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20-07-21 15:44

사유의 정원

영남일보[문화산책] 동화의 숲을 거닐다
아트코리아 | 조회 406
여덟 살 난 큰딸이 반찬으로 올라온 멸치볶음을 젓가락으로 콕콕 찔러댄다. 왜 그러냐고 하니 "멸치도 내가 먹을 때마다 입하고 꼬리로 입안을 콕콕 찔렀잖아" 한다. 자신이 당한 걸 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겠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연년생인 둘째딸은 '왕의 남자' 이준기가 광고에 등장하면 "난 이준기가 너무 좋아"를 연발하기에 빈곤하기 짝이 없는 화법으로 "그럼 아빠보다 이준기가 더 좋아?"라고 물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한 대답.

"이준기는 내 마음 속에 있고 아빠는 지금 내 곁에 있지".

선택을 피해 모두 껴안으려는 말재간에 어이없고 말았다.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그린 동화에 영향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점에 가면 간헐적으로 어린이 책 코너를 뒤적거린다. 어린이 관련 출판물은 차고 넘친다. 번역물이 우세고 그 속에는 발음하기도 힘든 주인공 이름이 등장한다. 숫제 문화점령이다. 내겐 문화충격(Culture Shock)이지만 아이들에겐 일상이리라. 다른 한편엔 '어른들이 읽는 동화'도 적잖게 눈에 띈다. 내가 사랑하는 동화작가는 정채봉. 풀벌레소리, 물소리로 우리를 적셔주던 그가 '그대 뒷모습'에서 '자운영 꽃 한 송이 끊어 가면 땅의 수평이 기울 것 같다'고 한 구절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좋은 동화를 말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잔소리만 늘어놓거나 어린이를 어르고 달래는 동화, 뻔한 도식과 이분법으로 선(善)을 강요하는 동화는 좋지 않다고 한다. 좋은 동화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깨닫게 해주는 것, 평등심과 고귀한 배려심을 갖게 해주는 것, 닫힌 꿈을 열게 하고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세계 속에 진실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에 바스락 소리가 날 만큼 메마를 때 동화의 숲을 거닌다. 명료한 이미지. 소통 불능은 없다. 읽다 보면 저 깊은 곳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것 같다. 요즘엔 소설가가 추천해 준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읽고 있다. 강마을에 사는 두꺼비, 두더지, 물쥐, 오소리가 빚어내는 이야기가 잔물결 속에 반짝인다. 메마른 꿈에 단비가 뿌려지는 시간이다.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