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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손영학의 전통문화이야기] 민간신앙 2017-10-25 영남일보
아트코리아 | 조회 600
우리 조상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정의 안녕과 마을의 풍요, 더 나아가 태평성대를 희구했다. 일월성신 산천초목, 이 우주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집안을 보살피는 신령들(성주, 조왕, 터줏대감, 삼신할머니 등)에게도, 마을 수호신(서낭당, 산신, 장승, 솟대 등)에게도 치성을 올렸다. 이처럼 우리 민족이 소박한 마음으로 믿어 왔던 민간신앙은 다양한 놀이와 함께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높였다.

민간신앙이 집중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영구 통치하기 위한 근간으로 행정력을 총동원해 다방면에 걸친 자료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란 제목으로,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전 47집에 통합돼 차례차례 간행된 것이다. 이 가운데 민간신앙에 관한 조사 자료는 아키바 다카시와 아카마쓰 지조의 공저인 ‘조선무속의 연구’, 무라야마 지준이 1919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1941년까지 조선의 민간신앙 4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격’ ‘조선의 점복과 예언’과 ‘부락제’를 내놓았다.(일제 식민지 학술용어인 부락(部落)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조선의 향토 신사 제2부- 석전·기우·안택’도 여기에 속한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민간신앙은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 무속은 유난히 폐습으로 여겨졌다. ‘근대화의 장애물’ ‘비과학적, 불합리한 미신’ ‘비문명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신타파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미신은 폭넓은 개념이었다. 무당에 의한 굿이나 민간치료법과 금기, 심지어는 세시풍속까지 포함되었다. 전통적인 생활 관행 대부분을 미신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서구적 사상과 기독교는 마귀로 보아 타도를 외쳤고, 근대교육을 통해서도 그렇게 가르쳤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뿌리 자르기에 나섰다. 동제의 폐지, 제당과 장승의 철거, 제의의 금지 등으로 이어졌다. 일부의 마을신앙은 축소 변형돼 관광 상품화하는 풍조가 빚어졌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건들바우에 위치해 있던 ‘한국무속박물관’(1990년 ‘건들바우박물관’으로 개관해 2003년 4월까지 존립)의 폐관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무속문화는 세계적인 문화현상이자 살아있는 전통문화’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유랑의 길을 떠돌고 말았다.

민간신앙은 전통생활과 밀착된 조상들의 기원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창이다. 민간신앙의 전면적인 부정은 한국인의 기층문화의 부정뿐만 아니라 문화자원을 내팽개치는 꼴이 된다. 민간신앙을 경원시하면서도 우리는 점과 궁합을 보고, ‘손 없는 날’ 같은 금기를 지키고, 차를 사면 고사를 지내고, 집들이를 한다. 민간신앙은 서구화에 급급한 우리네 삶 속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하고 있다. 미신으로 치부하거나 전통문화로 간주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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