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    업데이트: 21-12-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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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문인화, 그 비움과 느림의 미학 - 정태수
지산 정성석 | 조회 1,516

전시평문

 

 

 

지산 문인화, 그 비움과 느림의 미학  

   

 

1. 액체가 기체로 변할 때는 100도라는 임계치가 차는 순간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웃라이어어떤 부분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있다. “그건 하루에 세 시간씩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해야 전문가가 된다는 뜻이라 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고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지산 정성석은 30년 세월을 문인화와 함께 해 온 작가이다. 그는 대구예술대 서예과를 다니면서 서예성을 바탕으로 한 문인화의 본원성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했고, 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초대작가로 등단할 때 까지 사군자를 충분히 익히고 소화함으로써 전통 문인화가의 코스를 느리게 밟아왔다. 천천히 걸어오면서도 쉼없이 걸어왔기 때문에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기에 작품 속에서 동양화, 서양화, 서예 등의 요소들이 섞여있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작품전에서 보여주는 지산 문인화의 특징은 어렴풋이 두어 가지로 보여 진다. 하나는 전통문인화를 오랫동안 충실하게 연마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비움의 미학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문화에 맞게 예술의 폭을 넓히고 장르를 넘나드는 도전정신으로 줄기차게 작가적 표현능력을 제고시키려는 느림의 미학이다.

 

   

2. 지산 정성석의 비움의 미학은 사군자에서 그 특징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특히 대나무작품을 보고 있으면, 기운생동함과 여백미를 추구한 작가의 예술의경을 느낄 수 있다. '기운생동'은 모든 화가들의 화두이자 목표이다. 이것은 문인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회화장르는 기와 운의 조화가 적절할 때 생명 즉 생동감이 탄생하는 법이다. 그러나 기와 운의 경계는 지극히 크고 깊어서 도저히 말이나 글로써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의재필선(意在筆先), 골법용필(骨法用筆), 흉중성죽(胸中成竹), 법고창신(法古創新) 등의 화론에서도 배울 점이 많겠지만 늘 작가의 경험과 부단한 노력만이 자신의 격조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사군자작품에서는 오랜 숙련기간 동안 익힌 전통의 멋과 익숙한 세련미가 풍긴다. 고매의 등걸에서는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국화그림의 자유로운 붓터치에서는 세월의 연륜이 보인다. 문인화의 멋은 이렇게 익숙함과 생략, 함축의 미가 담겨있어야 한다. 지산은 늘 그런 것들을 화폭에 살려내려고 한다. 다른 장르에서 보면, 수묵을 통한 문인화가들의 작업방식이 가장 보수적이고 닫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소재도 사군자를 위주로 하면서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문인화나 민화가 가장 한국적인 맛을 잘 살려내고 있는 정체성 짙은 장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산 문인화도 바로 이런 한국적인 정서를 잘 보존하고 이어나가는 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재현은 바로 오랜 시간 숙성시킨 술처럼 비움의 담금질이 필요한 것이다.

 

 

느림의 미학은 최근 지산이 추구하고 있는 작품의 경향이다. 실로 표현의 재료가 더없이 다양해진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과거 선배들이 굳이 수묵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먹은 단순한 검은색 질료가 아닌 정신이자 역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먹은 3000년 역사를 관통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온 만큼 그 생명은 영원무궁할 것이다. 먹은 동양 회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먹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회화재료를 접한 후에는 진정한 먹의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먹은 먹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하여 최근엔 재료에 의한 구분이 사라지고 장르에 의한 구분 또한 모호해졌다. 이른바 예술에서 탈장르가 이뤄지고 서로 다른 장르간의 교차가 이뤄지는 크로스오버(Crossover)가 성행하는 것도 이런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번 작품전에서 지산도 석고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하드보드지에 석고를 앉히고 붓이 아닌 도필(刀筆)을 이용해 전각과, 서예와 회화가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인접 장르를 경험한 작가의 실험정신이 밴 실험작으로 보인다. 또한 문인화영역을 확장해 민화를 연상시키는 호랑이나 토끼그림을 보여준다. 시절이 호랑이해에서 토끼해로 변하면서 일반인들의 정서에도 시절기원이 담기는 때다. 작가 또한 이런 정서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표현해야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사군자라는 식물에만 의탁해 온 작가의 표현분야가 넓혀지고 동시대 감상자들과 호흡을 함께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바람직한 시도로 여겨진다. 이런 점들이 천천히 가면서 다양한 분야와 경험들을 융합해 보려는 지산의 느림의 미학이다.

   

 

3. 전통을 중시하는 문인화에서 특히 진일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은 화가들이 공감한다. 지산 또한 30년 동안 동양적인 운치가 배어있는 사군자를 그려왔고, 앞으로도 그려 나갈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재를 기운생동하는 붓질과 먹의 농담을 이용한 극도의 절제미와 단순미를 살려 화면에 옮기는 그림이 문인화이다.

 

 

지산은 문인화의 대표화목인 사군자를 그리면서 전통과 현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고 줄곧 줄다리기를 해왔다. 그에게 있어 전통은 언제나 산처럼 높게 서 있었고, 현대라는 것은 낮은 데로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나 접할 수 있고 접근이 용이하여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릴수록 어려운 것이 또한 이 소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군자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가벼운 말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한 가닥의 기운생동하는 먹선을 얻기 위해서는 수 없는 관찰과 반복적인 훈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얻어진 선은 작가의 응축된 심상이다. 그것은 마치 채우려고만 했던 조급한 마음을 조금씩 비워내어 덜 그리고, 다시 생략하는 중첩된 과정에서 찾은 강가의 둥근 돌맹이와 같은 단순미다. 비우려는 마음까지도 비운 작가 정신이 관객의 마음을 관통할 때 비로소 감히 소통의 세계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작업을 하고 있는 지산의 사군자에는 이런 작가의 심상이 녹아있다. 근래 들어 작가는 붓을 들어 일필휘지하는 순간보다 한지 앞에서 텅 빈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의 축적을 더 소중하게 느끼곤 한다고 말한다. 덜 긋고 덜 그리는, 단순이란 단어조차 초월하여, 비우고 또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극점을 향해서, 오늘도 천천히 그리고 쉼 없이 먹을 간다고 한다. 작가 자신은 비록 먹을 갈고 있지만, 먹이 결국 자신을 갈 것을 믿는다면서...... 지산의 비움과 느림의 미학에 공명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원한다.

 

 

 

 

20112

 

 

 

 

한국서예사연구소장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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