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23-09-20 14:32

석도화론

​9. 준법(皴法)
관리자 | 조회 69
9. 준법(皴法)

 

   붓에는 준법이 있다. 그래서 그림은 여러 가지로 생긴 모양을 화면에 표현할 수가 있다. 산은 만 가지 형상으로 되어 있다. 즉 그 여러 가지 생긴 형상을 표현하는 것은 일률적(一律的)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준법(皴法)은 알고 있지만 준법이 생겨나는 이치를 모르고 무조건 준(皴)을 따르기만 한다면 산에 무슨 준법이 있겠는가? 산에는 혹은 석산(石山)이 있고 토산(土山)이 있는데, 화가는 석산을 그리거나 토산을 그리거나 모두 준으로써 한 모서리와 한 구석을 그리는 것이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이 스스로 갖추고 있는 준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산천이 본래 갖추고 있는 준의 법칙은 봉우리 마다 이름이 각기 다르며, 체세마다 기이한 모양과 특징이 있으며, 그 형상이 각기 틀려서 서로 다르다, 고로 준법을 스스로 분류해 보면 권운준(捲雲皴), 벽부준(劈斧皴), 피마준(披蔴皴), 해색준(解索皴), 고루준(骷髏皴), 귀검준(鬼臉皴). 난시준(亂柴皴), 지마준(芝蔴皴), 우점준(雨點皴), 옥설준(玉屑皴), 금벽준(金碧皴), 탄와준(彈窩皴), 반두준(礬頭皴), 몰골준(沒骨皴) 등이 있는데 이것이 다 준법이다, 반드시 산봉우리는 각기 다른 형체(形體)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봉우리의 모양은 봉우리와 준(皴)이 합해서 준 스스로 산봉우리를 나타낸다. 산봉우리는 준의 형체를 사용하여 능히 변화시킬 수 없고 준은 도리어 봉우리의 형세를 취할 수 있다. 그 봉우리의 모양을 파악하지 않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떻게 나타 낼 수 있겠는가? 봉우리의 변함과 불변함은 준이 잘 나타났느냐 못 나타나났느냐에 달려 있다. 준이 여러 가지 이름이 있듯이 봉우리에도 역시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예를 들면 천주봉(天柱峯), 명성봉(明星峯), 연화봉(蓮花峯), 선인봉(仙人峯), 오로봉(五老峯), 칠현봉(七賢峯), 운대봉(雲臺峯), 천마봉(天馬峯), 사자봉(獅子峯), 아미봉(峨眉峯), 낭아봉, 금륜봉(金輪峯), 향로봉(香爐峯), 소화봉(小華峯), 필련봉(匹練峯), 회안봉과 같은 것들이다.이와 같이 봉우리는 그 형상에 이름이 있고 준은 갹출해 내는 모양에 따라 생긴다. 그래서 나는 묵을 운용하고 필을 조종할 때에 어떤 봉우리에 어떤 준을 나타낼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속에서 생각한다. 그리하여 일획을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후에는 무수한 중필(衆筆)의 그림이 필을 따라 나타난다. 즉 하나의 이념이 갖추어지면 많은 이념이 부합되어 나타나고 일획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많은 이치의 범위에 도달한다. 산천의 형세를 깨달아 마음을 정하고 나면 고금의 준법이 다를 바 없다. 산천의 형세는 그리는 데 있고 화필의 운용은 수양과 연습으로 이루어진 묵에 있다. 묵의 생동은 조종하는데 있고 조종하는 작용은 정성과 성의를 다하는 데 있다.

  만약에 필묵을 조종하고 운용하는 자가 안으로 충실하고 밖으로 깨끗하다면 일획의 원리를 받는 데 있어서 만방의 그림에 응할 수 있기 때문에 추호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다. 또한 안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밖으로 충실한다면 화법이 자유로이 변화되기 때문에 사색을 거짓으로 꾸미지 않아도 이미 밖으로 형태를 갖추어져 있으며 안으로 아무런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옛 화가들의 그림은 허(虛)와 실(實)을 중용(中庸)의 도로 하여 내외로 부합된 조종을 한 뒤에 화법이 변화하였으므로 화법이 완전히 구비되어 흠도 없고 병패도 없어져 준법은 수양된 연습으로 영묘(靈妙)함을 이루고 운용은 신묘(神妙)해져서 바르게 그리고자 하면 바르게 그릴 수 있고 반대로 그리고자 하면 반대로 그릴 수가 있으며 또 옆으로 그리고자 하면 옆으로 그릴 수 잇게 된다. 만약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다면 오염이 만물을 가려서 외계의 수많은 사물을 보지 못할 것이니 어찌 조물자(造物者)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출처] 9. 준법|작성자 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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