악담(惡談)이 덕담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을 속이고 해치고 아픔과 슬픔을 주는 말들, 실현 가능성과 동떨어진 허언(虛言)이나 구두선(口頭禪)들이 난무한다.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가 하면, 그 폭력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호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사람은 비수를 가시 돋친 말 속에 숨겨둘 수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다시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소리’이며 ‘정신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말이 새해 덕담처럼 평소 일상에도 널리 확산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올해도 해바라기를 하기 좋은 전국 곳곳에 인파가 넘쳐났다고 한다. 남에게 “부자 되세요.”라고 말할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쳐지게 했던 한 해를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안고 새해의 새 빛을 열망하는 행렬이었을 것이다. 만성화된 실업,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불황과 정국 불안, 흔들리는 사회 안전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災殃) 등은 우리를 여전히 옥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의 경우 절박한 상황에서 더더욱 자유롭지 않다. 수십 차례 취업의 문을 두드렸으나 면접마저 한두 번 봤을 뿐이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은 그 사정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패거리 짓기에 눈이 어둡고 자신의 탓이 실종돼버린 듯한 정치권, 민생(民生)과 상생(相生)을 저버린 채 힘겨루기를 일삼는 정쟁(政爭), 갈등과 대립, 경제적 고통의 먹구름과 골이 깊이 파이기만 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개인이나 집단 간의 막무가내 이기주의……. 우리 사회는 그렇게 뒤틀리고 병들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젠 달라져야만 한다. 힘 있고 가진 사람들부터 따뜻한 세상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잘못은 ‘내 탓’, 잘되면 ‘남의 탓’인 너그러움을 회복하면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참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운을 낼 수 있는 ‘진정한 덕담’이 일상화되는 사회를 꿈꿔본다. <시인>
 
 
 
 
순수예술 너무 밀려난다—경북신문 2016. 1. 28
 
 
옛 사람들은 ‘예술을 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다’고들 한다. 두 말을 합쳐보아도 ‘예술 자체는 돈과 거리가 멀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순수예술만 겨냥하고 있다.
‘순수’는 깨끗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것을 뜻하므로, 세상이 많이 바뀌어도 그런 예술을 하면 돈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훌륭한 예술가가 돈방석에 앉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 극소수를 제외하면 상업성을 띠는 예술가라야 돈과 인연이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의 국민작가 빅토르 위고는 다작으로 유명하다. 아침마다 시 100행이나 산문 200장을 썼다고 한다. “말이란 동사(動詞)이며 동사는 신(神)이다”라고 했던 그는 언어의 천재답게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한 ‘19세기의 전방위 문인’이었다. 소설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곱추」 등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시를 썼다. 그가 쓴 시가 무려 1만 편이 넘는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제왕의 홀(笏)이 없는 게 무슨 상관이더냐. 내게는 펜이 있다”고 했던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도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누구보다 빨리 쓸 수 있었고, 그래서 많은 펜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문인 가운데는 다작 작가가 적지 않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많이 쓸 수 있고, 널리 읽힐 수 있다는 논리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다작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적지 않다. 빅토르 위고는 “대중에 영합하는 다작의 통속소설 작가였고, 인격적으로도 허장성세가 심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사르트르는 볼테르를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정의를 한 바 있다.
한국에서의 다작왕은 소설가 방인근과 시인 조병화다. 방인근은 무려 69권의 작품집을 냈다. 정을병, 이병주, 정비석, 이청준, 한승원, 최인호 등도 50권 이상의 작품집을 냈다. 시인으로는 조병화가 93권으로 압도적이다. 고은, 황금찬, 김남조, 서정주, 박두진, 신동집 등이 다작 시인으로 꼽힌다. 이들 중 방인근이 통속적인 대중소설을 주로 쓴 건 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을병, 이병주, 정비석도 문학의 순수성을 지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보면 이청준과 한승원, 돈도 많이 번 최인호는 문학의 순수성을 겨냥하면서도 비교적 폭넓은 독자를 가진 전업작가들이다.
소설가들과는 달리 시인들은 대중적 교감이 잘돼 독자가 많은 경우에도 돈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대학교수 등의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시만 써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계는 직업으로 해결하고, 삶의 무게중심은 시에 두는 이중생활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구양수(歐陽脩)는 사람이 사람의 모양을 갖추려면 ‘다독 다작 다상량 (多讀多作 多商量)’ 등 이른바 삼다(三多)가 필요하다고 했다. 작가나 시인들이 이 요건을 갖추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유명한 작가나 시인들은 대개 ‘돈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먹고산다고 할 수 있다. 돈이 따라 붙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시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생계와는 거리가 멀어도 시가 좋아서 쓰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세태가 크게 바뀌었다. 명예 추구나 취미생활에 무게를 싣는 문인들이 넘쳐나는 대신 문학의 순수성과 그 상승작용을 지향하는 문인들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문학지들도 마찬가지다. 사명감을 가지고 질적인 수준을 지키는 문학지들이 고사상태인 반면 상업성에 기울어진 문학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문단을 어지럽히고 있다. 가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를 흔히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더 폭을 넓혀 보더라도 순수예술은 밀리고 상업성을 앞세우는 문화산업들만 융성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술의 본질이 ‘순수’에 있다면, 우리 주변에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정진하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면,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에 빛을 뿌리는 촛불과도 같은 예술은 살아남고 사랑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물욕과 담을 쌓은 채 예술을 향해 열정에 불을 지피는 예술가라도 너무 배가 고프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시인>
 
 
 
 
초저출산과 고령화사회—경북신문 2016. 2. 28
 
 
전통사회에서는 인구를 종족의 힘과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 출산을 장려했다.산업혁명 이후 인구 증가에 의한 경제적 손실을 억제하지 않고는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개발이론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지를 받았다. 선진국들은 이에 따라 다투어 저출산 정책을 폈다.
1960년대까지 우리네 가정은 ‘흥부네’와 다름없었다. 출산율이 6.0명에 이르러 가족계획 사업이 맹렬하게 추진됐다. 그 결과 10년 뒤에는 4.5명, 다시 그 10년 뒤에는 2.8명, 1990년대엔 2명 이하로 떨어졌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5년에는 전국 평균 1.24명(가장 낮은 서울은 1.00명)으로 새 세기 들어 ‘세계의 최저출산국’이 된 뒤 여태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아들 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슬로건으로 출산 억제 정책을 펴오던 정부는 정책을 정반대로 바꿀 수밖에 없게 된지는 이미 오래됐다. 세계 최저 출산율로 급격하게 고령화하고, 인구 감소 현상이 예상보다 빨리 닥칠 것이라는 예견은 우리 사회 전반의 커다란 지각변동을 예고했었다. 그러나 그 위기감에 빠진 지도 15년째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엔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돼 ‘세계 제일의 노인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도 나온다. 실제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1960년에 2.9%였으나 2015년에는 14.3%로 크게 늘어났다. 고령화사회에서는 산업 활동 인구 감소, 복지 비용 부담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경제성 둔화, 재정수지 악화 등 성장 잠재력이 낮아지므로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의식과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아무래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초저출산국이 된 건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생각이 바뀐 탓임은 말항 나위가 없다.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을 중시하고, 자녀를 기르고 가르치는데도 질을 중시하며, 한 명의 자녀나마 경쟁사회에서 뒤지지 않게 키워야겠다는 욕구가 커지는 방향으로 가치관과 의식이 달라져버린 탓이다.
게다가 혼인율 감소와 이혼율 증가도 이를 부채질한다. 혼인율은 1990년보다 2015년에는 2.1배 하락한 반면 이혼율은 1970년보다 2015년에는 무려 12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이혼 사유도 성격 차이 44.1%, 가정불화 14.4%, 경제 문제 13.6% 등으로 나타났다. 쉽게 결혼하고 헤어지는가 하면 독신이 늘어나는 풍조도 가정 해체와 초저출산의 요인이 되고 있다. 초저출산은 고령화사회와 맞물리면서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身老不心老)’는 옛말이 있다. 백발이 성성하더라도 마음은 늘 젊다는 얘기다. ‘사람이 늙은 후에 또 언제 젊어 볼꼬 / 빠진 이 다시 나며 센머리 검을 손가 / 세상에 불로초 없으니 이를 설워하노라’. 일찍이 가인 이정보(李鼎輔)도 몸이 늙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식욕은 음식을 먹으면 없어지고, 수면욕은 잠자고 나면 없어진다. 성욕도 만족하면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만족해서 그만 살고 싶을 때까지 살지 못한다. ‘마음은 젊다’는 ‘더 살고 싶다’의 다른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오래 사는 게 ‘욕’이 되는 세태로 바뀌고 있다.
홀로 사는 노인이 숨져 부패된 채 발견되고, 질병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노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홀몸 노인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늙은 부모 모시기를 꺼려 중산층까지 홀몸노인들이 급격히 늘어난다. 고령화사회 진입 속도가 세계 1위라는 조사 결과대로 노인 인구의 비중이 늘면서 홀몸노인도 급증한다. 맞벌이 부부도 크게 늘어나 홀몸노인이 증가할 요인은 점점 커지고 있다.
고령화는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시한폭탄’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건 분명 인류의 큰 업적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인구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은 곧 터지고 말 ‘시한폭탄’에 다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령화의 속도는 날로 빨라지는데도 대책이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더구나 이 대책은 많은 시간과 투자가 요구되지만 효과는 늦게, 천천히 나타나므로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노인 문제는 바로 내일의 노인인 젊은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며, 가치관과 의식의 변화로 제동이 걸리지 않는 초저출산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극복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시인>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라지만—경북신문 16. 3. 31
 
 
 
선거전은 한차례 요란한 먼지바람 같은 것일는지 모른다. 난마처럼 얽혀 소란한 지금 우리의 정치문화는 바로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다. 한 철학자가 “정치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을 휘두르며 남을 지배하는 데 있다”고 한 말이 새삼스럽다.
되돌아보면 우리의 정치 풍토는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 위주의 패거리 짓기, 지역 이기주의나 집권 야욕이 애국심보다 앞서 온 게 사실이다. 커다란 풍선 같던 공약(公約)은 정치적 목적만 이뤄지면 곧바로 물거품처럼 공약(空約)이 돼버리기 일쑤였다.
선거철은 철새 떼의 대이동 시기이기도 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소용돌이도 거듭돼왔다. 지금도 그 사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정치적 신조나 국민을 위한 헌신의 자세보다는 야망에 불 지피거나 이해를 따라 움직이는 행렬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여야가 극심한 내분을 보이면서 정치 혐오 분위기가 도지는 가운데 4․13 총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야가 며칠 전 일제히 선거대책위원회를 공식 출범하고 본격적인 총선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야는 정책 대결보다는 ‘잿밥’에만 눈독 들인 싸움으로 치닫고, 집안싸움도 가라앉지 않아 유권자들을 혼돈 속에 빠뜨리고 있다.
야당 분열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산파였다가 변신한 김종인 더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지그재그 행보,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과 유승민 의원 간의 ‘치킨 게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옥새 파동’, 최근의 ‘존영 논란’까지 잇달아 빚어졌다.
여당은 이제야 여론을 추스르며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한 표밭 세몰이 시동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야당은 단일화로 승부를 걸려고 하는 조짐까지 보이고, 여야의 공천에 탈락한 무소속 후보들이 연대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한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영남에서는 공천 갈등을 추스르면서 그 사수를 위한 세 결집과 현역의원 무소속 후보에 대한 견제, 야당의 텃밭인 호남에서는 국민의당과 더민주당 간의 민심 끌어들이기와 두 당 간의 연대설 등으로 신경전이 날로 팽팽해지고 있다.
새누리당은 ‘민생 외면 심판’을 앞세운 ‘개혁’ 기치를, 더민주당은 ‘경제 실정 심판’을 내세운 ‘경제’ 기치를 들고 있지만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얻을는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 역시 곱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정책 대결보다는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저의를 앞세우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당이 어느 후보자를 내세우느냐는 정당의 몫이다. 그러나 권력 장악과 정권 창출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은 자제돼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같은 행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만은 아닐 것이다.
선거전은 일정 기간만 필요로 하지만, 그 진실 캐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게 바로 함정이다. 그래서 ‘선동’이 어김없이 선거철의 단골 메뉴로 뜨며, ‘소기의 목적 달성용’으로 사랑(?)받는다. 이기려면 양심은 일단 팽개쳐 두고 ‘가려진 진실’을 그럴듯하게 왜곡 포장해서 퍼뜨리며, 의도했던 목적이 이뤄진 뒤에는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도 ‘물 건넌 뒤’가 돼 버리기 십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의 선거 풍토를 볼 때, ‘거짓 진실’을 과감하게 터뜨린 다음 표 몰이를 한 뒤엔 고소를 당하더라도 법적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적잖이 걸리므로 책임은 미미해지곤 했다. 그러나 무책임한 선동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선량한 사람들을 목적에 이용하는 악의적인 선동에는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라 했다. 자연의 현상은 하나같이 모순․대립이라는 싸움이나 갈등에 의해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화해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그 한판 승부는 선이 악을, 이성이 감성을 이기고, 진정한 정치철학이 비속한 인신공격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훌륭한 정치는 정직하고 창조적인 국민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앞선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배경에는 훌륭한 정치가 못잖게 창조적인 일에 집중하는 국민과 객관적이고 차분한 사회적 노력이 있었다. 이번 총선은 국민이 그런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 선거이기를 기대한다. <시인>
 


따스한 희망과 행복 회복을—경북신문 2016. 5. 2
  
 
봄은 아름답고 따스하다. 갖가지 꽃들이 산과 들, 도회의 거리까지 화려하게 수놓고, 녹색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어느 시인은 이 계절을 ‘찬물에 얼굴을 씻어낸 청년의 참신한 모습’에 비유했고,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모든 꽃망울이 부풀어 터지고 모든 새들이 노래하는 놀랍도록 아름답다’고 노래한 바 있다.
필자도 수십 편의 봄 시를 쓴 바 있지만,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봄을 예찬하고 여전히 노래하고 있는 것은 신록과 함께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오묘한 질서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오월이 우리 앞에 다가섰다. 이 은총의 계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다시 돌아온 봄처럼 따스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공동체의 최소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사회와 국가, 지구촌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따스한 바람이 불고 봄꽃들처럼 화사하고 평화로워졌으면 얼마나 좋으랴.
‘가정의 달’이자 ‘청소년의 달’인 오월은 그 어느 때보다 가정과 가족, 자신과 타인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때이기도 하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이 줄을 잇고 있다. 부활절은 이미 지나갔지만 석가탄신일 역시 오월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날들을 계기로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고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마음이 더욱 절실해진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여전한 가운데 불안한 국내외 정세, 어지러운 정치 현실, 각종 재난의 그림자들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자고로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과 가정이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시련을 이겨내며 보다 밝은 미래를 꿈꿔왔다. 가정은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시발점이자 울타리이며, 그 속에서 자라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를 기약해 준다는 점에서 건강한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정이 건강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도, 국가도, 이 지구촌도 건강해질 수가 없다.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의 회복으로 보다 따스하고 풍요롭게 살만한 사회와 국가를 일으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 수 없다. ‘나부터’의식은 바로 그 출발점임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교훈이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다.
행복한 삶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설파한 뒤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견해를 펴왔지만, 그 규정도 각양각색이다. ‘행복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가 예전에는 국가의 경제 성장이었으나 이제는 개인의 삶의 질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행복은 주관적인 감정이므로 이처럼 규정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요즘 우리 사회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열 명 중 여덟 명 정도나 지금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빈부격차나 부정부패 등 사회 문제도 과거보다 나빠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 실로 ‘희망 상실 증세’가 심각하다. 특히 노인들과 청소년들에게 그런 증세가 두드러진다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성공을 꿈꾸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은 눈높이나 시각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며, 완전한 만족은 이상향에나 있을는지도 모른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도연명의 ‘무릉도원’, 허균의 ‘율도국’은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인류의 이상향들이며,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꿈을 꾸며 살아가야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은 어쩌면 마음먹기에 따라 멀 수도,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불만을 넘어 만족을, 불행을 넘어 행복을 꿈꾸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이상향은 꿈속에 있더라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희망이 커지는 사회가 언제쯤 오려는지, 이 따뜻한 봄날에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시인>
 
 
예술은 독창성과 진정성이 생명—경북신문 2016. 5. 30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카뮈는 “문화, 그것은 운명 앞에서의 인간의 외침”이라고 했다. 문화를 창조하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지식산업의 발달로 창작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짝퉁’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관계의 시비는 학술논문에서부터 문학작품, 미술작품, 영화․가요는 물론 지적 창작물과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빈번히 벌어진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창조’에 대한 찬양이 산을 이룰 정도라면, ‘표절’이나 ‘짝퉁’에 대한 비난은 천길 절벽과도 같았다. 희랍어로 표절(Plagios)은 ‘근성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듯이, 이 행위는 명백한 도둑질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습관의 힘』 저자 찰스 두히그(NYT 기자)는 창의성을 높이려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기존에 있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라”고 권하고 있다. 일찍부터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대표적인 ‘모방론’ 주장자였다. 그러나 에머슨의 경우 표절은 고사하고 모방마저 ‘자살’이라고까지 했다.
미국 사회는 창조적 고통에 대해 부(富)와 명예를 주는 한편 표절 행위는 가혹하게 처벌한다. 우수한 두뇌를 수없이 배출하는 배경에는 창의성을 존중하는 문화와 표절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지적재산권’ 관련법 집행이 뿌리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거부 빌 게이츠는 미국의 독특한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낸 ‘순정 미국 제품’이라는 말에 수긍이 가고 공감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찍이 작가 미즈너는 “한 저자에게서 도둑질하면 표절이요, 여러 저자에게서 도용하면 연구”라고 꼬집은 바 있다. 이는 다양한 수법으로 표절하고도 아무 일 없이 버젓이 고개를 들고 다니는 풍토를 개탄한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는 표절에 너그럽고 둔감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표절 시비를 제기한 사람이 되레 이단자처럼 몰리는 경우마저 없지 않았다. 지식산업 전반에 보편화돼 있는 표절 문화가 근절되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말과 행동은 그럴듯한데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나 물건을 ‘사이비(似而非)’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짝퉁’이고, ‘가짜’다. 정교한 ‘짝퉁’은 ‘진짜’와 구별하기 어렵고, 때로는 진짜 행세를 한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는 만들어진 과정과 그 속에 담긴 정신이 전혀 다르다. 진짜에는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고, 고통스러운 삶과 그 고뇌가 투영돼 있다. 가짜는 겉모습만 진짜를 닮게 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도둑질하려 한다.
미술품을 둘러싼 위작(僞作)시비는 비일비재였다. 동서고금을 통해 대단히 어려운 일로 꼽히고 있듯이, 그 감정은 실로 어렵다. 그래서 자칫 감정이 잘못된 경우 소장자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릇된 인식을 심고, 유통질서를 교란시키게 하기도 한다.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가짜로 알려졌던 뉘른베르크 소장 작품과 진짜로 행세해온 헤이그미술관 소장 작품이 뒤집히는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만큼 ‘짝퉁’가 판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가짜 미술품이 진짜로 둔갑해 유통되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이젠 가짜 문화, 가짜 상품, 가짜 지도층이 판치는 사회를 정직한 진짜가 아니면 발을 붙이지 못하는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짜를 가려내고 추방하는 분위기도 성숙해져야만 한다.
요즘 가수 조영남의 대작(代作) 논란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무명화가에게 8년간 300여 점의 화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유통시켜 사기죄가 의심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콘셉트를 외주(外注)했으므로 자신의 창작품이라는 게 조영남의 변명이다. 현대미술 창작의 관행으로 보면 그의 변명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표절이나 모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기냐, 아니냐’는 그의 ‘양심’이 잘 알 것이다. 예술의 생명은 독창성과 진정성이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
 
 
 
 
믿고 사는 사회는 요원한가—경북신문 2016. 6. 27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古事)가 새삼 떠오른다. 약속을 어기고도 사정이 달라져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없지 않다기보다 드물지 않게 그런 사람들과도 만나야 한다.
사전에는 ‘약속’이 ‘어떤 일에 대해 어떻게 하기로 미리 정해 놓고 서로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미리 정한 일을 서로 어기지 않는 것이 약속의 의미이자 저버리지 말아야 할 미덕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을 다른 사정으로 쉽게 저버린다면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뒤에 만난 상대가 변명을 늘어놓고 이내 태연해지는 경우를 보면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중국 노나라 때의 미생(尾生)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신의를 이야기할 때 인유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약속을 지키려다 목숨까지 잃은 사람이다. 다리 아래서 애인과 만나기로 약속한 그는 홍수 때문에 갑자기 물이 크게 불어나 다리기둥을 붙들고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리던 그는 급기야 물살에 휩쓸려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이 고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급류가 휩쓰는 다리 아래서 약속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잃는다는 건 미련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그런 그를 약속의 화신처럼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에도 소진(蘇秦)은 미생을 ‘신의가 두터운 사나이의 본보기’로 봤지만, 장자(莊子)는 ‘쓸데없는 명목에 사로잡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른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한다.
아무튼 ‘미생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약속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감이 없지 않다. 심지어 약속을 저버렸다는 사실 자체마저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모르쇠’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건 난처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해지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시를 사람들에게서도 불신감이나 배신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소신이나 문학적 지향점까지도 시대상황에 따라 바꾸는 사람들이 출세의 길을 걷는 걸 보면 ‘변해야 산다’는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감나기도 했다. 약속이나 소신을 언제든지 바꾸고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자신이 바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마음은 무겁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은 그 ‘대표 선수’ 격이다. 번드르르한 ‘약속의 성찬’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시침을 떼는 경우를 자주 보지 않았던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또 바꾸는 정치인들에게는 미생이 골치 아픈 인물 아니면, 바보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민심을 사기 위해 공약(公約) 아닌 공약(空約)들을 남발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에 사람들은 ‘빈 약속’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고 자기 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져 버리기도 했다.
우리의 정치 풍토는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 위주의 패거리 짓기, 지역이기주의나 집권 야욕이 애국심보다 앞서 온 게 사실이라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공약(公約)은 정치적 목적만 이뤄지면 곧바로 곧 터져 버리는 풍선이나 물거품처럼 공약(空約)이 돼버리곤 했다.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 세태의 극단적인 모습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 같아 우울해진다. 영남권 신공항 문제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약속을 유보한 국립한국문학관 입지 선정 문제도 마찬가지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지역이기주의도 문제지만 정치논리는 더 큰 문제다. 지역이기주의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해가 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약속(공약)은 지키는 게 당연하다는 점에서 정치논리는 고질적인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지역 간의 갈등 때문에 난처하고, 정치적 계산 때문에 국가대계를 왜곡하거나 미뤄 버린 게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미봉책은 불신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킬 게 뻔한 일이지 않은가.
미생과 같은 ‘위인’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바보’로만 보이지 않는 사회, 국가대계에 대한 소신과 믿음을 최우선으로 어떤 난관에도 밀고 나가는 정치지도자들이 기다려지기만 한다. <시인>
 
 
김영란법, 기대와 우려—경북신문 2016. 7. 30

 
헌법재판소가 지난 28일 소위 ‘김영란법’으로 일컬어지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대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적잖은 세월 동안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지만, 헌법재판소가 부패 방지와 공정한 사회를 위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사익보다 전반적인 공익이 크다고 판단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주요 골자는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에도 이 법을 적용하고, 배우자 금품 수수 신고 의무, 허용 금품과 가액에 대한 시행령 위임, 부정 청탁과 사회 상규개념 모호 등 네 가지 쟁점에 대해 모두 합헌이라는 결정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한 이 법은 오는 9월 28일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던 대목은 이 법을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에게도 적용하는 건 평등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반대 여론이었다. 이 경우 특히 정권이 비판 언론을 길들이거나 손보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없지 않고,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아 왔다.
또한 이 법이 적용되면 배우자의 금품 수수 사실도 반드시 신고해야 하고, 그러지 않았을 땐 형사처벌을 받게 하는 건 ‘연좌제’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다. 처벌을 받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법이 아닌 정부 부처의 시행령으로 접대는 3만원, 선물은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으로 상한액을 정한 건 정부에 과도한 권한(형벌권)을 준다는 반발이 적잖기도 했다.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은 사실상 민간인 신분이다. 공직자들과는 차별화해야 한다는 여론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국가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공무원에 못잖게 크기 때문에 재판부는 법을 같이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김영란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아 그 정서와 부합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을 시행하려면 보완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일부 재판관들이 언론인과 사립학교 종사자의 업무에 대해 그 공정성과 신뢰성을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요구된다고는 보기 어렵고, 이들의 사회윤리규범 위반에 대해서까지 형벌과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은 과도한 국가 형벌권 행사이며, 시행령에 위임한 부분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결정에는 공직자가 사적 관계로 얽히고설켜 공정하고 청렴한 직무를 하는데 방해를 받는 ‘공직자 이해 충돌’ 방지 부분이 빠져 있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선출직 공직자들을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형평성에 크게 위배된다는 반발을 피하기 어려우리라고 본다. 차제에 공공성이 높고 국민 생활에 밀접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법조계, 금융계, 의료계, 대기업, 시민단체 등에까지 이 법의 적용 대상을 확대해 사회 전체의 윤리 기준을 올리는 방향도 찾아지는 게 마땅해 보인다.
아무튼 이 법이 시행되면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법의 영향을 받는 광범위해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접대 관행에도 새 바람이 일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소비 위축과 경제에 미칠 부작용도 만만찮을 것으로 우려된다. 벌써부터 큰 목소리가 터져 나오듯이 농축산업, 유통업, 외식업 분야의 타격은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맑은 사회를 만드는 건 국가적 과제이며, 많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바다. 요즘 언론에 연일 터져 나오듯이 부패와 비리의 악취는 그야말로 역겹다. 사건과 사고의 이면이 드러나면 어김없이 놀랄 만한 비리와 부패로 얼룩져 있게 마련이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직사회 등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잘못된 접대 문화를 바로 잡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다는 여론과 다르지 않다. 이번 결정으로 우리사회가 거듭나는 계기가 되려면 이 법이 안고 있는 문제점부터 제대로 짚고 입법 보완을 서둘러야만 할 것이다. <시인>
 
 
 
경산 ‘상방동’ 들여다보기—경북신문 2016. 8. 29
 
 
 
최근 지기들과 경산의 어느 주점에서 평소 ‘관심 밖’이었던 풍수(風水)와 지명(地名) 유래 이야기로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문외한이라 주로 듣기만 했지만 재미있었다. 헤어지면서는 각기 특정 지역(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숙제를 풀어 다시 모이기로 했다. 내게 돌아온 숙제의 마을은 경북 경산시 상방동(上方洞)이었다.
경산시청과 경산문화원 등에 들러 자료를 찾아보고 관계 문헌들을 뒤져봐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상방(上方)’은 향교(鄕校)가 있었던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예부터 상방동에는 양반들이 모여 살았고, ‘서당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양반들로는 달성서씨, 청주한씨, 진산진씨 등이 살았고, 실제 이들이 세운 서당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자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전해오는 이야기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이곳을 ‘비단전’이라고 부르기도 한 건 옛날 부자였던 진씨들이 이곳에서 남천면 협석리 알봉마을까지 비단을 깔고 상여가 지나갔다는 말이 전하기 때문이다. 그 긴 거리를 비단을 깔고 상여가 지나가도록 했다는 건 여간 부자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않은가. 이 마을에는 예부터 동제를 지내던 강당이 있었고, 신교동에서 건너오는 길인 ‘비틀길’이 있었다는 사실 등도 알게 됐다.
그중 가장 흥미로는 건 상방동이 경산에서 가장 먼저 주민들이 거주한 곳이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 마을이 ‘마빼이’나 ‘마빵’으로 불리었다니 요지였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마빼이’라는 말은 ‘역원’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역원이 있었다면 교통요충지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가 묵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1989년 경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삼남동, 서상동, 신교동, 백천동 등과 함께 편입돼 남부동으로 개편됐다고 한다.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오르면 몇 차례나 개칭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조 선조 때 경산현 현내면에 속했고, 고종 32년(1895)지방 조직 개편으로 경산근 읍내면 소속이었다. 다시 그 이후 1914년 부군 통폐합 때 행정구역 변경으로 경산군 경산읍에 소속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 강원도가 강릉과 원주의 앞자를 따서 만든 도 이름임을 모르는 사람들도 적잖겠지만, 아마도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상방동의 유래를 아는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될는지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방동에 대해서는 ‘박재락(문화재전문위원)의 풍수미학―풍수에 따라 복도 달라진다’는 글을 읽게 되면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상방동은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풍수적으로 부(富), 귀(貴), 손(孫)의 번성과 부귀겸전의 발복과 연관이 있는 형국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터라는 것이다. 연화부수형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습처럼 터 주변으로 물길이 형성돼 흐르고 주변의 산세(山勢)가 원형을 이루듯이 에워싸고 있는 입지를 말한다.
상방동은 문필봉을 이룬 백자산과 그곳에서 발원한 계류수가 남천을 이루면서 흐르고, 물길 건너편에는 성암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백자산의 문필봉, 좌선지맥의 금형체와 토형체, 성암산의 봉우리가 상방동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편의 남천은 구곡수 형태로 흐르면서 연화부수의 터에 물기를 유입시켜주는 명당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남천은 백자산 정기를 머금고 흐르고 있어 발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한다(박재락)는 것이다.
대구 유니버시아드로에서 경산 삼성현로를 따라 신도심권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이 대구 수성구 생활권 주거지로 각광을 받는다는 기사도 보인다. 도심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현대적으로 개발이 되지 않다가 근래에 이 일대가 새롭게 떠오르는 건 당연해 보인다. 옛 전통이 그러하듯이 상방동은 뒤늦게나마 옛 명성을 되찾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방동의 일부 빈터 맞은편에는 경북체육중고등학교가 있고, 바로 옆에는 경산중앙병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곧 주거지로 개발될 모양이지만, ‘도로가 주거지를 바꾼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시대와 세월도 마찬가지 느낌을 안겨준다. 인근에 대구스타디움, 대구미술관,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등 문화체육시설이 잇따라 들어서는 데다 수십 개의 등산로를 거느리는 성암산, 산책하기 좋은 남천은 힐링생활권으로도 관심을 모으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담 자리에서의 숙제를 풀다보니 나도 모르게 ‘상방동 예찬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시인>
 
 
 
 
‘내 탓’부터 들여다보자—경북신문 2016. 9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어지럽다. 파국으로 치닫는 여야 대치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우리 사회의 어디를 둘러봐도 그 사정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과 북한의 핵 도발,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이기주의 만연과 노사분규, 각계각층의 불신과 반목, 사회 곳곳의 부패와 그 역겨운 냄새, ‘김영란법’에 따른 혼란과 혼선 등 이루 열거하기 부끄러운 일들이 비일비재다.
설상가상, 근래에는 지진 공포와 그 미증유의 트라우마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이 ‘연옥’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다가는 언젠가 어떤 문인이 말한 대로 우리 국가와 사회가 ‘인간은 외출하고 없는 삭막한 공간’이 돼 버리지나 않을는지 심히 우려된다.
우리는 지금 우선 편협한 이기심을 앞세우고, 위선을 진실로 가장하거나 남을 생각하는 척 기실은 해치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이런 자성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인간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게 되고,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하는 발버둥과 술수, 남 헐뜯기와 비난으로 얼룩져 ‘역지사지’와는 거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불신과 불행으로만 길이 트이고. 종국에 가서는 자기 파괴로까지 이어질 것도 불을 보듯 뻔하다. 비인간적인 행태는 가정에서의 천륜 배반, 직장에서의 불신과 적대행위를 낳고 키우게 되며, 국가와 사회는 그런 악재들이 모이고 쌓여 아수라장이 안 되고 베길 도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 피해가 모두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어떤 학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선 신의와 의리, 약속과 믿음이 파편처럼 부서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 인간사회의 지진현상은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가장 먼저 일어나 도미노현상을 불러 온 나라를 혼란과 갈등, 걷잡을 수 없는 분열과 파멸로 몰고 가는 강진과도 같을 것이라고도 했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모모스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남을 경멸하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모모스신은 언제나 남의 험담에만 한껏 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가슴에 창을 만들어 속마음을 알 수 없게 했다’고 말한 신을 비난했다가 결국은 하늘에서 쫓겨난 ‘죄악의 신’이었다는 것이다. 짧게만 끌어들인 이 모모스신 이야기가 비유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남을 헐뜯고 비난하지 말라는 경고다.
‘해동가요’에 나오는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없다 / 차라리 귀 막고 눈 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라는 대목이나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직(문경공)의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라는 시조도 같은 뉘앙스의 일깨움을 안겨준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생각하더라도, 겉이 희고 속이 검은 사람이 검은 겉모습의 사람을 비웃지 말라는 것은 설령 그런 사람의 속이 검다고 하더라도 남만 비난하는 ‘남 탓’ 타령을 하지 말라는 경고 정로도 새겨듣게 한다. ‘해동가요’의 검은 걸 희다 하고 흰 걸 검다 하는 왜곡은 다 옳지 않으므로 차라리 듣지도 보지도 말라는 메시지는 비난과 험담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한 절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중종 때는 당파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서로 모함하고 비방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해 나라를 온통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오늘의 정치판이나 사회 구석구석도 그에 진배없어 보인다. 정치판이 검은 걸 흰 것으로 가장해 국민의 넋을 빼거나 기상천외의 음해성 전략을 구사해서라도 이기고 보겠다면 민생이나 국가 발전은 뒷전인 채 오로지 권력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치권이 헐뜯기 진흙탕 싸움으로 갈등과 분열을 가열시키는 일은 반드시 자제돼야 한다. 우리 모두도 ‘남 탓’ 타령을 벗고 ‘내 탓’부터 들여다보는 평상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어진 자는 그 말 한 마디도 가벼이 하지 않는다’고 공자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시인>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시인들—경북신문 2016. 10. 31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다. 현실도피라도 하듯이 한동안 거의 칩거하면서 세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는데 시간을 쏟아 부었다. 요즘 시인들은 어떤 생각에 무게중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장인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으며 그 형상을 상상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 시집은 박영호의 『바람에게 길을 묻다』, 김욱진의 『참, 조용한 혁명』, 김교희의 『소리에 젖다』 등이다. 이 시집들의 공통분모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자기성찰과 그런 세상 꿈꾸기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 빛깔과 무늬들이 각기 다르다.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해도 정신문화를 숭상하던 옛날 정서와는 달리 배금주의,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란 안팎의 소외감과 박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시인의 길은 돈과는 물론 명예와도 거리가 멀고, 그 사정이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박영호의 발길은 주로 자연이나 역사적 배경을 거느리는 명소,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풍경 속으로 이어지지만, 때로는 외부를 향한 듯 내면을 파고드는 자기성찰에 무게가 실린다. 세태를 희화화하면서 직설적으로 풍자하고 야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자성으로 눈길을 돌려 연민과 사랑, 베풂의 정서를 환기하는 휴머니티가 관류한다.
그의 경주 깃들기와 끌어안기는 사라졌거나 모습이 바뀌어가는 불교문화유산들과 그 유산들이 거느리는 정신적 높이와 깊이에 대한 그리움과 우러름, 애틋한 연민을 동반한다. 연작시 「경주에 가다」는 그런 마음의 밝음과 어둠(그늘)의 무늬와 빛깔들을 다채롭게 떠올린다. 그냥 구경거리만 될 뿐인 낡고 금 간 종을 보면서 “울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분노는/퍼런 녹이 되어 삭고 있다”고 그 소멸의 비애를 스스로의 분노로 해석한 「경주에 가다 5」나 돌밭에서 이름만 남은 절터를 지키고 있는 ‘일그러진 석불’과 마주치며 “삭은 몸통과 일그러진 얼굴이/설법을 대신하는” 것으로 읽고 있는 「경주에 가다 6」도 천년고도가 품고 있던 찬란한 불교문화와 그 정신적 높이에 대한 시인의 짙은 그리움과 연민, 세월의 무상과 허무감을 투영하고 있다.
김욱진의 시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자기성찰과 자기탐구에 무게중심이 주어지지만, 사회학적 상상력을 근간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파토스들을 희화화하거나 해학적으로 떠올린다. 말이 말의 꼬리를 물거나 능청스럽고 의뭉한 기지로 번득이는 어조가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거의 어김없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비애와 시가 소외되는 현실을 자장면 값에 빗대어 자조적으로 토로한다. 굶으면서까지 자장면 세 그릇 값으로 시집 한 권을 사던 가치관 탓으로 시인이 된 그가 시인으로서는 신세타령만 하는 비렁뱅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비감에 젖게 하는 건 그 당시가 시집 한 권 값이 지금의 세 배나 됐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 그는 어느 시낭송회에서 그런 세태를 절감해야 했다. 「참꽃시회」에서 옛 노래 공연이 끝나자 공연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시들시들해진 참꽃처럼/시인들만 소복 모여 앉은”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하지만 시인은 숙명처럼 시를 쓰면서 비애와 연민을 삭여야 한다. 그의 기대와 소망은 시의 진정한 독자를 향한 것이면서도 정신문화의 가치 회복을 겨냥한 절절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김교희의 시는 단아하고 정결하며, 섬세하고 미시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서정적 자아가 빚어내는 결과 무늬들이 진솔하면서도 다채로운 빛깔을 띤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풀이 피우는 꽃(풀꽃)을 두고 “이름 없어도 눈웃음 짓고/곱지 않아도 기죽지 않”(「당당화」)아 당당하다고 예찬한다. 이 예찬은 소외되고 그늘진 사물들에까지 각별한 연민과 사랑을 끼얹는 시인의 휴머니티을 보여준다.
그의 적잖은 시편들은 결국 홀로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그 때문에 빚어지는 사랑의 아픔과 기다림, 그 기다림과 아픔 때문에 더욱 절절해지는 그리움의 정서를 곡진하게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인간을 향한 정념을 가라앉히면서 자연과 가까이 교감할 때는 긍정적인 사유로 자연의 섭리에 겸허하게 순응하고, 삶을 너그럽게 관조하면서 무상이나 무위까지도 따뜻하게 끌어안고 있다. <시인>
 
 
 
 
 
나라의 운명이 최우선이다—경북신문 2016. 12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너무 어지럽고 안타깝다.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사실을 신중하게 들여다보고 알리려하기보다는 다분히 선동적이라는 인상을 씻을 수 없다. 선동 세력에게는 물론, 언론의 부추김에 따라가는 듯한 세태도 흙탕물만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실종되고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만 여겨지는 세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아무리 봐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나라’를 지키거나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 이면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나 표면상으로는 분명 그런 것만 같다.
정치인들은 자신을 비롯한 패거리의 유불리만 따지고 좇아가는가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소명과 사명감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는 행보만 거듭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나라’가 어디로 가든 당리당략과 정권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만은 아닐 것 같다.
지난날 대학 강단에서 꾀 오래 ‘현대문학사’를 강의한 적이 있다. 우리의 말과 글, 얼까지 찾은 광복 직후의 소위 ‘해방 공간’의 한국문단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당시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려는 문제를 두고 좌우의 대립과 갈등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치열했다.
당시 한국문단은 그런 정치‧사회적 갈등과 대립 양상을 첨예하고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해방 공간’에는 좌익의 목소리가 높을 뿐 우익의 목소리는 극히 미미했다. 논객들도 거의 좌파 일색이었다. 우익의 논객으로는 소설가 김동리가 선봉이었고, 시인 조지훈이 가세했으나 그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목소리에 밀리기만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북분단이라는 미증유의 민족적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한국문학은 해금조치가 이뤄지기까지 반쪽 문학이 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유의해서 새겨야 할 점은 미미했던 목소리와 큰 목소리의 역전이었다. 그 결과 우리의 말과 글, 얼을 바로세우는 길을 걸으면서 오늘의 문학적 풍요를 일굴 수도 있었다.
요즘 세상은 ‘해방 공간’을 방불케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좌우의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다분히 선동적이고 목소리가 큰 쪽으로 민심이 쏠리게 마련이기 때문에 우려의 소리들이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겉으로만 표출되는 오늘의 민심이 과연 진정한 민심일까 하는 문제를 두고 냉철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우려도 그런 전철 때문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잘못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쪽은 겸허하게 그 비판을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나라’가 바로 갈 수 있도록 소명과 사명감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당리당략과 개인 이기주의가 오직 ‘잿밥’에의 눈독일 뿐 ‘제사’ 자체가 왜곡되거나 변질된 소지가 없지 않은지 철두철미하게 따져봐야만 한다. ‘절도 모르고 시주’하는 어리석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제 진정으로 차근차근 정신을 차려할 쪽은 국민이다. 국민이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정치논리나 특정 세력의 득세와 목적을 향한 공략에 휘둘리는 건 아닌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결국 가장 불행해지는 쪽은 국민이다. ‘나라’라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냉철하게 들여다보지도 않고, 어떤 세력이 선동하고 부추기는 방향으로만 몰려간다면 예상치도 못한 비극의 수렁으로 빠져들지 모르며,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논리도 ‘마녀 사냥’식으로나 ‘하이에나’식으로 ‘몰아붙이기’여서는 안 된다. 철새처럼 개인의 영달에 눈이 어두워 겉으로만 드러나는 여론의 눈치나 보고, 힘이 있어 보이는 쪽에 편승하면서 오락가락하는 정치인들도 비판받아야 한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적이 되는 ‘권력에의 이전투구’는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나라’의 운명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치인들의 평상심 회복도 간절하게 기대해본다. <시인>
 
 
 
새롭게 달라지는 새해를—경북신문 2017. 1. 5
 
 
 
나라가 온통 어지럽게 흔들릴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이 밝았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군자는 새해를 맞이하면 반드시 그 마음과 행동을 한 번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해에는 진정 달라져야 한다. 올해는 지난해보다도 오히려 나라와 우리의 운명에 더욱 결정적인 기로(岐路)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올바른 눈을 떠야만 한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막무가내 편 가르기’, ‘줄서기와 줄 대기’, ‘내 편이 아니면 적’, ‘남 탓 타령’, ‘갈등과 반목(反目)’ 등으로 우리 사회는 이지러질 대로 이지러져 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연출하는 듯한 ‘대통령 탄핵’ 정국을 바라보면 답답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다. 나라의 장래나 민생보다는 헤게모니 쟁취에만 무게중심을 둔 정쟁(政爭)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총체적인 위기’라는 말이 귀에 못 박일 정도다. 어느 모로 보나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도 실감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자기나 소속 집단(정당)의 유불리만 따지는 정권 창출에만 혈안이 돼 있는 것 같다. 나라의 장래나 국민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은 겉치레일 뿐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말들만 쏟아낸다. 자기변명과 ‘네 탓’만 거듭하면서 오로지 ‘제 길 가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편향’에서 급격하게 ‘좌편향’으로 바뀌어버린 감도 없지 않다. 이 엄청난 변화 때문에 우리 사회의 나침반이 마비될 지경이라는 말도 나온다. 촛불집회가 그렇듯이 사람들이 시류를 타고 거센 물줄기를 이루기도 했으며, 그 반대편에서는 좌편향을 우려하면서 태극기를 앞세워 맞불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민심(民心)’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만 과연 정치적 부추김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민심’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지울 수 없게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오늘의 정치적 혼란이 더욱 큰 비극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직 ‘말없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새해의 정국은 어떻게 요동칠 지도 불분명하지만, 정치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 평상심(平常心)을 회복하고, 나라와 우리의 장래를 가장 소중하게 받드는 길을 지혜롭게 찾아나서야 한다.
한참 전부터 각종 여론조사 결과 ‘정권(政權)의 반대편’에 훨씬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주춤거리던 현대판 선비들과 나라의 장래를 진정으로 우려하는 각계각층의 목소리마저 그 물줄기에 휩쓸리고 있지는 않은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또 어떤 변수들과 만나게 될지, 어떤 결과와 연결될는지 아직은 ‘안개 속’이다. 오로지 자기편의 득세를 겨냥한 정치적 노림수의 속출과 수상한 기미들의 행진이 가속화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어 보인다.
언젠가 한 업체가 사원들의 새해 결심 중간점검을 했더니 아예 결심을 ‘안 한 사람’보다 ‘한 사람’들이 적어도 반걸음 정도는 앞서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크지 않은 공동체 안에서 새 결심이 있고 없고가 이 같은 차이를 빚는다면, 그런 결심이 국가 장래에는 어떤 작용을 하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사람 한사람의 제대로 된 결심이 모인다면 국가와 사회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말이 무성해도 지난날에는 구두선(口頭禪)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달라지더라도 잘못 달라져서는 안 된다. 빈번히 달라져도 너무 잘못 달라져 갈등과 고통이 가중되던 기억도 새삼 떠올려 새겨야 한다.
올해 우리는 더 나은 길로 나아가느냐, 그 반대의 길을 걷느냐 하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해 있다. 민생과 국가 경쟁력에 새로운 힘이 돼줄 경제가 살아나야 하고, 갈등과 반목이 상생(相生)과 화해(和解)로 바뀌어야 한다. 그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 할 수 있는 탄핵 정국을 잘 마무리하고, 정권의 창출만 겨냥한 몰아붙이기식 선동과 과장이 판을 쳐서는 안 된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새롭게 달라지고 거듭나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해본다. <시인>
 
 
 
 
 
 
이기주의와 포퓰리즘—경북신문 2017. 2. 2
 
 
 
요즘 세상에는 평상심이 실종되고 목적 달성에 눈이 어두운 이기주의와 포퓰리즘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아전인수식 이기주의가 바탕에 깔린 포퓰리즘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흔들면서 ‘선동에 선동’을 부르고 있기도 하다. 이 먼지바람은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실로 안타깝다.
우리는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바깥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핵을 내세운 북한의 그칠 줄 모르는 발악, 중국의 기술 추격에다 안으로는 권력 장악을 겨냥한 편 가르기, 일본식 장기침체, 저출산과 고령화 등으로 어지럽다.
그런데도 대권 경쟁에 나선 후보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기보다는 권력을 잡기 위한 선동적 포퓰리즘에 혈안이 돼 있다. 공무원을 80만 명이나 늘리고, 군 복무 기간을 줄이며, 전 국민에게 130만 원씩 나눠주고, 서울대를 없애겠다는 등의 공약들이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여론 조사로 보면 대권 후보로 가장 유력한 한 정치인은 지금 우리나라에 친일 세력, 군부 독재 세력이 있어서 이들이 권력을 다 잡고 있으며 문제의 근원이라고 했다. 친일 독재 세력이 반공, 산업화 세력, 보수 정당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이 말을 들여다보면 북의 김씨 왕조 두둔, 재벌 비난, 남 탓 타령이며 사실과도 전혀 맞지 않는 궤변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치에 맞지 않는 공약이 되레 인기도를 높이고 있으니 문제다.
더구나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마저 이성을 잃고, 선동에 휘말려 집단 광기까지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많은 사람들이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고, 정치인들은 이를 정치적 목적 달성에 활용하려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같이 온 나라가 이기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치닫는다면 국가의 앞날은 암담할 수밖에 없다. 인류사를 통해 보더라도 이 같은 분위기가 국가의 자멸을 부르지 않았던가.
윈스턴 처칠의 ‘정치란 전쟁 못잖게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전쟁과 같이 위험하다’고 한 말이 새삼 떠오른다. 보통사람들의 감정을 끝없이 부추기는 우리의 정치문화는 바로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를 증폭시키고 있어 디오니소스가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동 정치가에게 권력을 맡기는 일’이라고 한 말도 생각난다.
선거를 앞두면 이런 고질병이 도지는 주요 원인은 우선 상대방을 깎아내리면서 흠집을 내고 보자는 저의와 불리하면 일단 뒤흔들어 놓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전략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그런 일들을 도무지 멈추지 않는다. 선거전은 일정 기간만 필요로 하지만, 그 진실 캐기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게 바로 함정이라 할 수 있다.
폭로나 상대의 비방이 선거철의 단골 메뉴로 뜨고, 소기의 목적 달성용으로 사랑(?)받는 시대는 이제 청산돼야 한다. 이기려면 양심은 일단 팽개쳐 두고 가려진 진실을 그럴듯하게 왜곡 포장해서 퍼뜨리며, 의도했던 목적이 이뤄진 뒤에는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도 물 건넌 뒤가 돼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거 풍토를 볼 때, 선동은 ‘한탕주의’의 효자였다. ‘거짓 진실’을 과감하게 터뜨린 다음 표 몰이를 한 뒤엔 문제가 되더라도 법적인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적잖이 걸리므로 책임은 미미해지곤 했다. 그러나 무책임한 폭로와 비방은 이제 지양돼야 한다. 선량한 사람들을 목적에 이용하는 악의적인 선동에는 그 대가도 치르도록 해야 한다.
훌륭한 정치는 정직하고 창조적인 국민을 전제로 한다. 앞선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배경에는 훌륭한 정치가 못잖게 창조적인 일에 집중하는 국민과 객관적이고 차분한 사회적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라 했다. 자연의 현상은 하나같이 모순․대립이라는 싸움이나 갈등에 의해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사랑과 화해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사랑과 화해로 나라가 바로서려면 선이 악을, 이성이 감성을 이겨야 한다. 눈앞의 이기주의와 포퓰리즘이 지양되고, 진정한 정치철학이 비속한 정치 전략들을 물리칠 수 있어야만 한다. <시인>
 
 
 
진짜만 진짜로 믿는 사회 돼야—경북신문 2017. 3. 1

 
우리 속담에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팥을 콩이라 해도 곧이듣는다’는 말도 있다. 이 두 속담은 반대되는 말 같지만 기실은 같은 궤에 놓이는 말이다. 전자는 불신의 소산이며, 후자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 두 속담을 두고 생각해보면, 후자에 마음이 더 가닿는 건 ‘왜’일까. 전자는 우리 사회가 거짓말에 심각하게 오염돼 ‘구제불능’이라는 절망감을 안고 있다. 이에 견주어 후자의 경우는 ‘그런 사람은 바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에도 반드시 그렇지만 않다는 틈을 보여주며, 어디까지나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지만, 절대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보다 더러는 속아주는 마음이 훨씬 인간적임도 말할 필요가 없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므로 그런 믿음을 갖는다면 더러는 속거나 속아주는 사람들도 끝까지 속지만은 않게 될 것이다.
언젠가 한 음식점에 들어가면서 꽃병에 꽂혀 앙증스럽게 눈길을 끄는 한 송이 장미를 보았다. 마음속으로 ‘참 잘도 만들었군’하면서 만져보았다. 그런데 가짜 꽃이 아니었다. 순간, 진짜 꽃을 가짜로 본 자신이 부끄러웠다. 진짜를 보면서도 ‘진짜로 보이는 가짜’로 여긴 자신이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가짜들이 진짜처럼 행세하거나 심지어 가짜들이 진짜를 밀어내는 세상이기 때문에 생긴 불신증이라는 ‘자기 위안’을 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참 한심하구나’라는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금 세상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로 보이고, 진짜가 가짜들에 떠밀려 가짜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 가짜와 진짜를 바로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징후가 ‘나’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혼란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혹시 우리 사회 구조가 요즘 가짜를 진짜로 믿도록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나아가 이런 풍토가 진짜를 가짜처럼 변두리로 밀어내고, 가짜들이 진짜들의 자리를 버젓이 차지해 ‘진짜 같은 가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우려되는 점은 불행하게도 그 이상이라는 데까지 미치게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이미 오래전에 어떤 학자가 지적했듯이, 문제의 심각성은 ‘가짜의 횡포’ 그 자체도 그렇지만, 그 횡포를 빈번히 겪은 결과 우리의 ‘사고방식마저 왜곡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우려에 닿게 된다. 말하자면, 가짜에 대한 경계심이 정상적인 자위책을 능가해 이상심리로까지 발전할까 걱정된다는 얘기다.
근래의 방송이나 신문 지상을 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지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보도가 미덕인 언론이 과연 그런 미덕에 충실하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적지 않은 것은 ‘가짜 사실’이 ‘진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지금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어느 쪽이 진실의 편에 서 있는지 쉽게 예단할 수는 없지만, ‘팥을 콩이라 해도 곧이듣는다’는 여유를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더욱 접근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가짜에 속던 사람들이 점차 진짜 쪽에 귀를 여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무겁다고 한다.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억눌린 양심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튼 가짜는 가짜이고, 진짜는 진짜다.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고, 그 때문에 진짜가 가짜에 밀리는 사회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진짜를 보면서도 ‘진짜로 보이는 가짜’로 여기는 불신증도 치유돼야겠지만, 가짜이면서 ‘진짜를 밀어내는 가짜 진짜’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행여 우리 사회 구조가 가짜를 진짜로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면 기필코 달라져야만 한다. ‘팥을 콩이라 해도 곧이듣는다’는 조롱을 받던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이 진짜만 진짜인 믿음으로 굳어지는 믿음의 사회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시인>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정치를—경북신문 2017. 3. 30

 
우리 사회는 여전히 파벌이 최우선이며, 친분이 크게 작용하는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파벌과 친분의 사회’라는 말도 나온다. 오로지 제몫과 소속 집단의 이익만 챙기려는 분위기가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은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삭막한 풍경 속에 내팽개쳐진 채 세력 다툼만 창궐하는 소용돌이 속에 떠다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히면 그 극성은 하늘을 찌르곤 한다. 상식을 넘어서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억지 춘향’식 괴담들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기 일쑤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사실(fact)에는 아랑곳없이 날조되고 부풀려진 괴담들을 만들고 퍼트려 상대 정치 세력에 타격을 가하게 마련이다. 정치인들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이런 주장을 조장하거나 괴담들에 편승해 상대 진영을 깎아내리는 데만 혈안이 되기도 한다.
광우병, 한·미 FTA, 천안함 사태 때 터무니없는 괴담들이 날조되고, 이와 맞물려 돌아가는 정치적 목적의식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사실에 경악하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그런 분위기는 지양되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드 문제를 싸고도 어김없이 괴담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사실이나 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도 목도하고 있다.
광우병 사태 때 한 방송사는 인간광우병 감염 확률이 94%라고 왜곡 과장보도하고, 한 고위관리는 광우병환자들이 미국에서만도 25만 내지 65만 명이 은폐된 채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뜬금없는 허구였다. 하지만 그런 보도와 주장 때문에 온 나라가 엄청난 몸살을 앓은 뒤 그 책임을 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더욱 가관인 건 천안함 폭침 때 어이없게도 미군 잠수함 충돌설을 보도한 한 인터넷 매체 대표가 세월호 침몰 때는 고의로 실종자를 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는가 하면, 천안함이 좌초됐다고 주장한 한 업체는 세월호 침몰 때는 엉터리 구조장비(다이빙벨)로 구조작업에 엄청난 혼선을 빚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고의 침몰설까지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이 밝혀져도 사과 한 마디 없으며,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최근 세월호가 잠수함에 부딪쳐 침몰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자 충돌설을 내세우던 한 학자는 말을 조금 바꾸기는 했지만,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느 쪽 편들어주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한 방송사는 충돌성을 부추기는 특집 방송을 해 그런 의혹을 증폭시켰는데도 지금은 꿀을 먹은 듯 ‘입’이 없다.
정치인들이 나라가 어떤 어려움과 혼란에 빠지든 자기 패거리의 득세만 겨냥하고, 이에 줄을 서면서 그들의 목적 달성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문제다. 올바른 정치인이라면 진정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입신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헤게모니에만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에게 줄을 대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은 저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천자(天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습니다. 마땅히 동서를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천자는 사람들에게 편협하게 보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중국 당나라 때 장행성(張行成))은 태종에게 이같이 간했다. 당 태종은 이 신하의 말 때문에 ‘천자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 치세로 인정받는 ‘정관(貞觀)의 치(治)’를 했다. 미국의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 등도 철저하게 파벌(당파)을 부정한 인물들이었다. 위싱턴은 당파 초월을, 매디슨은 파벌 분쇄를, 제퍼슨은 파벌의 위험성 인식을 담보로 입지를 다졌고 국가 발전을 일궜던 대통령들이다.
대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게 될지 걱정이다. 자신의 파벌만 득세하기 위해 나라는 뒷전인 정치인들은 이제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봐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나라의 장래가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목적 달성만 겨냥한 대선 판의 이전투구도 문제지만, 대선 이후 나라가 과연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정상 궤도를 찾게 될는지 심히 우려된다. <시인>
 
 
 
 
 
 
 
 
교육 공약(公約)은 공약(空約) 수준—경북신문 2017. 4. 27
 
 
 
대선 후보들의 교육 공약(公約)은 표를 얻으려는 공약(空約) 수준이다. 선거 때마다 학부모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공약이 남발돼왔지만 이번에는 더욱 심한 느낌이다. 교육 현실이나 재원 마련 문제보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인다고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고등학교 무상교육, 대학 등록금 지원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지만, 온통 ‘공짜 교육’과 ‘무턱대고 더 주겠다’는 선심성 약속들이 두드러진다.
고등학교 무상교육 공약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등이 내놓았다. 내용도 거의 비숫하다. 의무교육을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한다는 데는 반대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과 현실성이 어느 정도인가가 문제다.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는 백번 옳다. 하지만 다각적으로 그 사정을 면밀하게 따져보지도 않고 내놓은 공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국가의 재정은 어느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게 뻔해 보다 현실성 있는 개혁이나 보완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국 고등학생의 60% 정도가 정부나 기업체, 장학재단 등으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고 있다. 아주 가난한 학생들과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들도 이미 학비 전액 지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40%에도 혜택을 주자는 취지인데, 국가 재정상 가정 형편이 어렵지 않거나 혜택을 받고 있는데도 이들 학생들까지 국가가 일괄적으로 학비를 지원할 필요가 있는지 떠져봐야 할 것 같다.
이들 후보들은 대개 대기업들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인사들이다. 그런데도 기왕에 삼성,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이 사원 자녀들에게 지원하던 학비마저 국가가 떠안겠다니 앞뒤가 맞는 논리인지 모르겠다. 부유층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자들에게도 고등학교까지 자녀들 교육비 부담만큼은 국가가 덜어주겠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후보의 공약은 특히 문제가 없지 않아 보인다. 대학생들에게도 소득이 낮은 80%선에까지 국가 장학금을 확대하며 공립유치원, 어린이집에도 지원을 최고 70%까지 확대한다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국가 예산을 엄청나게 쏟아 부어야 할 판인데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려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안철수 후보도 학제를 ‘5년(초)-5년(중)-2년(고)’으로 개편하겠다고 하지만, 과연 바람직할까라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엄청나게 소요될 예산을 어디서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후보들은 대개 재원 마련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미흡한 정도를 넘어 뜬구름 잡기식이니 소도 웃을 일이 아닐는지. 게다가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는 어물어물 넘어가려 하는 것 같아 표가 많은 계층을 향한 대선용 선심 쓰기의 헛공약이 아니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번 대선은 탄핵정국 때문에 벼락치기로 치러질 수밖에 없어 공약을 제대로 가다듬을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선 표를 모으고 보자는 데만 무게를 싣고, 눈가림으로 표를 의식한 환심 얻기에 급급한 인상이라는 점을 국민들이 쉽게 속아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 싶다. 더구나 우리의 교육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며 제대로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중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치유와 개혁에 대한 비전은 거의 보이지 못하는 것 같아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다. 사교육 부담과 공교육의 황폐화, 학교 폭력, 인성과 창의성 교육 미흡, 대학 난립 등 풀어나가야 할 숙제들이 산적해 있지 않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이 우리의 장래가 걸려 있는 ‘백년지대계’라 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헛돌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대통령 후보들의 교육 공약들이 표를 얻기 위한 공약(空約)에 지나지 않은 수사 나열과 빈말 투성이라면 우리의 교육은 언제까지 헤매고 떠돌아야 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협치와 상생, 말뿐만이 아니기를 —경북신문 2017. 5. 29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는 말이 있다. 블랙유머는 특히 그렇다. 웃고 나면 뒷맛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거의 예외 없이 윗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관계 때문에 웃고 울며 괴로워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따금 윗사람에 대한 유머(비아냥거림)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달래려 하는지도 모른다.
‘네 유형의 윗사람론’이라 할 수 있는 오래된 블랙유머가 문득 떠오른다. 누가 들려준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 내용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새삼 떠올려 보고 싶어진다. 우리 사회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유형의 윗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윗사람들이 어떤 유형인가는 크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랫사람들을 잘 만나야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윗사람을 잘 만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게 마련이다.
기억나는 ‘네 가지 유형의 윗사람론’에 따르면 윗사람이 ‘똑부’, ‘똑게’, ‘멍게’, ‘멍부’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사람은 ‘똑부’, 머리가 좋지만 게으른 사람은 ‘똑게’, 머리가 좋지 않고 게으른 사람은 ‘멍게’, 머리가 좋지 않은데 부지런한 사람은 ‘멍부’라는 분류다.
이들 네 가지 유형 중 가장 골치 아픈 경우는 ‘멍부’라 할 수 있다. 머리도 좋지 않으면서 부지런해 의욕만 앞선 나머지 좋은 성과를 거두기보다 조직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윗사람은 엉뚱한 일을 다반사로 저질러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생이 많을 뿐 아니라 괴로워할 일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진다.
그 다음으로 나쁜 인물은 ‘멍게’ 유형이다. 머리가 잘 돌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편할 수는 있겠지만, 성취되는 일이 적기 때문에 결국 아랫사람들에게 돌아올 것도 적어지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런 공동체는 비전은커녕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가장 훌륭한 경우는 ‘똑부’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윗사람을 따라가기 버거우며 사실 잘 안 되는 일도 적지 않을 것이므로 그보다는 유능하면서도 적당히 틈새를 보이는 ‘똑게’가 낫다는 논리에도 일리가 없지 않아 보인다. 머리가 좋은 윗사람이 이따금 게으름을 피울 때 아랫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일을 하게 되면 오히려 잘 되는 일이 많아질 수 있을는지 모른다.
윗사람과는 싫든 좋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윗사람론’이 부정적인 빛깔을 띨 경우 단순한 블랙유머 차원을 넘어서서 절실하게 호소하고 싶은 ‘아픔과 고통, 비판과 비난론’에 연계될 가능성이 커져버리게 되기도 한다. 특히 ‘멍부’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곳이 직장이든 사회나 국가든 어둡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출처가 어딘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론’도 되짚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프로는 불을 피우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지며,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가 하면, 자신의 일에 목숨을 걸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며, ‘너도 살고 나도 살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는 불을 쬐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 회피하기에 급급하며,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안 건너는가 하면, 자신의 일에 변명만 늘어놓고, 자기 이야기만 하며, ‘너 죽고 나 죽자’는 점이 확연하게 다르다고 한다.
이런 잣대로 요즘 정치지도자들을 보면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 아리송해지곤 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말은 ‘협치’와 ‘상생’이다. 말하자면 프로답게 남의 말을 잘 들으며,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덕목을 내세운다. 그러나 실제 행보는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새 정부도 벌써부터 그 반대로 가려는 조짐들을 안 보여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최근 인사청문회를 보면서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도 자꾸 떠오르곤 했다.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게는 후하다면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변명을 늘어놓게 마련일 것이다. 새 정부의 윗사람(들)은 적어도 ‘아마추어’나 ‘멍부’, ‘멍게’라는 비판과 비난을 면할 수 있기 바란다. <시인>
 
 
 
 
‘내로남로, 내불남불’의 자세를—경북신문 2017. 6. 27
 
요즘 정치권에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신조어가 다시 날개를 달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자기합리화와 이중 잣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 유행어가 판을 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판은 여전히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것만 같아 실망감에서 자유로운 수 없다.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보다도 질이 더 안 좋아 보이는 이 행태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는 역행하는 행보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더구나 최근 우리사회에 유독 이 ‘내로남불’이라는 사자성어가 회자되면서 정치권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고 있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논문표절 등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공언했으며, 소통을 강력하게 내세워왔다. 하지만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도덕성과 능력을 검증하는 국회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서 그 인사 원칙들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발등이 계속 찍혀온 형편이다. 게다가 아직도 산 너머 산인 채 현재진행형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한 경우가 있고, 가까스로 청문회를 통과하거나 밀어붙이기로 임명한 경우도 있다. 국무총리나 외교장관으로 임명된 인사들도 그 원칙에 부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앞으로 청문회를 거쳐야 할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지만,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언제쯤 조각이 완성될지도 알 수 없는 형국이다.
정부의 외국어고와 자율형 사립고 폐지 정책 추진을 두고도 말들이 적지 않다. 학부모들은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자기 자녀들은 특목고에 보내놓고 이제 와서 남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그 선택권을 박탈하려 한다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교육정책이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바뀐다는 우려의 소리들도 높다.
소통을 그토록 내세워온 문재인 정부는 불통으로 가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청와대와 여당 홈페이지에 자유게시판마저 열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이들 자유게시판은 국민들이 쓴소리까지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한 이후 그 언로를 닫아 놓고 있으니 비판이나 비방에는 아예 귀를 막겠다는 불통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의 24시간 일정을 공개하는 등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 그 약속을 벌써 잊어 버렸는지, 선거용으로만 소통을 강조해온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심지어 기자들마저 정부 현안에 대해 물어볼 기회조차 없고 청와대의 움직임을 뒤늦게야 알 수 있는 형편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유게시판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자 청와대는 구차스럽게 박근혜 정부 때 없어졌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불통이라는 비난을 아무리 퍼부어도 청와대 게시판은 열어 놓고 있었다. 탄핵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가 폐쇄 상태로 들어간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아예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을 열지도 않으면서 전 정부 탓으로 돌리는 걸 보면 ‘내로남불’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경선 때 같은 편끼리 격렬한 비방이나 비난의 모습을 대외적으로 노출하기 싫어 자유게시판을 없앤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선이 끝나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나 비방의 소지 많기 때문에 그 소리를 아예 듣지 않으려고 여전히 자유게시판을 열지 않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민주당 의원들은 대선 당시에도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문자 폭탄’을 극성스럽게 보내 공격할 때 “국민의 뜻”이라고 옹호했다. 문자 폭탄이 테러에 가까워도 “참여 민주주의의 새 지평”이라는 등 소통의 바람직한 모습으로까지 미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적이 이루어진 뒤에는 쓴소리나 문자 폭탄을 일절 받지 않겠다는 건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재인 정부는 ‘내로남불’의 오만과 독선을 벗고 ‘내로남로, 내불남불’, 나아가 ‘역지사지’의 자세로 ‘나’와 ‘남’을 동일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균형감부터 보여주기 바란다. <시인>
 
‘함성’과 ‘냄비 타령’—경북신문 2017. 7. 31
 

날씨가 무더워서 더욱 그런 건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자꾸만 짜증스럽다. 안 보고 안 들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켜서 뉴스를 본다. 두 시간 반 정도는 그렇게 보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며, 그런 일상이 버릇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
이틀에 한 번은 새벽 다섯 시 반이면 대중목욕탕에 가는 버릇도 굳어졌다. 이런 날은 세 가지 조간신문을 가지고 가서 한 시간 정도는 주요 내용만이라도 훑어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한 뒤 다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찝찝해서 견딜 수 없다.
한 지기는 그런 나를 ‘신문 중독자’라며, ‘요즘 신문, 읽을 게 있느냐’는 투로 핀잔을 한다. 언론 불신증이 심한 그의 이 말은 언론사에서 34년간이나 일한 필자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비아냥거림이라는 걸 왜 모르랴.
그렇다고 그 지기의 그런 시각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나 보도들을 보고 듣노라면 민망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여론에 끌려 다니거나 뭔가 눈치를 보는 것 같고, 포퓰리즘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균형감각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지기뿐 아니라 ‘우리(대중)’가 ‘민중’이 아니라 ‘우중’이라는 말이 자꾸만 뇌리를 스친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깨어 있기보다는 ‘어떤 힘’에 끌러 다니는 어리석음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 주위의 그런 적잖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진솔하게 썼던 시 한 편을 옮겨본다.

“어지럽고 두렵다/오늘 사람들은 어제 그 사람들이 아니다/내가 잘못된 건지, 그 사람들이 그런지,/어제는 지나갔을 뿐/오늘은 달라져야만 하는지,//자주 마음 바꾸고/얼굴 바꾸는 사람들을 밉보면 안 될까/그 사람들을 원망하면 내 잘못일까/생각하면 괴로울 따름,/나도 마음 바꿔야만 할까//망연자실 주저앉아/남 탓으로만 들끓는 세상을 바라본다/문득 떠오르는 광우병 촛불행렬,/요즘 행렬은 그와 다른 건지/광장과 거리는 알고 있으련만,//어지럽고 두렵다/오늘 사람들이 내일 또 어떻게 바뀔지/난로의 주전자 물이 펄펄 끓는다/자꾸만 끓어 넘친다/넘치지는 말아야 할 텐데,//지금의 함성은 빌라도광장의/그 옛날 함성과는 빛깔이 전혀 다를까/끓는 물이 왜 자꾸만 거슬리는지,/들끓는 저 광장과 거리를/저어하는 마음 무겁기 그지없다”(시 ‘함성’ 전문)
 
촛불행렬이 민심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 왜 자꾸만 광우병 촛불행렬과 그 옛날 빌라도광장의 함성이 떠오르고, 마음이 그토록이나 무거웠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당시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건 ‘왜’일까. 세상은 여전히 그렇게 돌아가고, 현재진행형으로 속도와 강도마저 더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라면 내가 잘못됐다고 그 지기는 또 핀잔을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국민)부터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마음을 고쳐먹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가 냉철하고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도 바꾸지 않고 싶다. 우리 모두가 제정신을 찾는다면 세상이 바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붙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마음을 역시 진솔하게 담은 시 한 편을 더 옮겨본다.
 
“불을 지피면 금방 달구어졌다가/이내 식어 버리는 양은냄비//누군가 요즘 사람들 마음도 그렇다고 한다/뜨거워졌다가 금세 식고 마는 냄비 속/섞어찌개 같다고도 한다//누가 불을 지폈다가 껐다가하는 건지/세상이 오락가락 요동쳐서/갈팡질팡,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오늘의 동지는 내일 또 어떻게 바뀔지/누가 불을 지폈다가 끄면/식어 버리고 다시 뜨거워졌다가 식는//우리는 냄빈지, 섞어찌갠지/먹은 마음을 그대로 가져가기는커녕/그런 사람들을 되레 바보 만들지 않았는지//누군가가 제 탓 먼저 하라고/죽비를 내리쳐도 먹혀들기나 할는지”(시 ‘냄비 타령’ 전문) <시인>

 
 
 
문학의 부활은 요원한가—경북신문 2017. 9. 1
 
 

요즘 문인들은 패기가 없다. 소외감이나 자괴감에 빠져 있는 문인들도 적지 않다. 글을 써서는 ‘밥’이 안 되고, 명예에도 별 보탬이 되지 않는 데다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마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활자 매체가 발달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정신문화의 중심에 놓였던 문학이 변두리로 밀리거나 ‘죽어간다’는 말이 나온 지도 이미 오래됐다.
문학지는 크게 늘어나도 영향력이 컸던 문학지들이 하향평준화의 물결에 휩쓸리며 퇴색되고, 문학적 공해에 가까운 사이비 문학지들이 오히려 판을 치고 있다. 문학류의 베스트셀러들이 외환위기 이후 10분의 1 내지 5분의 1 규모로 떨어진 채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뒷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젠 전업 작가들의 설자리는 거의 황폐화되고, 절대다수의 문인들에게 원고료나 인세는 ‘그림의 떡’이 되어가는 세태다.
이 와중에 ‘필자가 곧 고객’인 ‘질 낮은 문학지’들이 생겼다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는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들기도 한다. 이 악순환은 문단과 사회에 공해를 일으키고, 문학과 문인들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데 이바지할 따름이다. 한때 서울 강남의 어는 아파트 주부들끼리 ‘아직 시인이 안 됐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단 등용문은 ‘싸구려가게’처럼 열려 있다.
계속되는 경기 불황과 시대의 변화 등으로 ‘문학이 망하는 건 당연하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살아가는데 문학이 뭐 그리 대수냐’라면 할 말이 궁해진다. 영상미디어의 발달로 편안하게 누워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은데 책을 왜 읽느냐고 하면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요즘 소위 ‘미래파’로 불리는 문인들이 지나치게 현학적으로인 기이한 어휘나 꼬인 문장, 풀기 어려운 표현으로 독자들을 질리게 만들거나 독자들을 문학으로부터 쫓아버린 측면도 없지는 않다. 문인끼리의 ‘폐쇄회로의 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 ‘권력화한 문학’ 등으로 악재를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더 깊고 넓게 펼쳐내려 안간힘을 보이는 시인과 작가들이 왜 없겠는가. 통속적인 흐름에 영합하고, 가벼움과 상업성에 경도되는 문인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더구나 제사보다는 잿밥에 눈독을 들이는 사이비 문인들이 크게 불어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따르는 것 같다.
문학작품은 물론 책을 읽지 않는 분위기의 확산은 ‘포퓰리즘에의 기울어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미 오래전에 어떤 영화인이 “오늘날은 문학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영화가 그 정서적 대변과 트렌드적 성향,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꿈까지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영화 관객 1천만 명 시대가 열린지도 오래됐다. 각종 국제영화제를 통해 우리 영화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왔고, ‘한류’로 일컬어지는 해외에서의 붐을 만든 경우도 적지 않다.
문학의 위기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과 맞물려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영상 매체와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은 우리의 생활 패턴을 엄청나게 바꿔놓았으며, 그 속도가 계속 붙고 있기도 하다. 물질만능주의와 세속주의, 인문학 경시 풍조, 학벌 사회가 부추기는 입시 위주 교육도 함께 어우러져 ‘한없는 가벼움’을 부채질하는 추세다.
매체와 표현 양식이 급속도로 달라지는 이 변화의 시대에 문학의 소외를 놓고 타령을 늘어놓는 건 분명 어리석은 일일 것 같다. 문인들이 팔리지 않는 문예지들과 출판문화의 사양길을 마냥 아쉬워하거나 독자들을 원망하면서 ‘죽어 가는 문학’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이 가벼움의 시대에 문학은 인생과 현실 세계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참신한 ‘견인력’을, 한층 고양된 삶을 찾아 나서게 하는 ‘매력’을 증폭시키지 못하는 한 길은 안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진정한 부활’은 포기하거나 체념할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흔들림을 넘어서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문학의 위기는 바로 정신문화의 위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위기가 자살적이든 타살적이든, 걸림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일에 공급자들부터 뼈를 깎는 심정으로 나서야겠지만,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더 큰 문제가 아닐는지. 문학(시)의 공급 대열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수요자 쪽에서도 자성하는 아량이 따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미련을 버릴 수 없다. <시인>

 
 
 
 
타계한 이근식 시인—경북신문 2017. 10. 10
 
 
경북문단의 큰 별이요, 고도 경주의 ‘언덕 숲’(丘林)이었던 이근식(李根植) 시인이 지난 9월 28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적 업적이 높고 빛나며 드리운 그늘도 두텁고 컸던 만큼 애석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시인이 만년에 “가을 하늘에 철새가 날아가듯, / 열매가 익어서 꼭지가 물러 내리듯, / 그렇게 때를 알고 / 떠나가는 뒷모습은 아름답다.”(‘떠나가는 뒷모습’)고 노래한 바 있듯, 이제 그가 그런 겸허한 모습으로 떠나는 뒷모습이 그윽하게 아름다워 보인다.
“짚신감발하고 떠나는 몸 / 사뿐 사뿐 가볍게 간다. / <중략> / 맑은 메아리로 울다가 / 산마루 넘어가는 / 나비 한 마리. / 해탈의 세계가 저런 것인지도 모른다. / 빈 마음 빈 길을 가는 / 앞이 환하다.”(‘풍경(風磬)소리 1’)고 역시 만년에 노래했듯이 세상 번뇌 모두 거두어 안고 한 마리 나비처럼 가볍게 해탈의 세계로 드신 것 같아 그 앞이 환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그의 시는 단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물질문명이 야기하는 인간성 상실 이전의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자연과의 진화, 또는 자연회귀를 꿈꾸는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곤 했다. 문인화(文人畵)를 연상케 하는 그의 시는 조선조의 선비가 오늘의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면서도 구사되는 언어는 물론 감수성이나 시각이 참신했으며, 사물을 색채감각으로 파악하거나 의인화(擬人化)로 재구성해 보여 주목됐다.
“서늘한 기운이 / 수묵빛으로 녹아 흐르고”(「우사정에서」), “매미소리가 누렇게 타고 있다”(「만취정 가는 길」)는 묘사나 “산비알 붉게 물든 고추밭에 / 늦여름이 앉아 있다”는 의인화 기법은 각별히 신선했으며 “주현리는 허옇게 누워 있다.”(「주현리는 누워 있다」)라든가 “빨래처럼 / 햇볕에 바랜 가난”, “시래기가 된 집”(같은 시) 등에서는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 추구로 공감권을 넓혀 놓기도 했다.
대상을 담백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시인의 맑고 아름다운 천성(天性)을 다져 넣은 일련의 시들은 티 없는 옥빛 하늘자락과도 같았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가을 하늘빛”이나 “잘 구운 백자빛”, “그윽한 청자빛”으로 묘사했듯이 그런 순진무구한 얼굴을 갈망하던 천생 시인이기도 했다. 「사과를 따며」에서는 금척리 사람들의 삶을 “어둠을 쪼아 먹는 / 별이 된다”면서 이웃에 대해 따뜻한 가슴을 열어 보이는가 하면, 잃어버린 우리의 토속적인 정취, 그 속에서 한을 삭이면서도 슬기롭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옛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게 떠올려 주목됐었다.
역사의식, 또는 선비의식의 변주(變奏)들로 볼 수 있는 그의 시는 거의 한결같이 역사적 현실에 대한 눈뜸에서 출발하지만, 그 세계가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는 비전과 연계돼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비인간화 시대에 꿈꾸는 인간성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어떤 대상을 노래하더라도 나직하면서도 완강한 목소리로 격조(格調)를 유지하고, 동양적인 정신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돋우어내는 원숙한 정신으로 세계와 인간, 어제와 오늘, 나아가서는 내일까지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예견(豫見)하는 경지에 이른 그는 시집 ‘노자(老子)의 물’이나 ‘여든의 아침 비’ 등에서는 깊고 높은 정신을 시 속에 녹여 원숙한 경지를 펼쳤다.
1928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서 태어나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시 ‘모량부의 여울’ 등 6편의 시가 박목월(朴木月)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그는 시집 ‘모량부의 여울’(1979), ‘비 내리는 밤’(1984), ‘경칩이 지난 하늘 아래서’(1990), ‘꽃눈으로 마감하고 싶은 새벽’(1996), ‘백두산 가는 길’(1997), ‘노자(老子)의 물’(2006), ‘여든의 아침 비’(2015)와 ‘고희 기념문집’(1997), ‘구림 이근식 시선집’(2017) 등을 남겼다.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장(1972~1976), 한국예총 경주지회장(1988~1994)으로 활동했고, 1994년 경주문예대학을 창설해 2013년까지 원장을 지낸 그는 경주문단과 후진양성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경북문화상(1984), 한국예총 예술문화상(1988), 경북문학상(1990), 경주시문화상(문학부문, 1991), 경주시민상(문화부문, 2004), 윤동주문학상(2006) 등을 수상했다.
영결식은 10월 1일 오전 8시 경주문인협회‧경주문예대학총동창회장으로 거행됐다. 삼가 옷깃 여미며 천상복(天上福)을 기원한다. <시인>

 
 
 
 
늘어나는 남성 육아휴직—경북신문 2017. 10. 31

 
 
우리 선조들은 ‘남편이 곧 하늘이다(夫者妻之天也)’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죽어서 글자가 되데 따 지(地), 따 곤(坤), 그늘 음(陰), 아내 처(妻), 계집 여(女) 글자가 되고, 나는 죽어 글자가 되데 하늘 천(天), 하늘 건(乾), 날 일(日), 볕 양(陽), 지아비 부(夫), 사내 남(男), 아들 자(子) 글자가 되어 계집 여(女) 변에 똑같이 붙여져서 좋을 호(好)자로 놀아 보자…···”. 춘향의 집을 찾은 이 도령이 첫날밤 건넨 농(弄)이다. 여기에는 ‘남자는 하늘’관이 드러나 있다.
삼강오륜의 부부유별(夫婦有別)에도 남녀 차별의 의미가 명시돼 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의 팔자는 뒤웅박 팔자’란 속담도 여자가 지나치게 나서서 떠들면 집안이 잘 안 된다는 뜻과 여자는 남편에게 매인 몸으로 그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근대화에 이어 현대화란 깃발 아래 정신적으로도 서구화로 물들어 오랜 세월 여성을 짓누르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도 남녀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지 앞에 항복한지 오래다.
전통사회에서는 인구를 종족의 힘과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 출산(出産)을 장려해 왔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 증가에 의한 경제적 손실을 억제하지 않고서는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새로운 개발이론이 지지를 받게 돼 저출산 정책을 폈다. 1960년대까지 우리네 가정은 ‘흥부네’와 다름없었다. 출산율이 6.0명에 이르러 가족계획 사업이 맹렬하게 추진됐다. 그 결과 10년 뒤엔 4.5명, 다시 그 10년 뒤엔 2.8명, 1990년대엔 2명 이하로 떨어졌다. 지금은 세계의 저출산국으로 알려진 일본, ․프랑스보다도 낮은 1명 안팎으로 저출산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고 말았다.
‘아들 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슬로건으로 출산 억제 정책을 펴오던 정부는 정책을 정반대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저 출산율로 급격하게 고령화하고, 인구 감소 현상이 심각하다. 말하자면 반세기만에 다른 극단으로 나아가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된 셈이다.
우리나라가 저출산국이 된 건 그 억제 정책의 효과보다는 출산과 육아(育兒)에 대한 생각이 바뀐 탓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치관이 너무나 달라졌다. 자녀를 기르고 가르치는데도 질을 중시하고, 한 명의 자녀나마 경쟁사회에서 뒤지지 않게 키워야겠다는 욕구도 커져 있다.
2050년엔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돼 세계 제일의 노인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산업 활동 인구 감소, 복지비용 부담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경제성 둔화, 재정수지 악화 등 성장 잠재력이 낮아지리라는 걱정도 커지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육아휴직, 세금 혜택, 보육시설 확충 등 출산 장려책 마련에 허둥거리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이르렀으며, 급기야 남성 육아휴직도 장려하게 됐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대구경북에도 남성 육아휴직자가 10명 중 1명이 남성인 것으로 집계됐다. 대구지방고용청은 올해 3분기 기준으로 남성 육아휴직자가 396명이나 돼 지난해의 237명보다 무려 67.1%나 늘어났다. 전체 육아휴직자 가운데 남성이 10.6%를 차지한다. 전국 평균 12.$%보다는 낮지만 10%대를 돌파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지역별로는 경북이 14.3%를 차지해 지난해보다는 78%, 대구는 48.3%나 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양성평등(兩性平等) 시대가 다가오고 있지만 남성 육아휴직을 더욱 활성화하려면 풀어나가야 할 숙제들도 적지 않다. 3개월이 지나면 휴직급여가 줄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육아휴직을 꺼리는 분위기다. 단기 대체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데다 육아휴직 신청을 부서장이 반려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출산을 극복하려면 부부 공동 육아에 대한 인식과 남성 육아휴직 지원 강화가 따르고, ‘인구가 종족의 힘과 부의 상징’이라는 전통적 가치관 회복도 따라야만 할 것이다. <시인>
 
 
 

모자람의 미덕—경북신문 2017. 11. 29


무슨 일에든 남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앞서가는 성취를 일굴 수 있다. 그래서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지나친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옛 사람들의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는 가치관과 균형감각을 갖게 하던 ‘중용의 미덕’을 희석시키고 무색케 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중심적 성취욕 우선주의’가 팽배하고, 그런 행위들이 만연한다면 우리의 내일은 암담할 수밖에 없다.
‘미쳐야 미친다’는 가치관은 심지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는가 하면, 자세를 낮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자라는 사람’ 쯤으로 여긴다. 막무가내로 성취욕에 무게중심을 두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야심에 불을 지피고 욕심을 부리면서 상대적으로 뒤쳐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남을 곤경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중용’의 가치관은 차지하더라도 진정성을 담보로 한 ‘모자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오늘의 세태가 지난날과 너무나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어수룩해 보이는 ‘모자람’이 우리에게 느긋한 여유를 안겨 주고. 그 모자람은 완성을 향한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게 되기도 한다.
달도 차면 기울듯이, 초승달에는 보름달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들어앉을 빈자리가 들어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런 데서 싹이 트고 커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말을 쉽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여유를 가지기엔 너무나 각박하고 가파른 세태다. 더구나 그렇게 살아가려면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상처감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버텨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겸양은 미덕이 아니라 패배와 추락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 학자가 주장한 바와 같이 ‘모자람을 결함 대신 바람직한 형태의 여유로 여기고, 미치지 못하는 것이 무능으로 간주되는 대신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간주되는 사회’는 이제 물을 건너고 있거나 이미 건넜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아침마다 그야말로 눈뜨기가 두렵다. 자고나면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져 있으며,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곤 한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의 어느 곳을 들여다봐도 거의 예외가 없어 보인다. 법과 상식, 절서와 권위, 인륜과 나라의 정체성마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자주 떠오르는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이 독선과 극단적인 패거리주의가 판을 치면서 ‘아노미적 혼돈’이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이 때문에 혼란과 우려, 절망감에 밀어 넣는 일들이 다반사여서 일상의 한 부분이 돼가는 감마저 없지 않다. 높낮이 없이 불거지는 아전인수식 패거리주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권력을 잡은 측에서는 오로지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라는 독선과 오만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지나친 말이기만 할까.
더 늦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위도, 아래도 달라져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내 편’의 득세만 앞세우지 말고 국가의 장래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길을 찾아 나서고, 국민들도 평상심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거듭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높낮이를 막론하고 모두가 제자리에서 모자라듯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제몫에 충실하고, 남을 적으로만 몰아갈 게 아니라 함께 가려는 가치관이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지도층이 오만과 편견, 독선에 빠지지 말고, 반목과 질시를 넘어 진정으로 우리가 더불어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내일’을 향해 모자람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길이 부단해 모색돼야만 한다. <시인>

 
 
 
러셀과 슈워츠의 교훈—경북신문 2017. 12. 29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둘째형 이반은 막내 알료사에게 ‘악마(惡魔)는 존재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악마를 창조했으며 인간 자신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일깨웠다. 악의 화신(化身)인 악마를 실제로 본 사람은 없을는지 모르나, 우리는 악의 존재를 전율할 지경으로 마주쳐왔다.
더구나 우리 안에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살아 움직인다. 이렇게 본다면 악이나 악마는 우리 삶 가까이에 상존(常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보는 시각에 따라 이 세상은 악의 소굴이며, 우리는 그 소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악과 맞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신학자 제프리 버튼 러셀은 ‘악(또는 악마)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 결함을 가진 비실체(非實體’)이며 ‘부정의 부정이고, 사랑의 빛으로 파멸되는 무의미’라고 했다. 그는 데블, 사탄, 루시퍼, 메피스토펠레스로 구분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도록 인류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상됐던 악과 악마의 모습을 좇아 밝히고 분석한 뒤 ‘부정은 긍정으로, 악은 선(善)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견해를 펼친 바 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러셀이 간파했듯 긍정과 선, 사랑이 새롭게 살아나기 바라는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기 편이 아니면 일단 악(적폐)으로 가정하며 파헤치고, 적(악)처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려 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종(種)은 강하거나 머리가 좋기보다는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適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1859년 그가 ‘진화론(進化論)’을 내세우면서 피력한 이 논리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공룡은 살아남지 못하고, 화석(뼈)으로 남게 된 지도 까마득하다.
하지만 유연성을 가진 생물들은 끊임없이 새 환경에 적응하면서 번성했다. 유연성과 열린 사고(思考)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힘이 됐다. 그 소통(疏通) 능력은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세상이 워낙 가파르게 바뀌고 있으므로 유연성과 적응력의 비교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정치 현장에서의 유연성은 더없이 중요한 덕목(德目)이 아닐 수 없다. 원칙과 기본이 끝까지 중시돼야겠지만, 그에 못잖게 유연성과 신축성이 요구되는 반면 아집이 아닌 고집이라도 결국은 악재(惡材)를 부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정체성을 유동적으로 바꾸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들이 넘쳐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돼도 큰 문제다. 유연성을 넘어 임기응변과 얼굴 바꾸기가 다반사인 적자(適者)들만 살아남는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경제학자 슈워츠가 일깨웠듯이 ‘묻지 마 행렬’이 이어지고, 이들만 득세(得勢)할 가능성이 커진다. 게다가 수시로 변화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친다면 정말 안 될 일이다.
‘코드 인사’가 문제라는 점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 부쩍 더 심해지고 있어 우려된다. 통치자의 리더십엔 소통, 설득, 통합이 중요한 덕목일 텐데, ‘내 뜻대로’와 ‘코드 맞추기’로만 간다면 프로메테우수형 사람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 ‘묻지 마 행렬’을 이루게 되는 건 뻔한 일이지 않은가. 이러다간 유연성 실종이 부르는 악재에다 또 다르게 임기응변, 얼굴 바꾸기, 살아남기 행렬만 창궐하게 되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지도자는 국가를 위한 뚜렷한 전망과 비전을 소명(召命)으로 남을 포용하고 기껍게 하며, 모든 걸 아우르는 배려와 균형감각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나름의 철학과 소신, 카리스마를 갖되 유연한 자세가 요구되며, ‘묻지 마 행렬’을 거느리기보다는 단호하게 경계(警戒)할 수 있어야만 한다.
다시 되돌아가 이야기하자면, 그런 포용력과 배려,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묻지 마 행렬’을 경계하면서, 다가오는 새해부터는 러셀이 간파했듯이 ‘부정은 긍정으로, 악은 선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바꿔 득세보다는 나라의 장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
 
 
 
 
 
 
1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