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20-07-21 15:44

사유의 정원

영남일보[문화산책] 소멸 뒤에 오는 것들
아트코리아 | 조회 364
나는 적잖은 시간 동안 몸으로 일하는 장인을 찾아다녔다. 선별기준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거나 한 가지 일을 얼마나 오래 해 왔느냐에 방점을 두었다. 흔히 그러하듯이 미디어 보도 자료를 1차 자료로 삼았는데, 맹목적인 신뢰감은 얼마 못 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사실과 개인적 사실은 달랐고, 사실 뒤에 또 다른 사실이 웅크리고 있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던 충남의 한 바디(베틀의 핵심 부분으로 베의 굵고 가늚을 결정한다)장을 찾아갔을 때 그 정황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여든을 바라보던 장인은 무거운 침묵이 스며든 툇마루에 홀로 앉아 객을 맞이했다.

장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옛 유물과 견주어 보면 판가름 된다. 그들이 탄식하며 내뱉는 말은 도저히 옛 사람들의 솜씨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거다. 남은 생을 특정 유물을 재현하는데 바치겠다며 결의를 다지는 이들도 많았다. 나전대모어피용무늬함의 탈락 방지를 막기 위해 찾아간 부산의 한 옻칠공방 장인은 이런 유물을 진열장 속이 아닌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요, 호사라고 했다.

공방은 30년은 족히 된 2층집에 칠 건조장과 살림공간이 조밀하게 엉켜있어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장인은 황망스러워 했다. 칠(漆)일은 주로 2층에서 이루어지는데 한쪽 벽면에 애기 부처, 염주, 향이 차려진 불단을 마련해 놓아 불심을 짐작게 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 108배를 올리고 불경을 틀어놓은 채 일에 임하며, 속옷조차도 옻칠한 걸 입는 걸로 보건대, 카슈나 화학도료는 얼씬거리지 못할 게 자명하다.

"제가 손본 건 제가 살아있는 동안엔 아무 탈 없도록 해야지요." 백골이 옻을 빨아들여 향기로운 생명체가 되듯 장인의 말엔 진정이 담겨 있다. 사위(四圍)에 아파트가 임립해 있는걸 보노라면 '근대유물'감인 공방이 사라질 모습이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외길을 걸어오면서 익힌 장인의 기예도 전승되지 않은 채 소멸되리라. 소멸 의식 따윈 필요 없이.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