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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6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에 —경북신문 2021. 8. 26
아트코리아 | 조회 379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에

——경북신문 2021. 8. 26
 
 
“비 갠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른데/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고려시대의 문인 정지상(鄭知常)의 시 ‘송인(送人)’은 별리의 아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비가 그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려 하는데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구의 언덕에 난 풀은 비에 씻겨 푸름만 더하고 있다고 노래한 이별시다. 내리는 비가 이왕이면 한 닷새쯤 계속 내려 임의 발걸음을 붙잡았으면 하는 애틋한 사연을 담은 김소월(金素月)의 ‘왕십리’도 이에 버금가는 이별시다.
이들의 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순애보’보다는 ‘망각의 강’을 살아서 건너기 위해 안달하는 세태인 것 같다. 언론 보도를 통해서는 물론 일상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바지만, 요즘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원수가 돼 돌아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망각의 강’을 두려움도 없이 건너려고 한다고나 할까.
이문열(李文烈)의 소설 ‘레테의 연가’로 ‘망각의 강’인 ‘레테’가 일반에 널리 알려졌지만, 이 강에 대한 플라톤의 풀이가 새삼 떠오른다. 이데아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 강을 인용했던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에 살던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 레테이며, 이 강을 건너면 이데아의 세계에서 살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정지상의 ‘송인’이나 김소월의 ‘왕십리’가 한의 정서를 담고 있듯,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는 ‘한(恨)’이라고 한다.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독특한 정서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의 특징은 남에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되갚음을 하기보다는 ‘가슴 속 응어리’로 떠안은 채 살아가는 정서다.
그 뿌리는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역사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빈번한 외세 침입과 내란, 엄격한 신분사회 등으로 이 땅의 서민들은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지금도 세계에서 시(詩)가 가장 많이 읽히는 연유도 감정을 최대한 응축시킨 시가 한의 정서와 깊이 관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연원은 먼 신라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승려 신충(信忠)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효성왕에 대한 한을 향가(鄕歌)로 지어 나무에 걸어놓았더니 나무가 죽었다는 고사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임금이 뒤늦게 깨닫고 신충을 불러 벼슬을 내리자 죽은 나무가 되살아났다고도 한다. 이 설화는 사람이 품은 원한의 두려움과 함께 그것을 풀어내는 해원의 슬기를 가르친다.
‘헌화가’, ‘처용가’, ‘찬기파랑가’, ‘서동요’, ‘제망매가’, ‘모죽지랑가’, ‘도솔가’, ‘공덕가’ 등의 향가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는 정서적 뿌리이며, 숭고하고 평화로운 노래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되갚음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덕목이라면, 향가를 고리타분한 옛 노래로 여길 게 아니라 새롭게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더구나 향가의 수사는 순진하고 원융(圓融)할 뿐 아니라 저속하거나 침음(沈陰)하지 않고, 안으로는 씩씩한 기상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삶은 너무 각박한데다 오랫동안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치고 있어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윤리, 도덕과 사회 기강은 땅에 떨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을 대로 깊어지고 불신풍조마저 만연하고 있다.
요즘 권력자들은 신충이 약속을 어긴 왕에 대한 한을 향가로 지어 나무에 걸었던 고사를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품은 원한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리려고 하는 건 아닐는지, 마음속으로라도 두렵다면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만 하지 말고 그 원한을 풀어내는 슬기를 보여줄 수는 없는지. 한의 정서도 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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