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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6

[이태수 칼럼] 물신시대의 구린내 / 2021.06.24 / 경북신문
아트코리아 | 조회 396

물신시대의 구린내-----경북신문 2021. 6. 25
 
 
 
현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물신(物神)시대’, 또는 ‘배금(拜金)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재물을 신(神)처럼 여기고 숭배하는 풍조가 미만하기 때문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삶의 목적으로 삼으며,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재물복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갈린다. 노력을 적게 하고도 큰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모이지 않거나 모이기만 하면 손재수(損財數)가 생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 때문에 돈이 많아도 끊임없이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나 정상적으로 돈을 모으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정과 불법의 유혹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돈을 모으려고 무리하다 보면 양심을 거스르게 되고, 부정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돈은 행복만 가져다주지 않는다. 부자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돈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므로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며 알뜰하게 모으고 쓰는 지혜가 요구된다. 돈은 쓰기 위해 있을 뿐 결코 숭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형제투금(兄弟投金)’이라는 고사성어가 새삼 떠오른다. 고려 말엽 이조년(李兆年, 필자의 윗대 할아버지)이 그의 형 이억년(李億年)과 함께 길을 가다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 한 덩이를 형에게 주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이조년이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이 놀라서 연유를 묻자 형에게 준 황금도 탐하는 마음이 생겨서 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형도 금덩이를 가에 던져 버렸다. 뒷날 과거급제로 출세한 두 형제는 재물에 대한 탐심보다는 형제의 도리를 택했던 셈이다.
최근 박희숙 시인의 시 ‘은행을 털다’를 읽으면서 물신시대의 구린내에 대해 새삼 적잖은 생각을 했다.

은행 두 채를 털었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동명교회 목사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구린내 나는 은행을 탈탈 털어 아예 껍질까지 벗겨버렸다는 이야기인데 돈 돌아가는 걸 마음에 두지 않는 목사님이 작심하고 은행을 턴 것이란다
 
교회 마당으로 들어온 은행나무가 예배당 사람들의 은밀한 기도에 귀 꽂아 두었다가 실수한 척 노랗게 익은 비밀을 계단 안쪽으로 툭툭 던지곤 했는데 철없는 아이들이 그걸 밟아 들여 예배당 안팎에서 꼬리 없는 소문이 몰려다니더란다
 
잔뜩 두들겨 맞은 은행나무 낯빛이 노랗다 심심해서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와르르 몸을 떠는데 목사님 얼굴은 늦가을 바람만큼 단호하다 아무 데나 끼어드는 물신의 구린내는 뿌리째 뽑아버리는 게 좋다고 운동화 밑바닥까지 탈탈 털었다
―박희숙의 시 「은행을 털다」 전문
 
발음이 같아도 의미가 사뭇 다른 은행(銀杏)과 은행(銀行)의 속성을 희화적으로 그리면서 날카로운 풍자로 나아가는 이 산문시는 이질적인 언어 뉘앙스를 충돌시키는 발상이 기발하다. 성직자인 목사(牧師)가 은행 두 채를 털었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 수신자로서는 당장은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치 건물처럼 두 채라고 하는 표현도, 교회 안의 ‘은행 구린내’와 돈이 갖는 ‘물신(物神)의 구린내’를 싸잡아 비판하는 풍자가 날카롭고 재미있다. 더구나 목사가 작심하고 은행을 탈탈 털고, 물신의 구린내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게 좋겠다며 운동화 밑바닥까지 탈탈 털었다는 대목은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다. 정녕 물신시대의 구린내를 덜 맡으며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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