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노란색에 푹 빠진 한 화가가 있다.
매섭고 긴 겨울의 통로를 힘들게 빠져나와 마치 광란의 몸짓으로 꽃망울을 터뜨린 노란 산수유꽃의 빛깔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작가, 봄의 광기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안달하는 작가가 있다.
난 그의 그림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불꽃같은 정열을 캔바스에 쏟아 내었던 피카소의(청색시대)를 떠올린다.
그 그림들의 푸른색 색조는 슬픔의 늪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장정희가 펼쳐놓은 노란 산수유꽃의 광란은
그와는 전혀 다른 환상의 이미지다. (bule) 와 (yellow) 의 차이는 슬픔과 기쁨의 차이만큼 표정을 달리한다.
하지만 왠지 이 대비되는 두 색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서로 중첩되는 정서의 동질감이 숨어있지 않나 나는
자꾸만 의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봄 의 광기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기쁨과 환희의 너울거림이 아니라, 자신도 그처럼 폭발해보고 싶다는 숨겨진 내면의 욕방,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암울한 슬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애절한 몸짓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이 표현한 (bule) 와 (yellow) 는 내면 깊이 내재되어 있던 어떤 미지의 마그마가 꿈틀대다 못해 마침내
활화산의 열기로 뿜어져 나와 캔바스를 가득 메워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다만 슬픔을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극복하는 방법과 기쁨 이라는 통로를 통해 슬픔을 위로받음으로서 극복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 장정희가 붓이 아닌 나이프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 또한 나이프의 터치가 만들어 내는 거친 마티에르글 통해
해소치 못한 욕망을 분출하려는 의도가 짙으며 나름대로 쾌감의 방식이 되고 있음도 분명하다.
작품 (고목) 을 보면 검은빛의 나무둥치가 캔바스의 가운데를 무겁게 분할하고 있다. 그 대담하고 힘찬 검은 나무둥치가
장정희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정희는 기실 꽃 에 마음을 빼앗기는 듯 포즈를 취했지만 사실은 늙은 나무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검은 나무둥치로 상징되는 내면의 슬픔을 그대로 다 들어내 놓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으로 위장하고 꽃의 화사함 속으로 자신을 숨기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정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기고 싶어 했던 자신의 내면을 이미 그림을 통해 다 들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난 장정희의 이번 작품들을 보며 (그림이 말하기 시작했다) 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말하기 시작한 장정희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심감 있는 힘찬 목소리로 자신의 내면을 쏟아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성과는 작가 장정희에게 있어 또 하나의 새로운 회화세계를 만들어 가는 물꼬로 작용할 것 이 분명하다.
다만 밝음과 어둠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의 절묘한 조화를 어떤 방식으로 이룩해 내는가 하는 것은 장정희가 추구해야 할 목표점
이기도 하며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시인 김 호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