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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의성(義城)의 고인돌 2009년
아트코리아 | 조회 1,086

의성(義城)의 고인돌

 일산 박 위호(동방금석문연구회 회장)

가. 조사배경

 

고인돌(支石墓)은 선사시대(先史時代)중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고인돌이 의성지역에 분포됨은 의성지역에 살았던 선주민(先住民)의 생활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의성 지역은 낙동강 지류인 위천, 쌍계천, 남대천, 미천을 중심으로 많은 고인돌이 분포 되어있으며 특히 안평면 기도리의 구석기 유물, 금성면 탑리의 석창 등은 우리 지역에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에 선주민이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실정에서 구석기, 신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연결 할 수 있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장 방법인 고인돌의 분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훼손과 매몰 등으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고인돌을 조사 정리하여 소중한 청동기 시대 유적을 보존하고자 조사를 착 수 하게 되었다.

나. 분포도

 

2005년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의성지역 문화유적 분포지도에서 고인돌이 188기로 조사보고 되었으나 본인 조사한 바로는 27개군 355기가 확인 되었다. 앞으로 좀 더 깊은 관심과 주의를 갖고 조사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고인돌이 발견 될 것이다.

 의성지역 읍.면별 고인돌 분포 현황

읍.면

군집수

기수

성혈

의성읍

1

3

구천면

3

13

성혈

금성면

5

127

성혈

단밀면

1

단북면

3

22

단촌면

1

봉양면

4

54

성혈

비안면

6

85

성혈

사곡면

2

14

안계면

1

20

점곡면

1

12

춘산면

1

5

성혈

안사면

1

안평면

1

합계

27

355

의성지역의 고인돌 분포 현황을 보면 도표에서 보이듯이 위천과 쌍계천, 남대천, 미천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금성면, 봉양면, 비안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의성지역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문화인들은 이 지역의 선주민인지 북방에서 아니면 남방에서 이주해 왔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이들 집단이 계속 서력을 유지하면서 철기 문화시대로 이어져 왔는지 아니면 새로운 철기문화인들이 이주해 와서 조문국과 같은 철기문화의 성읍국가가 이루어 졌는지는 수수께끼이다.

다. 고인돌의 기능 및 어원

 

고인돌은 전 세계에 다양한 모양으로 분포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와 구조의 받침돌이 육중한 덮개돌을 고이고 있다. 이들 고인돌은 무덤으로서의 기능이 많으며 간혹 천신이나 조상에게 제사용으로 쓰여져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인돌을 지역에 따라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개구리바우, 장군바우, 고인바우, 돌바우, 할배바우, 할매바우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고인돌(支石墓), 중국에서는 “태석개묘” “석붕”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라. 고인돌의 형식 분류

 

고인돌은 그 형태와 구조, 덮개돌, 고임돌, 무덤방의 특징에 의해 국가와 지역의 연구 학자에 따라 분류가 약간 다르다.

 

1. 개석식

고인돌에 고임돌이 사용되지 않고 무덤방이 지하에 있으며 남한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의성지역에 많이 나타난다.

 

2. 바둑판식(기반식)

덮개돌 밑에 몇 개의 고임돌이 있어 마치 마둑판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다. 또 고임돌이 여러 개로 전체를 막아놓은 위석식으로 된 것도 있으며 무덤방은 지하에 나타난다.

 

3. 탁자식

몇 장의 판석으로 고임돌을 하고 덮개돌은 대게 평평한 돌로 무덤방은 지상에 나타난다. 고인돌의 밀집군의 중앙이나 높은 능선위에 위치하며 학자에 따라 재단의 의미로도 본다.

※개석식 고인돌은 겉으로 보기에는 덮개돌 주위에 흙이 있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흙이 유실된 후 고임돌이 들어나면 바둑판식 고인돌이 될 수도 있다.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고인돌이 원래 흙이나 작은 돌로 덮여있었으나 토양의 침식결과로 덮개돌과 고임돌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마. 고인돌의 연대

 

어느 시대이고 어느 사회이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매장양식이다.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고인돌의 상한시기를 늦은 신석기에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며 초기 철기시대까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BC3000년~AD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한국의 고인돌은 고조선 시대와 동일 시기의 매장양식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으며 연대 측정값이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 BC1950년, 대전 비래동 고인돌 BC1145~900년, 화순 대신리 고인돌 BC720~390년, 파주 옥석리 고인돌 BC900~740년, 재천 황석리 고인돌BC390~AD10년 등으로 아직까지 의성지역 고인돌은 연대 측정을 하지 않아서 연대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바. 의성지역 고인돌 특징

 

고인골의 장축 방향이 하천 유향과 지형전개 방향으로 1열 2열 3열 등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비안면 용천리의 경우 구릉부 정상에 위치하며 지형 전개 형이다.

 

의성지역 고인돌에는 성혈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비안면, 구천면, 금성면(탑리탑호석)에는 집중적으로 성혈이 나타나며 안계면, 비안면, 다인면 지역의 넓은 바위에도 수많은 성혈이 나타나고 있어서 풍요와 다산, 영생을 기원하는 주술적 행위가 이루어 졌음을 상상해 보며 서울 교육대학교 이용복교수는 이러한 성혈이 하늘의 별자리로 보여 지며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참조. 『고인돌과 바위위에 새겨진 성혈 그리고 별자리』의성문화원 박위호 편저)

 

의성지역 덮개돌 크기를 보면 동부와 서부지역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덮개돌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바위에 형태에 영향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덮개돌이 탑의호석, 비의 받침, 마당의 정원석으로 이용되어 오고 있다.

사. 맺음말

 

고인돌은 하찮은 돌덩어리나 바위가 아닌 문자의 기록이 없었던 선사시대의 선주민들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며 아울러 의성인근 군위, 안동, 상주, 예천 등의 지역과 연계하여 비교연구가 이루어진다면 기록문화 이전의 역사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사기간 중에도 지표조사없이 위치를 옮기고 상실하는 실 예가 있어서 앞으로 의성문화지에 고인돌을 실측 조사하여 연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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