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20-07-21 15:44

사유의 정원

영남일보[문화산책] 정신적 유산
아트코리아 | 조회 378
나는 "문화가 없는 인간은… 정신의 빈 바구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인류학자 기어츠(C. Geertz)의 말과, "많은 사람이 당신의 삶에 드나들 테지만 참된 친구들만이 당신의 가슴에 발자국을 남길 것"이라고 한 루스벨트(E. Roosevelt)의 말에 경사져 있다. 숱한 만남 가운데 내 가슴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문화를 매개로 한 만남이었고, 그런 만남은 지속성이 강했다.

내 곁엔 "미스터 손과 나이 차이는 30년이 넘지만…"하시며 문화를 통해 '벗'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어르신이 계시다. 한 사람의 삶을 응원해주고 그 사람이 지닌 광맥을 찾아 캐내어 주는 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누군가가 애써 빚어낸 예술·인문학적 결과물에 어르신이 마련한 마음자리는 참으로 따사로웠다. 풀풀 날리는 말의 성찬(盛饌)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성장한다는 걸 실증적으로 느끼게 해 주셨다.

살아오면서 어르신이 가장 호사를 누린 건 일본의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던 시절이란다. 천장에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신경을 긁어댔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무신경해졌다면서 공부 하는 방은 큰 곳도 필요 없고, 환경도 탓할 게 없다고 술회하실 땐 내 외람된 집착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르신의 서고(書庫)에 소장된 수 천 권의 책을 보며 새삼 내 독서의 폭이 좁고 알량했음을 깨우치기도 했다. 아, 사람들이 비타민을 탐하듯 책을 탐할 수 있다면….

머잖아 어르신이 심은 매화나무에 맵고 맑은 꽃이 필 것이다. 매화의 상징성을 세거지(世居地)에 오롯이 새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해마다 어성초로 차를 만들어 나눠주시는 모습에서 나는 메세나(mecenat)와 그 궤를 같이 한 개인의 문화 나눔으로 읽는다. 격조 있는 문화적 삶을 누림으로써 나이듦의 순정함을 보여준 것. 어르신이 내게 남긴 정신적 유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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