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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법사 (弘一法師, 1880~1942)
관리자 | 조회 1,057
홍일법사 (弘一法師, 1880~1942)

  
 
1880년 중국 천진에서 태어났다. 천진의 관공서 일을 맡던 거상(鉅賈)의 집에 태어났다. 본적은 절강(浙江) 평호(平湖)이다. 어릴 때 이름이 이성혜(李成蹊)였다. 6세 때 부터 형에게 배우다가 9세에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14세에 전서를 학습했다. 17세 부터는 趙幼梅에게 학문을 배우며 전서와 석각에 매진했다. 18세에는 천진으로 가서 이름을 文濤로 개명했고 자는 숙동(叔同)이다. 이 시기부터 이숙동으로 알려진다.
 
22세에 상해 남양공학에 들어가 蔡元培 선생에게 수학한다. 1905년(26세)에 일본에 유학하고, 1910년(32세) 중국에 돌아와 천진공업대학에서 교직을 맡았다. 1912년부터 상해의 태평양신문의 회화부분의 부편집장으로 일했다. 城東여학교에서 음악과 국어선생님으로 겸직했다. 1915년에는 남경사범학교에서 음악과 미술교사로 일했다.
 
1916년 항주 서호의 정혜사(虎跑定慧寺)에 들어가 17일간 단식을 한 후 채식을 하기 시작한다. 1918년(39세)의 李叔同은 중국 항주 서호의 정혜사(定慧寺)에서 귀의했다. 법명은 인음(寅音), 호는 홍일(弘一)이다. 당년의 구력 7월 13일에 정식으로 출가해서 승이 된다. 또 구력 9월 항주의 영은사(靈隱寺)에서 계를 받았다. (受三皈依,拜了悟和尚為師,法號弘一。)
 

 
1942년 9월 4일, 홍일(弘一)스님께서 복건성 천주(泉州) 不二祠에서 원적(圓寂)해서 원적의 전에 홍일(弘一)스님께서 최후에 “비흔교집(悲欣交集)”의 4개의 글자를 쓴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숙동은 재기(才氣)가 넘치는 思想家, 革新家 예술교육가이다. 중국 화극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음악, 서예 , 회화 희극 다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63년의 삶 속에서 50년 이상을 서예와 함께 갔다. 현대 서예가 중에서 그 만큼 열심히 서예의 길을 걸었던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말년에 그만의 독창적인 서체를 남겼다. 이는 중국 서예술에서 탁월한 성과로 손꼽힌다.


 
1918년 봄날, 한 일본여인과 그녀의 친구는 항주의 사원을 다 찾아다녔다. 마지막에 호포라는 절에서 마침내 출가한 자신의 남편을 찾아낸다. 38살의 그는 원래 서호의 건너편에 있는 절강성립제1사범학교의 교사였고 얼마 전에 교직을 사직하고 학교를 떠났으며 이곳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10년 전 그는 일본 유학시절 처와 알게 되고 그 후 여러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쳤다. 그러니 이번은 마지막 이별이 된다. 남편은 이 번화한 세계를 벗어나 불문에 귀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함께 악묘(岳廟) 앞의 임호소식점(臨湖素食店)에서 서로 말 없이 채식을 먹었다. 남편은 손목시계를 처에게 건네며 이별기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위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기술이 있으니 일본으로 돌아가면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호숫가에 서 있던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가는 작은 배를 바라보며 대성통곡했다. 배에 오른 사람은 고개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은 1957년 3월 7일 문회보에 실린 글이다. ‘나도 이숙동 선생을 얘기한다’라는 글이다. 이 글은 근대교육가 황염배 선생이 쓴 것이다. 거기에 쓴 것은 자신이 친히 목격한 친구와 처가 결별하는 일막이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숙동이다. 출가한 후에는 홍일이다. 1913년 이숙동은 가곡 <송별>을 창작하는데 가사는 그 경지가 높아서 탄복할 만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하게도 이 글은 5년 후에 일곡성참되었다. 이미 홍일법사가 된 이숙동이 처와 친구와 결별할 대 부르기 가장 노래가 된다. 중국의 현대문화는 그의 발아래에서 완약청려하게 시작된다고 불리던 예술의 대가는 조용히 항주의 호포사에서 출가한다. 그가 불문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당시 중국지식계를 크게 뒤흔든다.
 
1880년 10월 23일 이숙동은 천진시 삼차하구 부근의 한 부유한 염상의 집에서 태어난다. 이숙동은 부친의 다섯째 부인 왕씨의 소생이고 아명은 성혜, 학명은 문도이다. 결혼 후에는 이숙동은 모친과 처자식을 데리고 상해에 정착한다. 시와 서예의 재주로 약관의 이숙동은 금방 상해탄의 명사가 된다. 그는 풍류남아였고 예기곤령들과 친밀하게 지낸다. 당시 天涯五友로 불린다.
여러 해 이후 그 풍류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이숙동은 이런 두 구의 사를 남긴다.
二十文章警海內 畢竟空談何有
이 두 절의 사는 1905년에 쓰였다. 이숙동 인생의 첫 번째 큰 전환점은 바로 이 해에 이루어 진다. 같이 살던 생모가 상해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는 이숙동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이숙동은 결심을 내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한다. 일본 우에노에 있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제1기 예술전공유학생으로 6년간의 유학생활을 보낸다.
이숙동은 나중에 중국근대예술사상의 여러 가지 최초를 기록한다. 그는 최초로 서양회화를 국내에 도입한 사람이고 최초로 오선지를 써서 음악교육을 한 사람이고 중국 최초의 화극사를 만든 사람이다. 1907년 2월 서회의 홍수로 인한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숙동은 화극사의 동료들과 모금공연을 하기로 한다. 상의를 거쳐, 프랑스 작가 뒤마의 <차화녀>를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숙동은 <차화녀>의 여주인공역을 맡는데 이 화극은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된다.
인연 때문인지 이숙동은 항주의 절강성립제1사범학교의 초청을 받아 음악과 미술과목의 교사가 된다. 이숙동은 양복 구두를 입은 유학생 복장에서 장포 마괘 포혜로 바꾸어 입는다. 엄숙하고 소박하며 완전한 교육자의 모습이었다.
이숙동의 성격은 아주 특수했다. 夏丐尊이 학생기숙사에서 절도를 당한 사건이 벌어져서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 지를 묻는데 그는 그에게 자살의 방법으로 학생을 강화시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아주 극단적이다. 당연히 하개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업을 할 때 그는 자주 정중하게 학생들에게 국궁을 한다. 학생이 잘못을 범하면, 그는 그들을 남으라고 하고 아주 공손한 말투로 학생에게 앞으로는 땅에 가래를 뱉지 말라고 말한다. 강의를 마친 후에는 다시 학생들에게 구궁을 한다. 여러분은 이제 가도 좋다. 그의 교육방법은 이런 방법이었다. 완전히 감화시키는 식이었다. 그가 교사로 있으면서 인격을 비경으로 마치 부처와도 같은 후광이 있었다.
이숙동의 주재하의 학교 예술교육분위기는 아주 농후했다. 중국 인체모델을 미술학교에 도입시킨 선구자ㅣ다. 교사 이숙동은 그의 인격적 매력과 심후한 중서문화의 이해로 일련의음악과 미술의 인재들을 배양해 낸다. 중화민국 초기에서 민국20년 사이에 남중국 음악계의 인물은 거의 모두 이숙동의 제자들이거나 제자의 제자들이었다.
 
1918년 음력 칠월 십삼일 이숙동은 마지막으로 세속의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학교교문을 향하는 숲이 우거진 길을 걷는다. 이곳을 떠나면 세속의 생활과는 절연하고 불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법명은 연음이고 법호는 홍일이다. 이숙동의 돌연한 출가는 학교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숙동은 자신이 출가한 원인을 직접 설명한 적이 없다. 그와 오래 사귄 친구이든 아니면 그의 일본인 부인이든 그의 이런 변화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가운데 위자개의 해석이 비교적 적절한 것 같다.
사람의 생활은 3개의 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물질생활이고 둘은 정신생활이며 셋은 여혼생활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진지하여 물질욕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정신욕 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끝까지 탐구한다.
홍일은 고행승으로 인생을 마친다. 그는 700여 년 전에 실전된 불교 가운데 가장 계율이 엄격한 남산율종을 모아서 청고수행을 한다. 20세기 의 불교계에 4명의 대사의 이름이 빛을 발하는데 그들은 虛雲, 홍일, 太虛, 印光이다. 홍일대사는 남산율종 제11대 종사가 된다.
이숙동은 매번 한가지 유형의 사람일 때마다 진지했다. 전능한 배우와 같이 노생을 할 대는 노생같고 소생을 할 때는 소생같고 대면을 할 대는 대면같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성격에서 나오는 특징인 진지함 때문일 것이다.
 
1942년 10월 13일 그는 비흔교집이라는 네 글자를 마지막으로 쓴다. 이미 쓴 종이에 아무렇게나 이렇게 쓴다. 소교졸박ㅎ고 전혀 꾸미지 않았다. 비슨교집의 곁에는 3개의 작은 글씨를 썼다. 見觀經, 3일 후 홍일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염불하는 가운데 앉은 모습으로 편안하게 원적한다. 사리 500개를 남긴다.
홍일대사의 일생은 전설적인 색채로 가득하다. 63년의 생애중 39년은 속세에서 24년은 불가에서 지낸다. 세상사람들에게 많은 정신적 부를 남겼다. 그는 중국전통문화와 불교문화를 잘 결합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의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평담해진다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조박초 선생은 이렇게 그를 평한다.
 
무진기진공세안(無盡奇珍供世眼),
일륜원월요천심(一輪圓月耀天心)
 


풍자개와 이숙동
 
서호의 물빛 파란 9월엔, 달빛도 갑자기 흐릿해지네(九月西湖碧, 明月忽減色)’. 근대 중국의 유명한 만화가 풍자개(豊子愷)가 1936년 8월에 그린 한 폭의 만화에 붙인 화제이다. 서호의 녹수청산과 단교(斷橋)의 긴 제방에 두 그루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보름달이 높이 걸려있다. 장포(長袍)에 마고자를 걸치고 단삼(短衫)을 입은 4명의 행인이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정면의 담장에는 <동북실지도(東北失地圖)>가 걸려있다. 화가는 매서운 필체로 몇 번의 거친 붓질을 가하여 일본이 중국의 동북3성을 강점한 ‘9.18사변’을 묘사하여 중국인들에게 적개심을 불어넣었다. 대일항전에 나서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름다운 서호의 풍광보다 <동북실지도>에 집중되고, 높이 뜬 밝은 달도 빛을 잃고 넋이 나간 표정이다.
 
풍자개는 절강성 동향(桐鄕) 출신으로 처음에는 산문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중국의 만화 창시자로서의 족적이 더 뚜렷했다. 1914년, 절강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설립자 이숙동(李叔同)의 미술과 음악에 반했다. 이숙동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동음화회(桐蔭畵會)’라는 그림 동아리와 ‘동지(東砥)’라는 금석전각 동아리에 가입시켰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1918년, 이숙동은 호포사(號跑寺)로 출가하기 전에 자신이 아끼던 화구와 작품을 모두 제자에게 주었다. 풍자개도 불문에 귀의하여 홍일(弘一)이라는 법명을 얻은 스승의 뒤를 따라 ‘영행(嬰行)’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1924년 일본에서 귀국한 풍자개는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료였던 주자청(朱自淸)에 따르면 풍자개는 주사위처럼 작은 방안에 만화원고를 가득 걸어 두었다고 한다. 1925년, 상해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풍자개의 만화에는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다. 고시(古詩), 어린이의 삶에서 각종 사회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만화에 스며들었다. 신문화운동에 주력하던 정진탁(鄭振鐸)은 주필로 있던 <문학주보>에 풍자개의 만화를 연재하는 동시에 ‘자개만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 공식적으로 만화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정진탁이 최초였다.
 
1931년 일본이 동북3성을 강점하자, 노신(盧迅),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등이 상해를 중심으로 언론의 자유를 위해 단결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풍자개도 서명했다. 이 선언문은 중국공산당이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풍자개는 예리한 붓으로 대담하게 과장, 비유, 상징, 우화 등의 기법을 동원하여 유머와 풍자가 넘치는 화면에 국민당정부의 통치하에 암울한 중국의 현실을 비판했다. 가운데에는 서호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2월에 서호가 얼면 호반에는 고난이 가득하다(西湖二月氷, 湖畔多苦辛)’ ‘5월에 서호가 푸르면, 산마다 두견새가 운다(五月西湖綠, 山山杜鵑哭)’ ‘누가 서호를 보고 아름답다 하는가? 곳곳에 낚싯밥만 가득한데(誰言西湖好, 處處有釣餌)’와 같은 작품은 모두 서호 주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두운 면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만화가 날카로운 투쟁의 무기임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풍자개는 서남지방으로 피난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마일부가 항주에 세웠던 복성서원(復性書院)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정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집권하자 상해로 이주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항주에 있었다. 1954년, 스승 이숙동의 유해 일부를 항주로 옮겨 호포사 뒷산에 묻고 기념탑을 세웠다. 문혁 기간에도 풍자개는 공산당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이 열렬한 사회주의 만화가는 사인방으로부터 무지한 박해를 받았다. ‘온 산에 단풍이 드니 처녀가 나무를 한다(滿山紅葉女郞樵)’는 국기인 삼면홍기를 비난했고, ‘배안에서 봄 풍경을 바라보니, 물속에 복사꽃그림자가 비치네(船裏看春景, 水中桃花影)’는 인민공사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풍상을 거치는 동안 풍자개도 늙어갔다. 1972년 말에야 자유를 찾아 항주로 돌아갔다. 새봄에 조용히 나들이에 나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세운 홍일대사기념탑이 홍위병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보고 낙담했다. 평생의 지기 마일부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제2의 고향 항주가 이제는 회한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1975년 9월 15일, 풍자개는 상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홍일대사기념탑이 복원되었지만, 세상을 떠난 풍자개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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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미술가
 
위진 남북조 시대(221-589)
고개지(顧愷之, 348-409)
왕희지(王羲之, 307-365)
 
당(618-907)
염입본(閻立本, 601-673)
오도자(吳道子, 680-759)
왕유(王維, 701-761)
동원(董源, 934년~962년)
형호(荊浩, ?-?)
관동(關同, ?-?)
거연(巨然, ?-?)
주문구(周文矩, ?-?)
 
송(960-1279)
허도녕(許道寧, ?-?)
이성(李成, 919년~967년)
범관(范寬, 990년 추정-1027년 추정)
곽희(郭熙, 1023년-1085년)
소동파(蘇東坡, 1037년-1101년)
황정견(黃庭堅, 1045년~1105년)
미불(米芾, 1051년-1107년)
이당(李唐, 1050년-1130년)
북송 휘종(徽宗, 1082년-1135년)
장택단(張擇端, 1085년-1145년)
유송년(劉松年, ?-?)
양해(梁楷, 1140년 추정-1210년 추정)
마원(馬遠, 1160년-1225년)
하규(夏珪, 1195년-1224년)
목계(牧谿, 1225년-1265년)
 
원(1271-1368)
전선(錢選, 1235년∼?)
조맹부(趙孟頫, 1254년-1322년)
황공망(黃公望, 1269년-1358년)
오진(吳鎭, 1280년-1354년)
예찬(倪瓚, 1301년-1374년)
왕몽(王蒙, 1308년-1385년)
 
명(1368-1644)
대진(戴震, 1389년-1462년)
심주(沈周, 1427년-1509년)
문징명(文徵明, 1470년-1559년)
당인(唐寅, 1470년-1509년)
구영(仇英,1498?-1552년)
동기창(董其昌, 1555년-1636년)
서위(徐渭, 1521년-1593년)
홍인(弘仁, 1610년-1663년)
 
청(1616-1912)
팔대산인(八大山人, 1624년-1703년)
석도(石濤, 1630년-1724년)
석계(石谿, ?-?)
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鑑)
왕휘(王翬)
왕원기(王原祁)
오력(吳歷)
운수평(惲壽平)
정섭(鄭燮)
이선(李鱓, 1686-1762)
금농(金農)
나빙(羅聘)
이방응(李方膺)
황신(黃愼, 1686-?)
고상(高翔, 1688-1753)
왕사신(汪士愼)
화암(華嵒)
민정(閔貞)
고봉한(高鳳翰)
임웅(任熊, 1823년-1857년)
임훈(任熏, 1835년-1893년)
임이(任頤, 1840년-1895년)
오창석(吳昌碩, 1844년-1927년)
조지겸(趙之謙)
허곡(虛谷)
포화(蒲華, 1834년-1911년)
 
근현대(1912~)
리수둥(李叔洞)(이숙동)홍일법사(1880~1942)
쉬페이훙(徐悲鴻, 1895년-1953년)(서비홍)
린펑민(林風眠, 1900년-1991년)(임풍민)
류하이수(劉海粟, 1896년-1994년)(유해속)
치바이스(齊白石, 1863년-1957년)(제백석)
펑쯔카이(豊子愷, 1898년-1975년)(풍자개)
장다첸(張大千, 1899년-1983년)(장대천)
장샤오강(張曉剛, 1958년~ )(장효강)
왕광이(王廣義, 1959년~ )(왕광의)
웨민쥔(岳敏君, 1962년~ )(악민군)
팡리쥔(方立鈞, 1963년~ )(방립균)
아이웨이웨이(艾未未, 1957년~ )(애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