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    업데이트: 21-12-30 14:09

언론평론

영남일보(脈을 잇는 사람들)
관리자 | 조회 1,630

[김수영기자의 ‘脈을 잇는 사람들’] 서예가 백천 류지혁과 제자들

   

“서예, 더 오래 더 잘 쓰려고 댄스스포츠도 배워요”

백천서예원에서 백천 류지혁 선생과 제자들이 각자의 작품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최영자, 백정희, 손영숙, 류석찬씨, 류지혁 선생, 백상길, 정재영, 박점희, 조영준씨.
 
한글날 기념 휘호
 
전주답사(전동성당 앞)
 
여름야유회(울산 대왕암)
한글 서예를 대표하는 서예가 백천 류지혁 선생(70)은 1997년 그의 호를 따서 ‘백천서예원’을 열었다. 이에 앞서 1995년 서예를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대구예술대 서예과에 입학해 서예를 전공했는데, 서예공부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는 장소로 서예원을 연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이 문영렬 선생 밑에서 서예공부를 한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자며 서예원을 찾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서예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는 서예원을 찾는 문하생이 30여명이지만 많을 때는 100명 가까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모여 ‘백천연묵회’라는 모임도 결성했다. 서예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끼리의 친목 도모를 통해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만들자는 취지의 모임이다.

취재를 하는 날, 서예원에는 8명의 제자들이 모였다. 서예원의 문을 열자 묵향이 진동을 했다. 각자 화선지 위에 정성어린 글을 쓰고 있었으며 백천 선생은 이 사람 저 사람이 글 쓰는 것을 봐주고 있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대한민국서예대전, 대구시미술대전 등 큰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거의 봐줄 필요가 없는 분들입니다. 그저 이 분 저 분들의 글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지요.”


한글서예가 류지혁의 ‘백천서예원’
1997년 개원후 연중무휴 墨香 진동

60년대 중반 생활인으로 놓았던 붓
80년대 일터 곁 서실서 다시 잡은 후
84년 첫 개인전…사업 접고 ‘인생 2막’
95년엔 대학서 서예 전공하는 열성

“서예 할 때가 가장 행복”…늘 서실
수천명 제자 중 국전 초대작가도 7명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의 이 말에 손사래를 저으며 “늘 세심하게 봐주셔서 서예공부에 많은 도움이 된다. 권위적이지 않고 제자들을 존중해주는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되니 서실에 나오는 것이 즐겁다. 하루라도 서실에 오지 않으면 샤워를 하지 않은 것처럼 찝찝하다”고 말한다.

백천서예원은 지역 서예계에서 분위기 좋고 화합이 잘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천연묵회 최영자 회장(59)은 “우리 서예원은 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잘 없다. 스승님이 제자들을 많이 공경해준다. 그리고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격의없이 지내려고 노력하신다. 그래서 스승 같은 느낌이 안들 때도 있다”며 “이런 스승님의 모습이 오히려 제자들에게서 더 큰 존경심을 우러나게 한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백천연묵회의 현 회원들 중 절반 이상이 서예원을 10년 넘게 찾고 있다는 말도 곁들였다. 최 회장의 경우도 한문 서예를 배우다가 2000년 한글 서예를 익히기 위해 백천 선생 문하로 들어와 계속 활동하고 있다. 그는 “스승님이 저보다 11세 위이지만 전혀 그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 관리에 아주 철저한 분”이라 했다.

백천 선생은 ‘성실’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서예원을 365일 연다. 추석·설 등의 명절에도 차례만 지내고 나면 나와서 서실을 지킨다.

“서실에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고 서예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그렇다보니 시간만 나면 서실을 찾지요.” 하지만 백천 선생이 서실만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서예를 하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걷기·헬스 등을 오랫동안 해왔다. 최근에는 댄스스포츠에도 도전했다. 그는 “이런 다양한 운동을 하고 댄스스포츠까지 하니 삶의 활력을 얻고 정신도 젊어지는 듯하다”고 했다. 이런 활력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최 회장은 “어떠한 때는 저희보다 더 젊은 분 같은 생각도 든다. 늘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그 활기가 그대로 전해지다보니 서실에 오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에너지가 솟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일흔의 나이에도 서예원을 운영하고 푸른방송문화센터에 매주 강의를 나가는 것은 물론 구미의 여류서예가모임인 금난회, 포항의 여류서예가모임 서연회의 지도교수도 맡아서 외지로 수업을 나가는 것만 봐도 백천 선생의 활기찬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왕성한 활동 덕분에 그를 거쳐간 제자는 수천명에 이른다. 서예원을 20년간 운영하고 대구예술대, 경북대 평생교육원 등에서도 오랫동안 강의했기 때문이다.

백천 선생의 제자가 많은 것은 그가 한글 서예를 하지만 한문 서예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서예원에 들어오면 한문 서예를 먼저 충분히 익히게 한 뒤 한글 서예를 하도록 수업을 이끌어간다.

“저를 서예의 길로 인도하신 분은 선친이셨습니다. 6세 때쯤 선친께서 한자를 익히도록 천자문을 직접 써주신 공책에 구궁지를 끼우고 반복해 쓴 것이 그 시작이었지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과외활동으로 한글 서예를 익혀 각종 실기대회에서 입상했는데 이로 인해 서예에 대한 애정이 한층 커졌습니다.”

하지만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이었기 때문에 계속 서예의 길을 걸을 수는 없었고 이를 잠시 접어야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붓을 들었지만 그 이후로는 생활에 쫓겨 거의 붓을 잡지 못했지요.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서예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1980년대 들어 시내 일터 가까이에 있는 서실을 찾아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84년 첫 개인전을 열고 서예에 매진했지요. 몇 년 뒤 사업까지 정리하고 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하게 됐습니다.”

백천 선생과 같이 문영렬 선생에게 배운 친구인 백상길씨(74)는 “30여 년 전부터 알아왔고 1998년부터 백천서예원에서 서예공부를 하고 있다. 친구이지만 대단한 역량의 서예인”이라고 백천 선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천 선생의 작품은 지난해 안동과학대 박물관에 150점이 소장되기도 했다. 백천 선생 역시 60여년의 서예인생에서 이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는 말을 했다. 생존작가의 서예작품을 박물관에서 이처럼 대량으로 소장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재영씨(59)도 백천 선생의 인품과 서예가로서의 열정에 반해 서예원을 찾은 제자다. “4년 전 대구로 이사를 와서 경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수업을 들어보니 스승님의 글도 대단하지만 인품이 너무 좋아서 서예원에까지 나오게 됐습니다.” 이 말 끝에 그는 백천 선생의 가장 큰 매력으로 친절을 꼽았다. 제자들을 세심히 돌보고 제자들보다 더 솔선수범하는 모습에서 일반적인 스승들과는 다른 모습을 본 것이다.

이렇다보니 백천연묵회도 강한 유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두 달에 한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수시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매주 금요일 영어회화도 한다.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제임스 페티슨 교수가 백천 선생의 제자로 들어왔는데, 그가 백천연묵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생활영어 수업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12명이 매주 금요일 저녁에 서예공부를 마치고 이어서 영어수업을 듣는다. 백천 선생도 이 영어수업에 수강생으로 참여한다.

제자들은 한글 서예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보였다. 서예는 정적인 예술이다보니 적성에 맞지 않아 몇 달 다니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 회장은 “모든 것이 그렇듯이 서예도 고비가 있는데 3년만 지나면 중독성이 있어서 그만두지 못한다. 특히 한글 서예는 좋은 글귀를 쓰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느끼는 감흥이 커서 중독성이 더 강하다”는 말을 했다.

이런 좋은 기운 덕분일까. 백천서예원 출신의 작가들이 큰 공모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전 초대작가만 7명에 이른다. 백천 선생을 비롯해 김말순, 김정숙, 김태순, 윤명국, 최영자, 박미옥이 그들이다. 한글부문에 국전초대작가는 별로 없는데 한 서예원에서 이렇게 많은 국전 초대작가들이 나오는 것은 드물다. 취재를 간 날에는 우연히 국전에서 입선한 3명의 회원이 백천연묵회 회원들에게 밥을 산다며 취재를 마치고 같이 가자는 제안을 기자에게 했다.

이들은 인터뷰 말미에 현재 서예계에 대한 안타까움을 밝히기도 했다. 백천 선생이 나온 대구예술대와 계명대에 서예과가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폐과가 되어 대구지역 대학에 서예과가 하나도 없다. 서예계가 이렇게 침체된 것은 경기불황 등의 이유도 있지만 서예과를 나와서는 취업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경기가 안좋은데 취업까지 안되는 학과가 어떻게 인기를 끌겠느냐는 것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서예가 학교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이 되어야 한다는 제안도 했다.

백천 선생은 “과거에는 서예를 취미로만 해도 되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서예도 취미라는 틀을 벗어던지고 일자리와 연결되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서예인들이 함께 노력해서 풀어야 할 숙제”라는 조언을 했다.

이처럼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20년 넘게 서예원을 운영해오고 있지만 백천 선생은 서예를 사랑하는 제자들이 있어서 아직도 서예를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제자들 역시 서예가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분이 바로 스승이라며 백천 선생이 없었으면 아마 서예를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이란 말로 화답했다.

글=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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