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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50년의 회고
아트코리아 | 조회 1,919
화력 50년의 회고

화력 50년의 회고
 
 
1966년부터 고등학교 미술부로 활동하면서 미술의 여러 장르를 실습을 통해 습득하였고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면서 전문적인 화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기의 의식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이 갖는 독특한 조형원리를 채득하여 전개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언어는 시대적인 흐름에 환경적인 여건이 어우러져 행위자의 역량이 의식세계에 접목되어 나타나는데 나의 경우는 10년 단위로 변화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60년대에는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기 위하여 소묘에 충실하였고 70년대에는 대학생활을 통해 느껴지는 것 들을 자유분방한 필치로 자연주의적인 낭만과 빛의 흐름을 좇아 인상파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80년대 초에는 미국 팝아트형식의 다소 극사실적인 표현으로 소외되고 버려진 어떤 부분을 어필하는 형식으로 시대적인 아픔을 고발, 공유의 메세지로 그림을 그렸다. 예를 들면 버려진 상점의 덧문이나 산사태로 허물어진 흙더미에 들어난 나무뿌리, 거기에 꾸겨진 체 버려진 빈 담배 갑 그리고 현대 문명의 이기로 편리함의 상징인 자동차가 흉기로 돌변하여 죽음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사고현장과 그들의 무덤인 폐차장의 모습 등 하이프리얼리즘이 갖는 시대적 메세지를 담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다.
 
80년대 초 중반부터는 미니멀적인 담배 불 작업과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접할 수 있는 정물을 초현실적인 상황으로 생략 단순화여 표현하는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민속품들을 신표현주의적인 이미지로 차용하여 화면구성을 극대화 하였고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우리의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것을 주제로 대상을 단순화하여 표현하는 등 우리의 유적 유물들을 화면에 끌어들임으로써 우리의 민족의식의 고취는 물론 먼 조상으로 부터 온다는 칼융의 무의식론에 답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여러 행위들을 88년도 작품전을 열면서 그때까지의 의식전개를 정리하고자 했는데 그때 작품전에 대한 나의 변을 여기에 소개 하고자 한다. “예술에 있어 창조는 늘 가슴 떨리는 즐거움과 함께 찾아온다.
 
이 즐거움 자체가 순수요 아름다움이다. 그린다는 것은 삼라만상을 통해 보고 생각하고 느낀 감동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행위일진데 이 즐거움을 위해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솔직하고 싶다.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땅과 내 피 속에 흐르는 이 민족성 내 영혼에 잠자는 관습과 전통성, 이 모든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까?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것 나의 것이 무엇일까라는 의구심과 본능적인 욕구에 의한 나의 의무이며 과제임을 알고 역사적인 사실에 믿음을 갖고 싶다. 이러한 믿음이 곧 나의 신앙이다. 또한 나는 우리의 태극사상 유불선사상 도가사상 등의 민속사상을 믿고 혼합주의적인 우리의 무속을 사랑한다.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애착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 침전되어 온 나의 내면적 끄나풀이며 이것을 한 가닥 한 가닥 풀어 펼쳐 보임으로 나 자신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습에 의한 유형, 무형의 전통성을 존중하며 역사적인 맥락에서 우리의 것 나의 것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모든 작업과정에서 역사적인 진실성과 민족적인 본질성 인식론적인 전통성에 접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구조적(structural)이며 형상주의(Imagism)적인 견해를 갖고 화면을 분해, 조합, 재구성하여 표현하였고 또 이를 위해 다양한 매체(material)와 기법(expression)을 사용하게 되었다.
 
캔버스와 천에 염료, 아크릴, 오일, 접착제, 스탠실 등을 이용하여 한국화적인 염색이나 번짐과 겹침 등으로 표현하여 작업을 위한 노작보다 그 과정을 중요시 하고자 했다. 어떤 행위가 목적을 위한 수단과 결과론적인 성취감에 만족될 수 없듯이 이러한 나의 표현은 노작으로서 보다 행위(conduct) 자체에 가치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행위 과정에서의 심리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시간적인 연속성과 반복에 의한 사고적인 느낌의 표출이 곧 자기 해소의 한 방법으로 형상화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자기 의지에 의한 계획된 인위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미적 감수성에 의한 우연성이 새로운 체험으로 자기의 가슴에 와 닿아 참신한 의미로 남아있을 때 이것이 순수성이고 아름다움이며 비로소 자기 나름대로의 정착화 된 작품으로 승화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상과 같이 이즈음 나는 우리의 것에 많이 심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9년도 아주연맹전을 계기로 동남아시아 여러나라를 돌아보면서 가는 곳 마다 이색적인 풍물을 통해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 특색을 강하게 느꼈다. 그러한 진한 냄새를 맡을수록 나의 것 우리의 것에 대한 자긍심과 애달픔이 겹쳐짐은 왜일까? 그래서 90년도에 해외 첫 개인전으로 일본 평론가 야마기시선생이 운영하는 동경의 전촌화랑에서 우리의 무속을 주제로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무속에는 그 민족의 정서와 애환과 혼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90년대에는 추상적인 여러 표현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시도를 통해 사고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선과 색의 어울림을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속과 더불어 음양오행사상을 형상화하여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음양오행사상은 동양우주론의 근본 원리로 모든 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행으로 순환되어 진다는 논리다. 그래서 우주를 상징하는 해, 달, 별, 기, 바람, 구름, 조상 등의 상형문자를 화면으로 불러들어 함께 노닐며 즐기자는 자연유희가 시작되었고 나중엔 물에서 노니는 고니, 오리, 연, 억새 등에서 꽃, 새, 나비 등 여러 곤충들과 노닐게 된다.
 
96년 서울 인사동에 있는 단성갤러리 초대전을 계기로 나의 그림에 대한 의식의 전개는 가장 토속적인 은유의 미학으로 삭힘과 절임을 외치고 있었다. “삭힘이란 싱싱한 생명체에서 주검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검은 새로움으로 탄생된다. 이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것으로 신선함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결국 삭힘을 통해 완전함에 이른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삶을 영위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자기의 본질성을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순수성이자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성은 완전함을 지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함이란 실제로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을 비운 상태에서 자신을 삭힘으로써 새로움이 이룩되기 때문이다. 삭힘에는 촉매제와 그릇이 필요하며 좋은 환경과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손맛이 깃들여야 한다. 맛은 지고한 멋에서 만들어진다.”즉, 삭힘이 없이는 절임을 할 수 없다는 진리를 통해 나의 내공을 쌓아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구미협 회장과 대구예총 부회장 그리고 여러 축제위원 및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시간에 쫓겼지만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질을 하다 보니 물의 번짐, 흐름, 어림 등이 절로 나타나니 갈대나 연 줄기 사이에 오리, 고니 등 을 노닐게하여 두 번이나 전시회를 가졌고 또한 팔레트 대신 사용한 갤판에 얼룩진 색의 흔적을 좇아 꽃을 그리고 구름과 새, 곤충 등을 그려 여러 번 전시회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연유희라는 맥락에서 순리에 순응하는 삶의 형식으로 표현되어지는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오랜 산중생활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노자의 무위자연의 사상과 그러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렇게 된다는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여 자연 속에서 함께 노닐고 희롱하면서 즐긴다는 차원에서 자연유희의 이미지가 실타래 풀어가듯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지게 이르렀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두에 수성아트피아 초대전을 통해 나의 40년 그림인생을 되짚어 보았고 민간 외교 차원에서 해외 교류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6년 전에는 대구국제네트워크전을 기획하여 6개국 작가들이 수성아트피아에서 전시회를 가졌었다. 그 후속으로 몽골과 교류전은 5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아양갤러리의 초대전시는 “아리랑을 품다”라는 나의 작품전은 우리민족의 한을 주제로 하여 큰 틀에서 아리랑에 그 의미를 두고자 했다. 한이 곧 어떤 바람이고 이 바람이라는 희망의 끈을 맺힘이 아닌 화해로 용해하고 응어리를 풀어나가는 한 방법으로 나무를 선택하였다. 오늘날에도 마을 어귀나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당산나무는 신목으로 아주 먼 선조 때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마을을 지켜보며 마을의 안위를 보살펴 왔던 마을의 수호신이였다. 우리는 농경민족의 후예로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며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경천애인사상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물음에 우리의 오랜 정서 속에 녹아있는 한에서 찾고자 했다. 한은 밝음이고 깨달음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한을 얻고자 수행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어디에 간들 어디에서 살든지 한을 노래하였으며 한을 찾아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던 것이다. 견디어 온 세월만큼 또 한이 쌓이고 맺혀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을 나무들의 모습으로 표현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무가 갖고 있는 여러 이미지를 어떤 상황적인 화면으로 설정하였고 그것을 상징화하기 위하여 배경처리를 같은 색조의 파스탤 톤으로 하였으며 나무의 모습은 드로잉이라는 형식으로 선이 갖는 감성적인 면을 극대화하여 표현 하였다. 2020년대를 내다보며 이러한 모든 것들을 포용하여 나의 모든 작업과정을 되돌아보며 한 시대를 살아온 화가로서의 흔적을 확인하고 기념함으로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조형세계를 개척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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