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1    업데이트: 25-02-04 16:22

위기의 꽃

위기의 꽃 오탁번 해설과 시 , 바람다비 , 성냥불
관리자 | 조회 167
 
정숙 시집 <위기의 꽃> 해설-오탁번 고려대 교수님

危機의 시의식이 피워 올린 가시연꽃
 
오 탁 번
(시인. 고려대 교수)
1
 
정숙 시인이 1996년에 상재한 처녀 시집 ????신처용가????는 어쩌면 시단의 이단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아주 당돌한 개성으로 뭉쳐진 시집이었다. <處容>을 시적 주인물로 내세워서 인간관계의 陰影과 소통의 과정을 투박한 경상도 방언으로 노래한 작품들을 시단에 선보여 가장 눈치 안 보는 개성적인 신인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나는 그후 아주 특별한 시인이 하나 태어났구나하는 기대와 축복의 마음을 지니고 시인 정숙의 시세계를 지켜보았고 대구에 가는 길이 있으면 한 두 번 그와 만나서, 60년대에 경북대 국문과를 다녔고 결혼하여 주부로서 살아가는 중년 여인의 다소곳한 눈빛 어디에서 그토록 진하고 절절한 시적 어조와 비유가 용출하는 것일까를 눈여겨보았다. 그만그만한 솜씨로 적당히 개칠하고 분바르고 나오면서도 언필칭 개성입네 뭡네하는 신인들을 익히 보아왔던 터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시와시학} 송년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씨 좋고 오지랖도 넓은 밉지 않은 누이와도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내가 단번에 이러한 血緣의 상상력 속에서나 점멸할법한 엉뚱한 느낌을 지닌 것은, 그가 <처용>의 노래 속에 짐짓 숨겨둔 ‘참숯’과도 같은 지극히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시인으로서의 品格을 나홀로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숯은 한 번 불에 연소한 다음, 암흑과 밀폐의 시간을 견디고 고열의 불로 타오르는 것이다. 그만큼 이중의 火刑을 견딘 다음에야 참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다. 한 번 불에 타면 재가 되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연소를 통해서 다시 더 딴딴하고 질긴 불의 재료로 태어나는 숯은 堅忍의 시의식과도 같다. 마른 장작이나 희나리처럼 연기를 내며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의 낭만이 아니라, 대장간에서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과학공학의 치밀한 과정 속에 놓인 치열한 세계관이 처용의 투박한 방언 속에 언뜻언뜻 보였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위기의 꽃]은 첫 시집과는 아주 딴판으로 21세기 한국 또는 대구광역시에서 펼쳐지는, 결혼 수십년이 지난 원숙한 여인의 삶의 전경이 농익은 어조로 넘쳐나고 있어서, 언뜻 보면 강렬한 첫 시집의 인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에게 일순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세밀하게 살펴보면, 처용 이후 천년의 시간을 건너뛰어서 적대적이기까지 한 21세기의 문명을 껴안고, 그 옛날 처용이 체험했던 고뇌와 번민을 현대인의 목소리에 담아서, 밤 이슥하여 떠오르는 열 아흐렛날 달처럼 선연하게 노래하고 있다. 처용의 아내가 들려주던 심한 투정과 욕망의 목소리가, 평범한 삶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일탈을 시도하면서 끝없이 스스로 위기의 순간에 존재하기를 희구하는 여인의 어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를 향한 시적 상상력의 張力은 아주 위태로운 고도에까지 시의식을 밀어올리면서 마치 無化돼버리는 순간의 絶命과도 같이 치열하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의식은 危機에 관련된 것이다. 위기는 위태한 순간의 연속체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첨예하게 빛나는 시의식의 結晶과 관련된다.

참나무는 제 몸을 태워서
숯이 된다
숯은 참나무의 영장이다
그 영장이 다시 자신을 활활 태우면
불은
힘이 두 배로 강해진다
주검이
주검을 지글지글 태우는
둘레에 늘어앉아서
사람들은 하루의 허기를 채운다

-[숯]전문
 
시인은 이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가 안겨 주는 위협과 위기를 다양한 비유 구조와 솔직한 담론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 인식은 때로는 과감한 도발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시종 긴장감을 지니게 한다. <참나무>의 주검이 불로 변용되는 이 단순한 담론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와 인간의 儀式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세월로부터의 소외감, 인생의 무상함, 근원적 고독 등을 실존적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존적 위기 의식은 그에게 존재의 무력감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실존에 당당하게 맞서게 하는 기회를 준다.
그는 막연한 도피나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시의식의 위기는 언제나 처절하지만 또 그만큼 눈부신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세밀하게 상황과 사물을 관찰하여 그 심연을 들여다본다. 시의 공간이 주로 일상의 범주에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자기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묘사적으로 서술하여 그러한 위기 상황에 철저히 맞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때로는 객관적 상관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대립과 투쟁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래! 그래, 니 속판 내 다 안다
참다못해 터뜨리는 니 기인 긴 한숨
가슴 치며 헉! 헉! 가쁜 숨 몰아쉬는, 눌리다
눌리다 터지는 니 울음 당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숯덩이 속,
감히 내 안다 할 수 있는 건 무너진 콘크리트
벽에 갇혀 싸늘한 바닥에서 무명소복을 입은
어둠과 싸워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벽은 시간을 먹고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내리 누르며 압력 가했고, 차운 냉기가 숨통 잡고
킬킬 웃고 있었다. 압사는 초침 문제, 끓어오르는
속 태우지 못해 매캐하니 연기만 피우던
숯검정, 드디어 불붙었다 한의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그래도 넌 압력 추 푹! 푹! 호들갑이
한풀이하는구나! 고초당초보다 매운 건 참겠다만
시방 난 숨쉴 추, 조차도 없는 압력솥
지렁이 씹히는 소리가 날 한번만 더
설피 건드렸다간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다
푹, 푹, 위위다로러거디러 푹,푹,푸-우-ㄱ
 
「압력솥」 전문
 
압력솥은 ‘기인 긴 한숨’을 참다못해 터뜨리기도 하지만 내적 억압과 압력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인 내면의 객관적 상관물로 존재한다. 온갖 울분과 상념으로 숯덩이가 된 압력솥의 내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이 ‘무너진 콘크리트/ 벽에 갇혀 싸늘한 바닥에서 무명소복을 입은/ 어둠과 싸워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압력솥은 한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금이라도 탈출하여 한풀이라도 할 수 있는 <추>라도 지니고 있지만, 시인에게는 어떤 비상구조차 없다. 내부의 압력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의 몸은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근원을 훼손시킬 수도 있는 위협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에 근거하여 시인의 내적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恨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숯검정이 아니라 수천 도의 열로 승화하는 참숯으로서의 강인한 시정신은 드디어 일상의 테두리를 분쇄하는 爆發力을 지니고 시인의 시세계를 휘황하게 수놓을 수 있을 것이다.
 
2
 
이러한 위기의식에 대한 시적 성찰은 폐쇄적이거나 패배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의 소재들이 서로 다양하게 조응하면서 빚어내는 시의식의 씨와 날로 짜여져있다. <점심>의 연작시에서는 자의식적인 성찰이 돋보이면서 세상과의 화해를 꿈꾸는 시인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린다.
 
털게는 온몸 찢기어 널부러졌고 미조차 딸기는 주근깨끼리 탱글탱글 뭉쳐도 지즈로 죽어가면서 아랫입술이 새파랗다 셋은 서로 별개이면서 같았다 다 같이 먹히는 삼각 관계였다 지금은 먹는 者인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누구에게 먹힐 것이다
 
「점심 2」 부분
 
싸각싸각, 누가 날 씹고 있다
환한 웃음으로 햇살이 내 살점을 떼어 씹으며
지나가고 나면 그 뒤를 상현달 찢어진
눈 꼬리 뒤에 감춘 푸른 비수가 눈치 못 채게
내 뇌 세포 한 조각 꼬집어 씹는다
 
「점심 4」 부분
 
어둠 속 점심요기는
음산한 전자 오르간을 두드리며
나의 목덜미를 주시한다
보드라운 솜털이 두근거리며 손을 뻗는다
오싹한 이 맛,
소름 꽃 황홀해서 온몸 더듬는다
 
「점심 5」 부분
 
시인에게 점심 식사는 존재를 활성화시키는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 자체가 무화될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도 언젠가 그들처럼 누구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누가 날 씹고 있다라며 불안해하고 있다. 그러나 「점심 연작」은 시인이 지니는 불안과 위기 의식의 근원적 이유를 알려주는 데에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이들 연작 시편에서 진술된 화자의 현재 모습이 과거와 미래라는 연속적 시간 의식 속에서 복합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심 연작」의 구조나 주제가 약간은 비약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위기감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올 님도 갈 님도 없는 폐물의 슬픔, 서답이 끝난 여자 가슴엔 화끈화끈 비수만 번뜩이고 잔 새우나 어린 조기들이 숨어 어둠을 더듬으며 핥다가 곤히 낮잠을 즐기는데 방금 시집살이 삼십 년의 둘째 언니가 폐광처분 당했다는 소식이 헐떡 쫓아든다
 
「폐광」 부분
 
가실이 없으니 결실도 없는
석녀,
아름나토샤온 즈시 향기마저 없으니
유리벽 속에서 꽃은 피워서 무엇하리
밑천이라곤 몸뿐인 무단가출한 밤의 꽃잎들,
바람과 구름이 히히덕거리다
철새처럼 떠나버리면
저들끼리 소복이 둘러앉아 호박씨나 까다가
씨앗 속 새파란 싹이 하 신기해서
눈물 흘리는 가여운
여인아!
 
「유리벽 속의 수국」 부분
 
사랑은 인간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순수 행위이다.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은 생의 가장 큰 비극이며 절망일 수 있다. 인용된 두 시 모두 사랑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그 열정마저 숨기거나 지우며 살아야 하는 중년 여인의 슬픔을 담고 있다. 청춘은 흘러갔고 이제 더 떠나보낼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랑의 열정만이 아직 남아, 지난 시절에 대한 추억과 향수는 시인을 더욱 슬프게 한다. 그러나 몸은 이미 <폐광>과도 같이 무너져 버렸다.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사랑은 <짧은 입맞춤>마저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리벽 속의 수국」에서 <향기마저 없는 여인>, <가여운 여인>으로 은유된 수국은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워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수국이 위치한 공간이 무덤 속처럼 캄캄한 유리벽 속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리운 <고향집 담장>과는 너무나 다른 공간이다.
결국 시인은 「첼로」에서 미샤마이스키의 悲歌를 들으면서까지 <살인>과 <자살>을 꿈꿀 수밖에 없었으며 <도난 당하고 있었다/ 미루나무는 제/ 삶을/ 야금야금 훔쳐먹는 담쟁이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방관자가 되었다>(「미루나무와 담쟁이덩굴」)라고 말하게 된다. 그가 <집>과 <방>의 상실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이 있어도 내 집이 아니다 방이 날 앉지 못하게 벽마다 귀와 눈을 달아 감시한다 거실은 사방이 거울이다 쉬지 않고 내 목숨 자르는 저 시퍼런 입술들, 내 심장 도려내는 귀신의 소리 짜각짜각 잠시도 날 편히 내버려두지 않고 무덤 속까지 따라 들어온다 媤자 달린 빨간 여우 털이 주둥이만 쑤욱 밀어 넣으며 ‘주차위반’ 딱지를 뗀다
 
「주차위반」 부분
 
방과 집을 찾기 위한 방랑은 인간의 역사이며 문학의 역사이다.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길과 집의 이미지가 변주되어 왔다. 인간의 삶이 지닌 본질 중 하나가 길의 모티브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인생의 길은 떠남과 돌아옴,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중적인 구조이다. 집안에서 언제나 거부당하는 화자의 차는 인간 숙명의 한 측면을 내면화하는 화자 자신을 환유한다. 그를 둘러싼 세계는 그에게 안식과 여유의 공간을 주지 않는다. 늘 주차 위반 딱지를 붙이는 세상은 화자에게 안식의 가능성을 빼앗으려 든다. 때로는 내면의 활성화를 위하여 금기에 대한 위반이 필요했지만 그의 <독재자>는 그 위반마저 내버려두지 않는다. 빈자리마다 압핀을 뿌려 놓으며 그를 가둘 감옥을 지을 뿐이다.
시인의 미덕은 자신의 존재론적 위기를 도발적으로 폭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포기와 체념의 자세를 극복하고 더 극적이고 시적인 위기 순간을 준비하는 강인한 시정신에서 찾아진다. 이러한 시정신의 부단한 단련 끝에 평정을 향한 견인주의의 길도 비로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암흑의 시간을 견디고 점화되는 흑빛 참숯의 뜨겁고도 강렬한 불빛이 시인의 시세계를 조명해낼 때 가장 견고한 藝術作品으로서의 <시>가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보셔요.
젖몽오리 속에 수줍음 태워쌓더니
열병의 꽃나무가 마침내
타오르네요. 얼어터지면서
절절 끓어오르는 가슴 주체할 수 없어
칼날 삼키며, 녹이며 끌어안은 겨울바람
드디어 월경 빛이 붉게 타오르네요
 
「동백꽃」 부분
 
冬柏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하여 견뎌야 하는 열병은 숯이 지닌 암흑의 시간과 맞닿아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懷孕과 分娩의 상징인 여성 특유의 생리와도 연결되는 상징적 고리가 된다. 끓어오르는 가슴의 아픔을 참고, 칼날을 삼키는 통과제의의 과정을 거쳐 동백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月經 빛 붉은 동백꽃을 피운다. 하필 왜 시인은 동백의 꽃 빛을 월경 이미지로 표현한 것일까? 이는 시인의 마음이 푸르렀던 과거에 대한 향수에 항상 젖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시간의 역전 혹은 시간을 초월하는 시적 몽상의 궤적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

시인에게 계절이라는 시간의 변환은 그대로 세계인식의 거울이 된다.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고 피어나는 꽃을 불면의 밤과 고뇌를 지나서 태어나는 한 편의 시로 시인은 의식하게 된다.
겨울의 칼바람을 견디고 있는 왕벚나무의 모습 속에는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다. 화자의 몸 역시 <이토록 가당찮은 힘>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봄에 대한 그리움의 동력이다. 왕벚나무의 봄은 다가올 시간이지만, 화자의 봄은 흘러간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벚나무가 열꽃을 피우며 봄의 도래를 알리듯 화자 역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봄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보라와 찬 서리를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그리움의 동력으로 치환하는 왕벚나무의 생리는 화자 자신의 정신적 자세를 상징한다.

알 수 없었다, 언제, 어디에서부터
왜 몸이 이렇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는지
왕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맵찬 겨울 이겨내려는 일념이
이 악물고 칼바람 견디는 새 나도 모르게
꿈을 키우고 있던
실뿌리부터 서서히 피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신열이 터지면서 피는 열꽃들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 그리움
내 몸 속에 이토록 가당찮은
힘, 숨어 있을 줄이야
겨울이 피운 꿈들이
온 세상 이레 화안히 밝히다니!
눈보라 찬 서리가 그리움에 부채질하여 마침내
봄 활짝 피우는 힘이 되었던 것,
그 서슬에 놀란 바람이 은근슬쩍 부드러워진다
 
「봄, 왕벚나무」 전문
 
시인에게 <봄 활짝 피우는 힘>은 무모하면서도 <가당찮은> 면을 동시에 지닌다. 거기에는 시간의 상징적 역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힘을 믿는 화자는 이제 몸으로 늙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늙는 것이다. 그에게 육체와 물질이 머무는 시간과 공간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의 고정 관념은 존재의 발현을 구속할 뿐이다.
이와 같은 구속을 위기의 시의식으로 감싸안을 때, 아름답고 격조 높은 서정시가 진정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진정성은 아주 위험천만한 高度 위에서 실현된다는 점에서 시인 정숙의 눈치 보지 않는 무모한 시인정신의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우포늪을 노래한 다음의 시는 이 시집 속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작품이면서 이제까지 우포늪을 노래한 모든 시 가운데서도 엄지 검지 속에 드는 탁월한 작품이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고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사 오천 만 년 전 낙동강 한 줄기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분명히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제 속에 썩혀
어느 세월엔 가 연꽃 한 송이 꽃피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제 조상의, 조상의 뿌리를 간직하려고
원시의 빗방울은 물이 되고
그 물 다시 빗방울 되어 떨어져
물결 따라 흘러가기를 거부한
늪은 말없이 흘러가라고 재촉하는
쌀쌀맞은 세월에
한 번 오지게 맞서 볼 작정을 했던 것이다
때론 갈마바람 따라
훨훨 세상과 어울리고저 깊이 가라앉아
안슬픈 긴긴 밤이었지만 세월을 가두고
마음을 오직 한 곳으로 모아 끈질긴
가시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뚫고
세월들이, 오바사바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사랑홉는 가시연꽃 한 송이 피워낸 것이다
 
「우포늪」 전문
 
산맥과도 같은 인생의 험난한 길을 온전히 오르내리기 위해서는 생의 질곡과 고난을 감내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이 필요하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서는 어떤 자아 실현도 이룰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시인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황폐한 삶의 질곡을 견디겠다는 마음가짐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이러한 견인주의적 인생관을 우포늪에 핀 가시연꽃을 보며 다시금 확인한다.
늪은 흐르지 않는 물이다. 늪에 고인 물은 고여 있음으로써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는 물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고여 있음을 안주의 욕구가 아니라 존재 고양의 의지로 해석한다. 세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나이와 세월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의식과도 통한다. 늪은 일반적인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면서도 생의 숨은 진리를 역설적으로 가르쳐 준다. 물은 흐를 때만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물은 자신의 몸을 늪에 가둠으로써 흐름을 향한 과도한 자의식을 누그러뜨려서 헛된 욕망과 집착을 버린다. 그때 비로소 오래 전부터 이미 제 몸 속에 존재해 있던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늪은 죽은 물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생명의 물로 변용되고 있다.
원시의 빗방울은 큰 바다의 거센 물결보다 더 근원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지닌다. 세계를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 방울의 물이 필요하다. 이 강력한 꿈꾸기를 위하여 근원적 시공에 맞닿은 한 방울의 물을 발견해야 한다. 시인은 작디작은 물방울, 그 始原의 세계에서 자연과 인생의 무궁무진한 화해 가능성을 읽어낸다. 萬有의 항구성도 거기에서 태동한다. 이것이 연꽃 한 송이를 향한 꿈이다. 물은 연꽃 한 송이를 피우는 꿈을 위해 1억 4천만 년을 견디어 자신을 단련시켰다. 제 몸 태워 깨달음으로 향하는 소신공양처럼 늪은 모든 불순한 것들을 제 속에서 삭혀 제 몸 스스로 썩어간다. 아니 썩음이 아니라 생성이다. 그 공간에는 大母性的 질서가 있다. 그것은 공간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아스라한 고도에 이른 위기의 시의식은 가장 탄력적인 장인정신과도 상통한다.
늪이 기나긴 光陰을 견디어 존재하듯, 화자 자신도 무정한 세월에 맞서며 마음을 오직 한곳에만 모아 아름다운 가시연꽃을 닮은 위기의 꽃을 피우고자 한다. 그 꽃은 원시의 빗방울을 향한 위험천만한 황금분활의 꽃이다. <처용>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천년의 시간이 흘렀고, 우포늪이 탄생한 시간으로부터 사 오천 만년이 흐르면서 퇴적되어온 우리 인류의 先驗的 상상력이 피워 올린 예술이다.
이제 정숙 시인은 밀폐된 공간에서 한 번 연소한 뒤 암흑의 깊은 잠을 깨고 나서 더 딴딴하고 무서운 불이 되는 치열성과, 사 오천만년 전부터 우포늪에 퇴적되어 지구의 생성 비밀을 홀로 간직한 채 가시연꽃을 피워 올리는 겹겹이 쌓인 물이 서로 상응하면서 이룩하는 광막한 시세계의 입구에 이제 막 들어서고 있다. 그가 첫 시집에서 노래했던 處容의 방언은 이 세계의 입구를 알려주는 솟대 위에 부는 바람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리고 무수한 광음을 견디고 가시연꽃을 피워 올리는 우포늪은 시인 정숙의 숙명적 그리움을 상징하는 깊고도 깊은 시의식의 深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하석의 평
 
 
'줄 듯 말 듯 늘 얄랑거리기만 하는 파도'로 뒤척이며, 언제나 '무명소복을 입은 어둠'과 싸우는 것이 정 숙의 시다. 한국여성이 갖는 삶의 한계를 넘나드는 그녀의 가쁜 숨을 이로써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남자에게, 때로는 가족에게, 때로는 역사에게, 때로는 그 자신에게 딴죽을 거는 그녀의 태도는 수줍으면서도 당당하고, 활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너그럽다. 요리 솜씨는 또 얼마나 훌륭한지, 지지고 볶는 가운데 식칼은 번득이고, 죽임과 죽음의 인식이 잡탕의 냄비 안에서 자욱하게 끓으며 융화된다. 그녀가 차린 관능과 욕망으로 열린 식욕으로 풍성한 식탁. 그 관능과 욕망의 안에 '푸욱 푹 썩어 늪이 되는' 한의 마당을 열어놓고 바깥을 내다보는 게 정 숙의 시세계이다.
 
 
이 태수의 평
 
경상도 방언을 신라시대의 표준말이라며 처용 아내의 입장에서 인간평등을 부르짖은 정 숙의 첫 시집‘신처용가’ 이후 그 다음 시집 내용을 무척 궁금해하는 이들의 얘길 자주 들었던지라 이번 ‘위기의 꽃’ 제 2시집을 읽으면서 위기의식을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아 점점 더 원숙해진 사고력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정숙 특유의 치열성과 내면성의 깊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의 형태들이 무척 다양해서 단시뿐 아니라 꽁Em 같은 내용의 시들은 짓궂으면서도 재미있는 가하면 또 단편소설 같은 작품이 있어 정숙의 묘사력에 박수를 보낸다.

 
 
 
 
 
 
 
 
 
 
 
 
 
 
 
 
 
 
 
 
 
 
우포늪에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사오천 만 년 전 낙동강 한 줄기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분명히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제 속에 썩혀서 어느 세월엔가
연꽃 한 송이 꽃피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조상의, 조상의 뿌리를 간직하려고
원시의 빗방울은 물이 되고
그 물 다시 빗방울 되어 떨어져 물결 따라
흘러가기를 거부한 늪은, 말없이
흘러가기를 재촉하는 쌀쌀맞은 세월에
한 번 오지게 맞서 볼 작정을 했던 것이다
때론 갈마바람 따라 훨훨 세상과 어울리고저
깊이 가라앉아 안슬픈 긴긴 밤이었지만
세월을 가두고
마음을 오직 한 곳으로 모아
끈질긴 가시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뚫어
오바사바 세월들이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기어이
사랑홉는 가시연꽃 한 송이 피워내고 만 것이다
 
______고단 마사매 命人 브리압디 미륵좌주 뫼셔롸[도率歌]
 
 
1
 
 
 
 
미루나무와 담쟁이
 
도난당하고 있었다
미루나무는 지
삶을
야금야금 훔쳐 먹는 담쟁이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방관자가 되었다
솔직히 처음 그들이 슬쩍 발을 걸쳤을 때는
반가웠고, 외롭던 참에 당연히 손 내밀었다
얄궂게도 차츰 밟고 오르면서
그의 삶을 조금씩 훔쳐가기 시작한 것이다
무리를 지어, 수만 개의 손으로
그의 얼굴을 지우면서 머리끝까지 올라가
생긋이 미소 지으며 담쟁이는
더 밟고 올라갈 곳을 찾느라
두리번두리번 세상을 향해 손 흔들고 있었다
여름 이파리들이 하마 노랗게 떨어지는데
한 발 양보가 백 발 양보라는 거를 미루나무는
진작 몰랐던 것이다
아매도 늦은 밤 불면의 파도에 시달리며
지금쯤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겠지
소사스레 담쟁이는 인제 옆 나뭇가지를 향해
애처로이 손 내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애써
누군가를 저리도 막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가?
어린 왕벚나무와 하늘이 대책 없이
방관자인 것이다, 다만
바람이
가끔 부르르 떨며 나무를 흔들다가 갈 뿐,
그래도 나무는 덩굴이 떨어질까
지 발등에 심줄 세우며 떠억 버티고 서 있었다
 
_____마사매 부드루 그리살반 부텨뎐에 전누온 모만 법계맛다록 니르가라[보현십원가]
2
 
 
 
 
 
참사랑
 
 

예수의 거웃 가리려고
바둥바둥
십자가를 진
작은
천 조각,
 
聖衣!
 
 
 
------남 그즈지 얼어두고 밤에 몰안고 가다 [서동요]
 
 
 
 
 
 
 
 
 
봄비
 
 
옥황상제님 처용 색시캉 거시기 황감했던지
간밤에 비 흠뻑 내맀어예
바람도 없이 봄비가 촉촉히, 아주 촉촉하게
가뭄에 쩍쩍 갈라졌던 논빼미 새로
논고디가 타는 갈증을 적시디예
3년 과수 꼬장주도 젖어 신나게 쌕쌕카는데
오래뜰 쓰는 싸리비의 휘파람 소리 흥겨버
추녀 끝 밀고 옆의 옆 홀아버니 댁
흙담 밑 홀아비좆을 사알살 간지리데예
봄비!
니, 니, 그 칼래?
 
 
 
--------정 둔 오날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만뎐춘]
 
 
 
 
 
*오래뜰; 대문앞의 뜰
*홀아비좆; 쟁기의 한마루의 위 멍엣줄이 닿는 곳에 가로 꿰어
아래덧방을 누르는 작은 나무
 
 
 
 
 
 
 
 
 
 
꼬냑여자
 

 
꼬냑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
장밋빛 살결
세월이 더할수록 톡! 쏘면서
화악! 달아오르는 고 맛깔
긴 시간 내성으로 빚어
단내 나지 않는
향그러움으로
목석 같은 그 가슴속
불, 찔러버리고
확, 불 찔러버리고
저마저 활활 태우는 한 잔의
꼬냑!
비록 순간일지라도
 
---------아으 그릴사람 잇다 삷고 샤셔[원앙생가]
 
 
 
 
 
 
 
 
 
 
 
 
 
 
 
 
 
 
 
낮달
 
---달빛 여자 1
 
한 생애
 
제 빛깔, 제 소리 다 지우고
 
하늘 그늘 뒤 그림자로 숨어서
 
 
늘 머뭇거리던 내
 
*어무이,
 
서글픈 그 *영가
 
 
 
*어머니 *영혼
 
 
 
 
 
1
 
 
 
 
 
 
 
 
 
 
 
 
월광 소나타
-----달빛 여자 2
 
 
물너울이 살 비늘 툭툭 터뜨리며
피아노 건반 몸살 나도록 두드리는데
 
그 여자
흐드러진 제 꽃잎 씻어 내리고 있다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그 고랑 깊은 선율의 되풀이에 휘감기면서
 
그 사이
까아만 씨앗 하나가 눈을 뜬다
 
그 시간, 먼 산속에서 곰 한 마리
 
달을 덥석 문다
끝내는 *붑괴어 어쩔 줄 몰라 컹컹 울부짖으며
 
*끓어 뒤섞이어
 
 
2
 
 
 
 
 
 
한 여름 밤의 몽상
-달빛여자 3
 
달빛도 잠든 밤
외진 산길 나무들의 촉수와 더듬이를 깨우는
개구리 울음
그 속엔 볼그스름하면서 봉긋한 그러면서 솜털 뽀송뽀송한
젖가슴, 수밀도가 스며들어있다
 
저 마돈나의 밀실이 촛불 켜고
관능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지 *쓰렁쓰렁
꽃뱀의 비늘들이 죽은 제 혓바닥 다시 깨워
산의 밑뿌리에서부터 *발싸심하기 시작한다
 
그 뜨거움의 힘으로 산은 불쑥불쑥 자라고
하루살이처럼
그저 바람 따라 울고 웃었을 뿐인
나뭇잎들은 제 스스로 삶에 지쳐 단풍이 먼저 들기도 한다
 
*남모르게 비밀히 하는 모양 *몸을 비틀면서 비비적거리는 짓
 
 
 
 
3
 
 
 
 
 
 
 
 
 
 
연꽃
 
-蓮 1
 
 
 
바람에 쉴 새 없이 몸 흔들리면서도
 
시린 발 견디며 진흙을 밟고 서서
 
곧 사라질
 
목숨,
 
이슬방울을
 
잠시라도 햇살에 한 번 더 빛나도록
 
소중히 떠받들고 있다
 
 
 
 
4
 
 
 
 
이슬 염주
 
---蓮 2
 
 
 
진흙 갈퀴에 발목 잡혀
오직 하늘 우러르고 있을 뿐
 
밤새 손 벌려 무슨 간절한
발돋움하고 있으면
 
그 아침 이슬방울 모아
햇살이
백팔 염주를 꿰고 있다
 
 
5
 
 
 
 
 
 
 
 
 
 
 
눈물이슬
 
 
----蓮 3
 
 
헐벗겨진 몸, 썩은 냄새나는 뻘에 파묻혀
진종일 흐느끼며 오래 서 있어본 이가
하찮은 이슬방울 안고도
*낮결에 몸 내어줄 줄 안다
 
시린 발 견디며 별들이 어둠 속 길 내느라
밤새 빛, 굴리는 소리 들어본 이가
다른 이들의 눈물방울
햇살에 빛나도록 떠받들 줄도 안다
 
*한낮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6
 
토란잎이
-蓮 4
 
양지바른 언덕 비탈에 서서
*해껏 바람과 햇살을 쫓아다니느라
이슬방울 또는 여린 눈물방울들
제 몸에 떨어지기 바쁘게 또르르 굴려버리며
 
한 방울 생의 흔적 남기지 않고
흙바닥에 맵차게 떨어뜨리면
 
금세 사라져야 하는 이슬과 눈물들이
목마름과 깊은 상처에
향기로운 새살 돋아나게 하는 힘 있다면서
실은 말라가는 제 발등 적셔주기 바쁜데
 
그 살찐 허리 굽혀 이슬염주 꿰고 있는
연못 내려다보라는 뜻인지
댕댕이 줄기가 칭칭 매몰차게 감아 오르며
 
*해가 질 때까지
 
 
 
7
 
 
 
 
 
 
두부
 
-불의 여자 1
 
 
 
내 업장도
자꾸 갈고 익히면 저리 *나스르르해지는가
 
얼마나 속이 더 문드러져야
누구에게나 *숫접은
 
살보시로
새로 태어날 수 있는가
 
 
*부드러워지다 *순박하고 진실한
 
 
 
 
 
 
8
 
 
 
 
 
 
 
 
 
 
시, 를 위한 광시곡
 
-불의 여자2
 
 
 
어느덧 끝이 무뎌져버린 남자가 아닌
다른 이의 힘찬 펜촉이 몸속 흔들면서
백지에
빗금, 마구잡이 긋기를 몰래 꿈꿔
앙큼스런
 
뭇 사내들이 제 펜촉을 밤낮으로
담그고 싶도록 섹시그리한
잉크통
 
그리하여
함께 친 빗살무늬
거미줄에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
가슴 진저리치게 하고픈
 
그런 시 한편 건지고 싶어 *어러이
가슴에 불붙은 저 여자
 
 
*미치도록
 
 
 
 
 
 
 
 
 
 
 
깊은 상처가 때론 빛을 키우는가
 
-----늪의 여자 1
 
 
진주조개는
어쩌다 뛰어 들어온 모래알, 뱉어버릴 수 없는
그 상처 가슴에 안고 살아가면서
쌓이는 *외쪽생각의 시간과 손잡고
뱉어내려고 몸부림치다 치다가
그냥 끌어안고 같이 되새김질하며 뒹굴며

미운 정 고운 정 서로 자리다툼하다가
사랑이라는 얄궂은 운명 속으로 갇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빛을 발한다
 
흙에 묻힌 항아리가 김치를 익히듯이
캄캄한 지하 창고가 포도주를 익히듯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고
늪이 되어 제 *다솜을 고이 키운다
 
* 짝사랑 *애틋한 사랑
 
 
 
 
 
 
20
 
 

 
 
 
 

뿌리에도 땀방울이 있는가
 
---늪의 여자 2
 
이제사 눈이 뜨이는지
아침 산책길, 벚나무에 옹기종기 앉아
하늘 우러러 기도하는
하얀 봄들이
꽃이 아니라 새삼 뿌리의 땀방울로 보인다
봄을 꽃피우기 위해
겨우내 어둔 땅 속에서 곡선으로 서로 엉켜
다독이다가, 뾰족한 돌멩이를 끌어안거나
직선으로 무작정 바위를 뚫으면서
온갖 몸부림치며 불을 지폈을 텐데
결코 나서서 생색내지 않는 걸 보면서
이 봄, 캄캄한 내 어둠을 뭉쳐 언젠가
자잘한 풀꽃이라도 피워
속눈썹 밑
불 밝혀보리라 발가락 끝에 힘을 줘본다
이제껏 뿌리 없는 꽃이라도 피우겠다고
마른 나무 가지에 매달려 허둥거리던
내가,
 
 
 
 
21
 
 
 
 
 
 
 
 
 
 
느티나무
 
----늪의 여자 3
 
옛 *어매들은 거의
가슴에
사리,
몇 알 품고 사셨지
 
청도 운문사 입구
속 다 비우고 비워 맨 살로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는
해묵은 나무,
바람에 열린 치맛자락 맡기고 서 있는
실루엣 뒤로 반짝이는 저
보석, 살아있는
사리탑
 
*노루꼬리만한 *한 뉘, 속 파서 내게 다 먹이느라
점점 빈 껍질이 되어 가시던
 
어머니
 
 
*어머니 * 짧은 *한 생애
 
22
 
 
 
 
 
 
 
*초조 [初潮]
 
------- 석류 1
 
열다섯 딸아이의 젖망울
부풀어 오르다가
철없이 뜨거운 여름 기운 이기지 못하는가
 
어느 날 기어이 붉어지는 속 보여 줄까봐
옳게 여물지도 못하고
가슴 긁혔다고 짙붉은 울음보 터트릴까봐

멈출 줄 모르는 시간의 한 가지를 잡고
종일 어미는 살얼음판을 밟고 간다
 
 
*초경 初經, 첫 달거리, 첫 개짐
 
 
 
 
 
 
 
 
 
40
 
 
 
 
 
 
 
꽃뱀의 내력
 
--------석류 2
 
그 열매 속엔 뭔가 깨달은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제 알들을 품고 있는지
바깥세상에서 불고 있는
회오리바람에 대해 소곤소곤 얘기 들려주더니
 
그 알들이 제 비늘에 짙은 살빛 꽃물 들여
소슬히 바람 부는 어느 날
온 몸 꿈틀거리며 그 맛의 수위를 가늠할 수 없는
꽃뱀으로 눈뜨고 있다
 
 
 
 
 
 
 
 
 
 
 
 
 
 
 
 
 
 
 
 
 
 
수련
                
--모르스 부호 2
 
시어른과 쿵쿵 찹쌀떡 찧던 작은
돌 호박에
어른들 돌아가시고 집 정리하면서
 
층층시하 육남매 맏종부라는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의
그 미궁 속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물을 채우고 수련을 심었다
 
살벌하도록 문 꼭꼭 닫아건 꽃봉오리
다섯 개 오래도록 맺혀있었는데 그 중 한 송이가
어제 가슴을 먼저 열었다
 
열고나면 햇살 가득히 품어 안은 속
저리 곱고 붉은데
어둠만 끌어안고 서로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댄 건 아닌지 돌이켜보라는 듯
 
 
 
 
 
 
 
 
 
 
 
 
 
 
 
 
 
 
 
 
네 바다를 난 알고 있지
 
-흔들리는 여자
 

 
넌 밤마다 피 흘리고 있지 바다 밑으로 철길을 놓으려다가 파도에 밀려나고
부딪치면서 온 몸 상처투성이로 피 철철 흘리고 있지 그래도 다음 날 밤이면
또 *비뉘한 바다 품속으로 잠수하며
 
그러다 *무리무리 괭이갈매기 되어
 
끼룩끼룩 울며 하늘을 배회하기도 하면서
 
그런 모습 날마다 바라보는 난 어쩔 수 없어

흔들리고만 있지
해초가 되어 물결에 휩쓸리며
기러기 아빠인 네 울음소리 들어주는 것 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난 또 미치도록 흔들릴 뿐이지
 
그런 어느 날부터 깊은 바다 멀리서 칙칙 푹푹 기적이 이명처럼 들려오고 해저 터널이 뚫렸다며 밤마다 기차를 타고 손 흔들며 먼 수평선 찾아 어딘가로 떠난다는 걸 난 알고 있지 
*비릿한 *가끔 이따금
 
 
 
 
 
54
 
 
 
 
 
 
안동 간 고등어
 
--간이 밴 여자 [정 숙]

맛이 있다는 것은
간이 잘 들었다는 말인가
 
간이 잘 절여졌다는 것은
간잽이가
소금을 맞갖게 잘 뿌렸다는 말이겠지만
제 고향 바다를 떠나 그 골짜기까지
험하고도 먼 길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보니
그 성깔, 생 속 다 죽이고
저절로 푸욱 절여져 나긋나긋 짭짤한
그 맛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무심히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과 터진 생채기에
덧씌워 뿌리는 사람 사이의 소금 말고는
매정스런 칼바람에다 살과 살 부딪히는 비린내와
뒷골목 썩은 냄새나는
삶의 현장만한
간잽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입맛에 바로 맞게
 
 
 
55
 
 
 
 
 
 
 
 
 
 
 
 
 
바람祭
 

 
누가 터뜨리고 있는가 바람과 불빛으로 한평생 낡은 내 한 벌 부대자루 속의 숨은 혈관을
 
 
 
 
 
 
 
 
 
1
 
 
 
 
 
 
 
 
 
 
 
 
 
 
 
폭풍의 언덕

그 고열 얼마나 더 견뎌야
한 점 불빛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저 하늘과 땅의 입시울들이 쏟아내는
슬픔의 불화살들을 보아라

 
 
 
 
 
 
 
 
2
 
 
 
 
 
 
 
 
 
 
 
 
풍차
 

삐거덕삐거덕 버리고 싶은 제 삶의 낡은 유산들을 시절 없이 돌리고 있다
 
 
 
 
 
 
 
 
 
 
 
 
3
 
 
 
 
 
 
 
 
 
 
 
 
 
학은 함부로 울지 않는다
 
 

 
 
밤 내내 제 깃털에서 뽑아내는 실로 하늘울음 깁고 있을지언정
 

 
4
 
 
 
 
 
 
 
 
 
 
 
 
 
 
 
 
 
샐비어스카프
 
 
 
 
노을 지는 하늘에 누가 실바람 꿴 햇살바늘로 첫 서답 빛 꽃무늬를 수놓고 있느냐
 
 
 
 
 
 
 
 
 
 
 
 
5
 
 
 
 
 
 
 
 
 
 
갈대 소네트
 

 
 
 
 
 
껍질뿐인 한 생애였다며 해-껏* 지치고 젖은 내 마음의 흰 뼈, 늦가을 까치놀**에 말리고 있구나
 
 
 
*해가 질 때까지 **멀리 석양빛을 받아 수평선에 희번덕거리는 노을
 
 
 
 
 
 
 
6
 
 
 
 
 
 
 
 
 
 
 
타조풍으로
 
 
날개가 있다고 다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날개가 없다고 날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날개가 있다는 것은 날아오를 수 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급전직하하여 더 비참하게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도 끝내 날아갈 수 없어서
 
하루하루 그 슬픔의 무게가 목을 점점 더 길게 늘여가고 있는
저 지상의 사람들을 보아라
 
날 수 있다고 하늘이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리라
 
 
61
 
 
 
 
 
 
장미, 날개 파닥이다
 
 
핏발 세운 저 가시는 날개의 뼈대가 아닌가
 
가느다랗게 남은 날갯죽지, 그 기도 얼마나 간절했기에
깃털들 저리 깔쌈하게 돋아난 것인가
 
이미 오월바람과 눈 맞아 진홍빛 깃털 활짝 펴고 날아다니느라
아침부터 생글거리는 표정 심상찮다
 
 
 
 

62
 
 
 
백지, 흰 어둠을 받쳐 들다

 
왜 이리 무거운가
티 없이 맑은 이 한 목숨하늘이
 
잠 못 드는 밤 A4 용지 한 장에 동공 빛을 모으면 희디흰 뼈와 뼈 틈서리가 차츰 열리면서 검은 그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찢기고 짓이겨지는 고단한 한 생의 비명이 어둠속에서 어둠을 밟고 다가온다 저 하얀 눈부심 아래 얼마나 많은 눈빛이 젖어 빛나고 있는가
 
젖은 그 무게 때문에 세상 그림자 하늘이 저리도 어두운가
어둡다 못해 오히려 희게 보이는가
 
그 흰 그림자의 뼈마디가 저 어둔 눈빛 위에서
연꽃을 피워 올리는가

63
 
 
 
 
 
고사목을 노래함
 
 


 
고사당하도록 제 등허리 파먹는 재선충 장수하늘소 애벌레, 그들은 소나무 자신이 겨우내 보듬었던 품속에서 우화했다는 그 사실 뻔히 알면서도 늙은 바람에게, 또 벌레들에게 다시 마지막 몸집까지 내어준다
 
 
 

 
 
64
 
 
 
 
 
 
 
 
저 눈발은 왜 강물로 뛰어드는가
 
 
 
 
 
뭔가 깨달은 것 있어 강물로 뛰어드는가
 
저 높은 자리에서 근엄하게 위엄의 빛 뿌릴 수도 있을 텐데
 
목마른 이의 물 한 모금이라도 되어 보시하며 사라지려는가
 
천년이 지나도
돌부처는 제 모습 다 지워 버리지 못하는데
 
 
 
 
 
 
 
 
 
 
 
 
 
65
 
 
 
 
 
 
 
 
 
엘리베이터 사랑
-할아버지와 손자, 상사와 부하 직원, 시어머니와 며느리

 
 
 
누가 빈 허공 바닷물을 되질하고 있는가
 
스승과 학생
서로 지켜야 할 수직의 위엄
층계 따라 육신의 무게 더 싣거나
욕망의 짐 덜어 내리기도 하면서
 
적절한 관계 끊어지지 않도록 애정의 수하물 싣고
오늘도 끝없는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 한다
 
 
 
 
 
 
66
 
 
 
 
 
 
 
 
 
 
 
 
 
세상, 참 캄캄한 불행이여
 
---태안에게
 
 
 
맛조개, 키조개, 피조개 해초들의 낙원에서 잘 타고 있는 생명의 숨결 꺼 버리는 검은 불기름도 있남유?
 
그래서 눈알 빠졌나유?
왜 이리 세상 캄캄한 거지유?
 
 
 
 
 
67
 
 
 
 
 
 
 
 
 
 
21세기 유비쿼터스* 남자
 
 
누드 첼리스트 ,나탈리 망세
그녀의 허벅지계곡에 갇혀
부르르 부르르 떨고 있는
저 악기
등뼈 무너뜨리는 그 전율이 지금
쌀밥꽃 고봉으로 허옇게 피어나고 있는가?
 
 
 
* ubiquitous 어디에나 있는
 
 
 
68
 
 
 
 
 
 
 
 
 
 
 
 
 
 
 
 
 
 
 
 
연꽃길 찾아서
 
 
 
처마 끝 고드름이 하늘과 험한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길 발원하며,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해 산목숨의 죗값인 삼독삼착三毒三捉의 결정체를 모두 녹여 내린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 일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
 
69
 
 
 
 
 
 
 
 
 
 
 
흰 소의 울음징채를 찾아
 

딸아, 네 몸도 마음도 다 징이니라
 
한 번 울 때마다 둔탁한 쉰 소리지만
그 날갯죽지엔
잠든 귀신도 깨울 수 있는 울림의
흰 그늘이 서려 있단다
 
 
살다 보면
수많은 징채들이 네 가슴 두드릴 것이니
봄눈 이기려는 매화 매운 향이
낙엽까지 휩쓸어 가려는 높새바람의 춤이
한파를 못 견디는 설해목의 목 꺾는 울음소리가
 
이 모든 바람의 징채들이 너를 칠 것이나
그렇다고 자주 울어서는 안 되느니라
참고 웃다가 정말로 가슴이 미어질 때
그럴 때만 울어라, 울고 울어
네 흐느낌 슬픔의 밑뿌리까지 적시도록
징채의 무게 탓하지 말고
네 떨림의 소리그늘이 은은히 퍼져 나가도록
 
눈 내리는 이 밤, 아버지
그 말씀의 거북징채가 새삼 저를 울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햇빛 한 단을 내려놓는다
 
 
 
연푸른 햇잎이 돋아나고 꽃을 피워야 할 때는 짜그락짜그락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햇살이고 곧 날개였다
 
이제 그 날개 잃은 할머니, 누더기에 작은 괴나리봇짐 하나 지고
나의 살던 고향을 하모니카살구꽃으로 찾아간다
 
혜화역 4번 출구 지하도
 
또르륵 똑똑 빈 깡통 굴리는 동전 소리에 한 생애가 시든 개살구 빛으로 저물어 간다
 
 
 
 
 
 
 
55
 
 
 
나팔꽃
 
 
 
십일월, 때늦어 싹트고 보니 어느새 찬바람이 분다. 이미 식어버린 햇볕의 열정, 줄기 뻗어 그늘 넓힐 욕심보다 볼품없어도 서둘러 꽃잎부터 피운다.
그 나팔 소리 하도 가늘어 행여 서릿바람 든 어느 누구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선풍기랩소디

 
 
 
어느 꽃잎살결 보드라이 안고 있을 바람끝은 어디메더뇨 어린 바람의 왕자가 장미가시에 물 뿌리고 있을 그 먼 사막은 또 어디던가

따지며 어르고 보챈다 성내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날파람 속바람 길들이느라 허덕허덕

바람의 오르가슴을 향해
온몸 허리 엉덩이 돌리고, 달려가고 있다
 
 
 
 
 
 
 
 
 
 
 
 
 
 
 
 
 
바람 바다를 서서 걷는 남자
 
 
너, 무슨 업業이 그리 많으냐 모래사막을 건너려면 모자챙이 넓어야 하는데 그 챙의 넓이에 여러 목숨 달려 있는데
 
너만 잠시 쉬어 갈 세상 의자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서서 걸어가야만 하리
 
말이 있어도 끝내 타지는 못하리 그 자리에 그냥 서서 가장은 한평생을 끌고 가야만 하리
 
그 뒤를 줄줄이 어린 낙타 한 마리씩 타고 마파람에 불려 오는 가솔들, 그들 남루를 이끌고 오늘 밤 안으로
 
오아시스를 찾아야만 한다 모래폭풍이 또다시 휩쓸어오기 전에
 
 
 
 
 
 
 
 
 
 
 
 
 
 
 
 
거친 바다, 누구 삶의 돛이었던가
 

 
 
 
제 지붕 밑 숟가락 젓가락의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위해 세찬 세상바다 파도 헤치는 그의 돛대, 시시로 흔들어 재끼는 높새바람 사납다
 
그 바람막이가 되어 주느라 어부의 닻이고 돛이었던 여자, 제 몸 다 낡아 버려지는 줄 모르고 허공바다 물질하러 뛰어드는가
 
바람에 밀려나면 또 뛰어드는 그녀의 늙은 고무신 한 짝이 정박당한 낡은 어선에 부딪쳐 다시 밀려왔다 간다
 
 
 
 
 
 
 
봄바람을 위한 소네트


 
 
 
 
어제 묻지 마! 관광버스에서 불어온 봄바람 춤바람 아직도 살랑살랑 품고 싶은지 두 가랑이 틈에 숨어 있는 바람언덕, 꽃잎 페달을 밟지 않아도 육박자 지르박으로 세상춤판 잘도 돌아간다
 
 
 
 
 
 
 
 
 
 
 
 
 
 
33
 
 
 
 
 
 
 
 
 
 
 
 
 
 
 
통, 통, 술통, 젖통 공장장은 지금
 


 
아지랑이 속 거미줄에 아가 울음소리 새싹으로 걸어두기도 하면서
난질 든* 저, 여자
 
세월파도에 씻기며 제 살 깎이느라 마지막 젖통도 씨앗통도 다 뺏겨 버리고 훌훌 몸세상 털어 대고 있는가
 
흔들리는 바람명줄 타고 앉아 통통, 슬픔의 술통 빚으면서
 
 
 
* 바람 든
 
 
 
 
34
 
 
 
 
 
 
 

 
 
 
 
 
 
기둥서방을 위한 발라드
 

 
오십 평생 밧줄을 타고 고층빌딩 창유리 닦아 주느라 한 번도 생의 중심이 되지 못했던 그 여자,
 
늘 새로 피어나는 꽃잎 주전부리나 일삼는 그 노가다 사내가 자신의 기둥이라며
 
그의 녹슨 숟가락길 닦기 위해 안차게* 목숨밧줄 타야한다며 오늘도 허공 사다리 천둥지둥 밟아 오르고 있다

*겁 없이 야무지게
 
 
35
 
 
 
 
 
 
 
 
 
 
 
 
 
 
 
 
풍장, 저 정든 미라
 

 
 
살비린내 살랑이는 난바닷바람에 아직도 제 몸통 다 비우지 못했는가
 
몰래 갈비뼈 속에 숨겨둔 서동서방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은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어금니 내보이며 고장나버린 배꼽시계만 돌리고 있다
 
 
 
 
 
 
 
 
 
 
 
 
 
 
 
 
 
 
 
 
못 삼키는 여자
 
못 삼키다니요
집도 사람도 못이 박혀있어야
허세 유지하며
꽃을 붙잡고 제 하늘을 담아둘 수 있는데요
전 그 못을 삼키며 젖가슴 부풀리지요
속 할퀴는 말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가시눈빛들이
살아야 할 힘을 불러일으키는
피눈물 밥이 되거든요
잘게 부수어 삼켜도
다시 삼켜도
언제나 팽팽 일어서는 못과
저 벽, 못을 삼키는
벽속에 핀 꽃들
 
 
 
 
 
 
 
 
 
 
 
 
 
 
 
 
 
 
 
터널 속에서
 
1.
 
그 누구신가요?
 
끝 모를 그리움을 찾아 나서거나
한 끼 가족의 풀칠을 위해
가파른 팔조령 호랑고갯길 무작정 달려야 하는
 
눈에 불을 켠 저 배고픈
치타들에게
막힌 생 몸뚱아리 뚫어 지름길 내어주는
당신은
지상의 청정법신이신가요
 
2.
 
바삐 가던 길 멈추고 그 어둠 그늘에서
생의 뒤안길 되돌며 머뭇거리는 내게
 
밥 한 공기 땀방울 눈물방울 소리 없이 씹고 있던
지난 시절 어린 감꽃 꿰어
목덜미에 걸어주던
 
아버지
그 분이
바로 당신이신가요
 
 
 
 
 
 
 
 
 
세상에서 가장 큰 산을 지고 온 여자
 
 
깊이도 넓이도 끝도 알 수 없는
세상 어둠산을 통 채로 이고지고
 
파도와 맞서 깨지고 자빠지느라
그래도 다시 일어서야 하느니
이 악물면서
 
당신 곪아터진 상처 돌아볼 겨를 없던
아흔 다섯 고사목 내 어머니
 
마지막 더 캄캄한 길도 당당히 걸어가겠다는
이 땅의 아줌마이길 고집하는
저 산 같은 여자
이.
봉.
화.
 
 
 
 
 
 
 
 
 
 
 
색파라치 파파라치

 
 
살몃살몃 어깨살 내민다
안보는 듯 슬쩍 훔쳐보다 찰칵!
내 눈카메라 속 눈부처가 떠오른다
옅은 미색의 속살 솜털을 주춤주춤 비친다
목젖이 보일락말락
핼쓱하다
그럴수록 더 기다려야 한다
하루, 이틀 ,사흘
드디어 하반신 속살 열어놓고
야릇한 밤 향기 까지 솔솔 뿜어댄다
엔젤 트럼팻,
찰칵!
찰칵! 색의 역사는 그 꽃잎 속 암실에서 시작된다
내 시어의 심장이 옷을 벗는다
꽃은 철저한 저 스토커 시간을 끌어안아
제 몸빛에 입힌다
빛살 한 점에서 찰칵!
드디어 타오르는 어둠을 살려낸다
 
 
 
 
 
 
 
 
 
 
 
 
번개탄*, 저 봄 햇살
 
 
 
 
내 한 몸 불살라
겨울 나목들 암실숲에
얼어붙은 정담에 불붙일 수 있다면
 
그 불씨로
섬과 섬, 얼음벽 사이
푸성귀로 시장 난전을 연 할머니 굳은 어깨에
들불산불 일으켜
산경표 서 있는 길 태워버릴 수 있다면
 
해종일 제 발가락 촉수들 깨워 일으키느라
서산마루 땅거미 다가서는 소리 모르는
저, 느리게 피어나는
봄 햇살
 
 
 
*연탄에 불 붙여주던 탄
 
 
 
 
 
누드 투시
 

 
48킬로그램 저 여체
깊이도 폭도 모를 카오스 어둠 도사리고 있는
 
제 몸꽃 스스로 열어
폭죽 터뜨리기 욕망에 늘 꿈틀대는
 
궂은날 태풍으로 모두 떠내려 보내기도 하는
바다파도 다스릴 오묘한 힘 샘솟는
 
열아홉, 저 꽃하늘
지금 막 허물벗기 끝내고 눈 뜨는
 
 
 
 
 
 
 
60
 
 
 
 
풍화론
 

 
경북 경산군 자인면 까막새
물레방아 쿵덕쿵덕 잘 돌아가던 그 시절은
달빛이 사과밭에 하얀 나비 떼 날리기도 했었지
과원 꽃의 거친 숨소리에
물소리 바람소리 서로 어울려 몸 비비 틀며
물레방아 곧잘 찧고 있었지
 
서성거리며 구경만 하던
나는
해 다 저문 지금도
저 껌껌한 빈 봉지 속으로
샅바람 불어주기만 기다리고 있는가
낡은 사지 노을에 추욱 늘어뜨린 채
 
 
 
 
61
 
 
 
 
 
 
 
 
 
 
 
 
 
첫사랑은 무선전화기를 타고
 
 
장마철 지나며 젖은 육신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시들어버린 바람의 뻘바닥까지
주욱 늘어서서 모처럼 나온 햇살에
샅샅이 문초 당한다
전생에 지은 죄 깡그리 불라고
 
얼결에 결혼 직전의 자줏빛 불망 원피스가
뭔가 뚜 뚜 뚜 신호를 보낸다
하마 오래전에 충전이 끝나버린 그가
어딘가 살아남아 있었던가
끈질기게 타전하고 있다
 
풍장 기억들 빨리 재충전하라는가
여름소나기 속 그 원두막 잊을 수 없다는가
오늘도 과수원 둔덕 밑 그 날의
사과 꽃바람이 살살 불두덩을 쓸어대고 있다
 
 
 
62
 
 
 
 
 
 
 
 
하나님만 늘100점인가
 

 
젊은 유골 한 쌍이 반만년 동안
꼭꼭 숨어 있었단다
에곤 쉴레의 '포옹'이란 그림처럼 전라의 남녀가
상반신 뜨겁게 끌어안고 있었단다
누군가는 욕망의 분출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풀길 없는 공허감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근육질 남자와 에로틱 여자의 몸매에서
금단의 향내 흘러내린다
온몸마음 달아오른 그들에겐
캄캄한 지하 밀실이 오히려 유토피아 그 아니었을까
어쩜 하나님의 노여움 피해 숨어든
어느 천사들의 동굴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금기의 선을 밟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해 숨어버렸겠는가
어쨌든 전자 칩에 갇혀 사는 현대인보다
불길 꺼뜨리지 않고
영원히 젊게 사는 길 먼저 찾은 그들은 바로
110점 인생 아니겠는 가
 
 
 
 
63
 
 
 
 
 
 
한밤의 초인종을 누질러주세요
 


술 한 잔 거나해져야 한번 울린다 한밤중, 우리 집 초인종그 남자는
 
아무리 동동 발 굴리며 울려도 녹슨 문은 쉬 열리지 않는데 그 마른소리의 틈 사이 모래알만 가득 들어차 있는데 아직도 눈 마주치면 안개꽃이 피어나긴 할 것인데
 
흥!, 밤물결에 뽑힌 깃털자리 먼저 보듬어야 상처 지워줄 수 있을텐데 한번 호~~~ 불어주면 모든 상처 다 아무는 입김일 텐데
 
길고도 짧은 시간, 많은 지상의 댓닢 서걱거리다가 떠난 뒤 고동껍질 속빈 바람소리만 그런 사소한 실랑이들을 일깨워주리니
 
어쩌랴! 따스한 눈길도 먼저 보내는 이가 즐거운 법이라고, 진분홍 루즈 입술로 덮쳐오는 '여봉, 오늘밤도 젖무덤 초인종 꼭꼭 누질러 주세용'
 
'니, 쥐 잡아 문 소리 할래? 고마 자라, 자!' 소리에 꿈을 깬다
 
 
 
 
 
 
 
 
 
 
 
 
 
 
당신의 추가 무거울 때면
-67
 
허구한 날 되풀이하는 일 뿐이라고
가장의 추가 무겁다고 떼버리지 마세요.
그 무게가 당신의 안방을 지키고
하늘과 땅을 받쳐주고
당신을 견디게 하는 힘의 원천이지요
 
그 연장이
시간의 맥박 재촉해서
내 자궁 속 썩히고 낡아가게 한다지만
그 떨림이 새싹을 이파리를 꽃을
화르르 피어나게 하는 힘대가리지요
 
시계추는 당신 몸지구의 중심이지요
 
 
 
 
 
 
 
 
 
 
 
 
 
 
 
 
푸른 녹을 닦으며
 
-부메랑 64
아파트 목요 장터에서 만난 생태 한 마리
내 허기계단 당당히 밟고 올라선다
때론 멸치 몇 마리가
한 줌의 풋나물이
수 십 년 내 목숨 계단을 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내 구린 입안에서 씹혀야 했던가
 
돌이켜 보니 아슬아슬하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한 끼 식사로
내 이끼 낀 이 눈물자리를 탐해
입방아 떡방아를 찧기도 했을 것인가
멀고 먼 시하늘이 단순한 계단이라기에
식은 죽 먹기라며 토끼 한 마리라도 잡으려
마구 오르다 보니
온 사방이 철조망이고 낭떠러지다
 
그 속임수 숨기느라 계단 모퉁이 마다 심은
장미꽃이 향기 품은 유두를 발기 중이다
하기사 남산 양지바른 곳이 모두 젖무덤인데
서로 먹고 물어뜯는 산 짐승들의
시발점도 종착역도 모두 무덤 없는 무덤일텐데
난 오늘도
하늘로 오르는 계단식당 문을 연다
밥그릇에 낀 푸른 녹을 닦고 또 닦는다
 
 
 
21세기 유비쿼터스* 남자
 
 
누드 첼리스트 ,나탈리 망세
그녀의 허벅지계곡에 갇혀
부르르 부르르 떨고 있는
저 악기
등뼈 무너뜨리는 그 전율이 지금
쌀꽃 고봉밥으로 허옇게 피어나고 있는가?
 
 
 
* ubiquitous어디에나 있는
 
 
 
 
 
 
 
 
 
 
 
 
 
 
 
 
 
 
 
 
레미콘
 
-----부메랑 50
 
그 울타리 안엔 두 고집이 거주하고 있어
늘 티격태격 소란스럽다
손 갈고리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 몸으로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붙임성아내
냉소적이면서 외톨이로 남으려는 모래알 습성
어머니, 그 껄끄러운 고부 틈에서
두 여자가 조화로워야
잠 편히 잘 수 있다며
그 남자 오늘도 제 몸 천천히 돌리고 있다
서로의 뿔 깎아
바가지 가루의 비율 알맞도록 섞어
이웃으로 향기 번져나갈 꽃밭 가꿔보자고
 
 
 
 
 
 
 
 
 
 
 
 
 
 
 
 
 
 
 
 
 
 
 
 
 
 
 
연꽃길 찾아서
 
 
 
처마 끝 고드름이 하늘과 험한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길 발원하며,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산목숨의 죄 값인 三毒독 三捉착의 결정체를 모두 녹여 내린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 일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
 
 
 
 
 
 
 
 
 
 
 
 
콘트라베이스
부메랑 31
 
 
저 몸집 큰 사내
퉁, 퉁, 퉁,
별의 은종소리 내지 않고도
몸 속 어딘가에 숨겨놓은 내 깊은 뿌리 뒤흔든다
 
생의 줄타기에 이미 무뎌진
제 몸뚱아리 어디서 그 떨림을 찾아내고 있는지
부푼 비눗방울 속에 든 눈알들
퉁, 퉁, 투둥, 퉁, 퉁, 마구 튕겨내고 있다
 
툭,
문득 지구를 깨뜨리는 일순의 정적
그 소리 행간에 못 하나 박으려
발등의 실핏줄 터지도록 떨고 서 있는가
 
 
 
 
 
 
 
 
 
 
 
 
 
 
누군가 일어서고 있다
 
-성냥 29
 
 
 
사월 아침, 속삭속삭 속살거리는 소리에
마른 바람이 눈을 뜨는가
귓불 간질이며 이처럼 솜사탕 녹여내는
귓속말 해준 이 언제 있었는지
 
생의 쳇바퀴 돌리는 일 잠시 멈추고
그 다정스런 입김에 젖어든다
봄비는 몸 바짝 다가서며 첫 정의 감촉
그 향기까지 감질나게 일으켜 세우다가
 
딱딱하게 굳은 내 몸뚱이
깊은 바닥에서도 뭔가 깨우고 있는지
온통 열꽃이 톡, 톡 돋아 오르는데
 
정원 한 쪽 담장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겹 살구나무 한 그루
어느 새 봄을 맞아들여 몸 비틀고 있다
분홍빛 날개 하늘하늘 꽃 피우며
 
 
 
 
 
 
 
 
기찻길을 훔치다
 
 
--성냥30
 
살다보면
그만 세상 기차에서 내려가고 싶을 때 자주 있다
그렇다고 쉽게 내려버리는 것도 비겁하지 않은가
 
산다는 것이
태어나기 전 이미 더럽힌 내 거울 닦는 일이라면
마음허리 결리는 것도 견디면서
묵은 때 말끔히 훔치면서
 
거울 속
제 모습 바로 볼 수 있는 때 기다렸다가
하차해야 제 흔적의 꼬투리라도 맑아질 것 아닌지
 
여행길이 길거나 짧거나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한 생의 씨알 여물게 맺으려면
그만큼 걸레질도 치열해야 할 터이니
 
 
 
 
 
 
 
 
 
 
 
호수 안 바람의 집에 깃들다
-바람다비 5
 
근엄하게 낚싯줄 드리우는 사람과 숨바꼭질하는 물고기, 잡고 잡히는 세상사에 갈바람이 넋을 잃고 물부레부들 그늘 속에 쉬고 있다
 
 
2
 
 
 
 
 
 
 
 
 
 
 
 
 
 
 
 
 
 
 
 
 
새벽 청소부
 
 
-성냥불 54
 
날마다 벽에 공 던지며
던진 만큼 되돌아오지 않아 뼈아픈
삶, 그 안타까움을
가까이 서로 지켜주며 다독이느라
 
미처 자라지 못한 날감지, 파닥!
파닥거리다 휘휘한
저 눈빛
쓸어 담느라 지친 사람들
 
 
 
 
 
 
3
 
 
 
 
 
사랑은 출구가 없다
 
--------미운 정 고운 정 서로 의지하던 며느리지팡이 그대로 선 채 잎을 틔운다
그 잎들이 하늘 오르는 길 비질한다
 
 
길 떠나기 전
흰죽을 수어 오라신다
흰죽을 먹고 가면 자손이 잘 산다더라 며
눈꺼풀 천근만근 들어 올리지 못해
젖 먹던 힘 간신히 몇 모금 삼키신다
 
어머님!
살가운 그 입김 군자란에 남겨
여전히 꽃피우며 물 뿌려 주실 거죠?
 
환하다, 문득
베란다에 등불 켜진다
만다라 꽃송이 길 환히 밝히며 내려온다
 
 
 
 
 
 
4
 
밤바다가 날개 펼치면
 
-------성냥 56
 
 
동성로 밤거리를 잠재울 줄 모르는
밤파도아저씨
싸구려 옷자락 펄펄 펼치며 날아오르기 직전
 
'자, 단돈 만원, 마----ㄴ원, 배추 한 닢이면
당신이 바로 꽃보살!'
 
제 몸 어딘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
날개 찾느라
몸부림치다가 울부짖다가
 
밥알 한 숟갈
그 아득절망이 살아야 할 질긴 이유 이므로
다시 퍼덕, 퍼덕 날개 펼쳐본다
 
그 순간만은 밤하늘 낮게 아주 낮게
별들도 같이 내려앉고 있다
 
 
 
 
 
 
누가 먼저 불붙이느냐
 
---성냥불 1
 
 
 
 
밤새워 온 몸 사른다
한 개비 성냥불 입에 문 초는
제 목숨 다 녹아내리는 줄 모르고
 
얼어붙은 샛강도 녹일 수 있는
불씨, 사람들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지만
 
누가 제 몸에 먼저 불붙이느냐
 
성냥 한 개비의 몸도 마음도
그 누군가와
온 전신으로 부딪혀야 불꽃이 피어나나니
 
남의 가슴에 불붙이려면
저 먼저 타올라야 하는 법
 
 
 
 
 
 
 
 
 
 
 
불의 씨.알을 찾아
 
- 성냥 2
 
 
 
한 세상 도화살 속을 파고들었다
제 불. 알 살리려 꽃잎화폭 짓이기는
너, 자폐아여
 
성냥 한 개비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산과 들 꽃밭에 마구 불 지르는
저 휘발유사내
 
살아있는
그 한 개비가 세상 태우는 폭약이 된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도
 
영원히 살아남는 길 찾은
피카소, 그 죽을 줄 모르는 씨.알
내 시폭에 뿌려 불을 당기고 싶다
 
 
 
 
 
 
 
 
 
 
 
 
 
발화점 되어
 
-----성냥 3
 
아무리 잘 익은 과일도
칼에 잘리고, 이빨에 갈릴 때
그 목숨 완성되는지
 
칼바람에 속살 베이고 잘 씹혀야
햇살과 바람정성이 키운
단맛 비로소 보여 줄 수 있으니
 
지금 목 길게 늘이고 있다
볼품없는 내 열매들은
시퍼렇게 날 벼리고 있다
 
그 눈보라 견디며 피어난 시 한 편
발화점 되어
누군가의 가슴 뜨겁게 달구어 주기를
 
 
 
 
 
 
 
 
 
 
고래의 소리 터널을 찾아
 
--성냥 4
 
바다 속에는 소리 터널이 있다
뉴질랜드 바다에 있는 암컷 고래가
제 몸뚱어리 뜨겁게 전율하고 싶어
간절히 짝을 찾아 몸부림칠 때
그들만의 소리결을
동해 해안에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달빛은 밤하늘과 숲이 손잡고 소곤거릴 수 있는
소통의 목숨 통로이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분명 말의 결이 있고
눈빛 서로 부딪혀 봉화 피워 올릴 수 있는데
삶의 기둥이기도 한 그는
왜 , 제 뼈마디 우두둑 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는지
캄캄한 밤 중 천둥소리만 붙잡고 있는지
시든 풀이파리 하나 태우지 못해 안달하는
내 텃밭의
다황* 한 묶음 막무가내로 깔고 앉아서
 
 
* 성냥의 다른 이름
 
 
 
 
 
 
 
기타꽃잎 치는 남자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만 살아있다.]*
 
---------성냥 5
 
 
 
 
불씨를 찾아 그는 시간의 실꾸리가 감고 있는
목숨 줄과 씨방 속 물때를 멋대로 조율할 수 있는
신들린 기타 연주가
 
날카로운 투시력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흐느낌이었고
바람 소리에 잠 못 드는 혼, 모든 것들을 뒤흔들어 줄 깊은
울림이었기에
 
나팔관에서 원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와 삶과 죽음 외줄타기에서 인연 줄 하나 잡고 꿈틀거리는 불새의 춤, 그 신비로운 악기에 탐닉하느라
 
꽃잎의 가녀린 명줄 마구 쥐어뜯어 씨받이로 삼았는지
색그림자 속 헝클어진 눈빛과 그 그늘춤사위 뒤 비명에 쫒기는
차디찬 냉혈, 피카소는 언제 신 내림굿 받았는지
 
 
 
 
*피카소 어록 중에서
 
 
 
 
소리의 불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성냥 6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천재 첼리스트 뒤프레 쟈끌린느의 오열하는 한 마디 생의 정점을 눈앞에 두고 28세부터 다발성 척추경화증이 감히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던 첼로도 몸도 모든 것 서서히 포기하도록 해 마흔 둘에 일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그녀 이 말 밖에 더 할 수 없던가
 
십여 년 고된 병상에서 가끔 자신이 연주한 음악 들으며
"들을 때마다 몸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얼음 조각처럼"
돌아눕는 일도 눈물조차 흘릴 수 없던, 마음길인 전화 다이얼도 돌릴
힘 없어졌을 때 생매장 당하는 그 참담함, 활짝 피려다가 바람에 밟히고 찢겨버린 하얀 민들레 한 포기의 짧은 생 되새기며 오펜바흐 '자끌린느의 눈물에 젖는다
 
먼지 나는 길 가에 엉거주춤 서서 또는 지상과의 경계선 지워버리고 홀홀 날아다니며 삶을 견디는 길 밝히느라 세상 사람들 귀에 소리의 불붙이고 있는
 
 
 
 
 
찻잔에 든 해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법문 9
 
남의 상처는
떫으면서도 왜 이리 향그러운지
 
그 여린 잎
여러 번 잘리고 열 받아 비벼지느라
곪은 상처를
한 잔의 그윽한 녹차 향으로 녹일 줄 안다는 것은
 
 
나정 밤바다가
거센 풍랑으로 어둠 휘저으면서
아침 해돋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범어산 숲을 후려치는 겨울바람이
연둣빛 새봄을 입에 머금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어서 인가
 
 
 
 
 
*
 
 
 
이슬
 
--아름다운 법문 10
 
바람이
들꽃에 앉은 반짝임을 툭, 털어버린다
 
그 한 방울로 목마름을 적시던
꽃 대궁은
손을 흔들며 뭐라고 애잔하게
입술을 달싹, 달싹거린다
 
금세 져버릴 바람의 눈물이지만
그것이 사람 사이 주고받는 따스한
눈빛이라는 듯
 
살아야할 이유가 되는 소중한
사랑의
한 마디 말씀이라는 듯
 
 
 
*
 
 
 
 
비움과 채움의 그 경계선
---------아름다운 법문 11
 
밤이 분꽃을 몇 송이나 피웠는지
씨앗을 얼마나 여물게 했는지
그 숫자 헤아리느라 한 계절이 지나갔다
초가을 지쳐서 다 져버리고 난
빈자리엔
이제사 수레바퀴 굴리는 시간이 보인다
꽃도 열매도 시간을 잊어버리게 하는
속임수였던가
 
비운다는 건
또 다른 채움이라더니
새삼 소음으로 번지는 저 바퀴 구르는 소리
쿵, 쿵, 쿵, 그 소리에 질려서인지
그동안 머금었던 푸른 햇살들 게워내면서
시간을 쉴 틈 없이 굴리는
바람이 낙엽을 물고 시나브로 드러눕는다
 
 
 

 
 
 
 
 
옷 고르기
 
---아름다운 법문 12
 
한 때는
달성 공원에 갇힌 공작새가 부러웠다
그 길고 빛깔 화려한 옷자락 끌면서
햇살을 배경으로 한 바퀴 도는 모습이
하도 도도하고 우아했기 때문일까?
겉모습보다 삶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부챗살이나 가끔 펴들며 귀부인 흉내를 내면서
 
오래 살아보니
그것은 내가 입어야할 옷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곧 터져버릴 풍선 하나 불어대고 있었던 것
별자리에서 내려와 바람과 같이 숨쉬고
이슬 머금는 들꽃들과 같이 부대끼는
풀, 풀들이 걸친 저 자유로움이
나의 맞춤옷이었던 것을
 
 
 
 
 
 
석녀 17
______달빛
 
아시는지요
바르르 떨며 빛나는 저 달빛 한올 한올의
비밀을
그리움 다 못 이루고 떠난 영혼들의 외로운
눈빛이라는 것을
거듭 태어난 향피리가
이승과 저승 넘나들며 잠든 혼령들 흔들어 깨워
간절한 기원으로 달이 차 오를 때
비로소 슬픈 영혼들이 땅을 밟지요
밤새 유리창 바깥에서 떨며
향피리의 떨켜 밤새도록 울려요
달빛이 되지 못하고 동굴 속에 갇힌 눈물들은
떨어지는 눈물 방울로 석순을 가꾸지요
그 유리기둥을 밟고
님의 창가를 서성이게 될 먼 훗날을 기다리면서
글썽이는 눈, 저 눈빛들
 
달빛 눈부시게 외로운 밤이거든
그리운 이여, 창문을 살몃 열어두셔요
 
 
 
 
 
 
 
 
 
 
 
 
 
 
 
 
 
숟가락엔 어느 노가다의 탄식이 남아있는가

사람의
섬과 섬 사이에서
 
메마른 영혼의 물기 마르지 않게
기꺼이 메아리가 되어주는
범종의 파문처럼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으면
삶과 죽음
몸과 몸 사이의 생존을 위해
평생 밥을 실어 나르는
하느님의 고단한 노동이 보인다
 
 
 
 
 
 
 
 
 
 
 
 
 
 
 
나부상의 눈빛 날마다 폭발한다
-전등사 1
 
 
고통이란 금세 길들여지는 것
쪼그리고 앉아 절 추녀 받들며 끙끙대는 것도
잠시, 필요할 땐 언제라도 사랑이란 도구를
쓰는 세상의 남정네들 비웃는 벌거벗은 여인
돈 몇 푼에 마음까지 바칠 줄 믿었던 도목수의
어리석음 바람에 흘려보내고. 밤이면 부처님
신심의 높이 눈 맞추려 꿇어앉는다
발등에 입맞춤 한다
나무속에 갇힌 주모는 몸과 마음
아낌없이 천년 불공을 드리는지 그러나
눈빛만은 날마다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삼존불은 발아래 놓인 불전들 그녀에게 모두
되돌려주지만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아니다
깊은 바다 무늬 진 푸른 몸 장삼 자락이 감추며
무명삼매의 눈 뜬다
석가모니불은 흙탕물 몇 번 가라앉혀야
지장수 된다는 걸 손가락 하나 들어 말없이 보이신다
몸으로는 *간대로 꽃뱀 비늘의 독기 녹일 수 없다는 듯
 
 
*함부로
*강화도 전등사 나부상;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주모를
도편수가 나부로 조각하여 절 추녀 밑에 올려놓았다고 함.
 
14
 
 
 
 
 
 
 
 
 
 
인연의 감옥 깨뜨리며
-전등사 2
서까래 밑 주모의 나부 상에서 살 비린내 밤낮 흐느끼며 법당 안으로 흘러들어 부처님 전에 하소연하다가 돌덩이에서 깨어 제발 눈을 뜨시라고 얼어붙은 온 몸을 입김으로 뜨겁게 불어보다가 제 사특한 불심으로는 어쩔 수 없어 다시 추녀 밑으로 들어가 시지프스의 받침대가 된다
 
천년을 추녀 밑 배회하며 한 마리 늑대가 된 그 사내, 도목수 산발한 채 바람 되어 흐느끼는 소리에 부처님들 *지즈로 바위 깨트리고 나와 온 몸 돌고 있는 푸른 피톨 내보이신다 그들의 비린 인연 삭히려고 수평선 트여오는 햇살 한 줌 잡으시고 두 가슴 위 말갛게 얹어 미소 지으시며
 
*드디어
 
 
 
 
 
 
 
15
 
 
 
 
 
 
 
 
 
花蛇登仙
----전등사 3
 
사랑이란 저 스쳐가는 바람결 같은 것
 
천년 시간을 전등사의 서까래 들어 올리도록 발가벗겨 쪼그리고 앉혀진 몸
눈바람이 몰려와 칼끝으로 빗금 그어놓거나 꽃바람이 애무 하다가 찰싹 뺨을 떄리기도 한다
 
햇발은 그 분홍빛 살결 얼렸다가 녹였다가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법당의 염불 소리는 저승처럼 아스라이 들리고 생밤을 깨물며 돌아다니는 도깨비들과 어울리면서 제 몸에 박힌 가시들을 뽑는다
 
이 갈며, 알록달록 고운 무늬로 문신을 그려 시시로 풍화되는 몸 길들인다 드디어 몇 천 번의 허물벗기로 거듭 태어난다 나부상의 나무껍질에 갇힌 속 살결 되살아나고 이젠 주모의 솜털 하나하나 눈을 뜬다

추녀 밑 꽃뱀의 전생 모든 인과 벗어두고
지글거리는 지옥의 혀 끊어버리고
한 마리 저승새로 날아오르려
 
 
 
 
 
16
 
 
 
 
 
 
 
 
 
 
 
 
悲歌
 
-전등사 4
 
거문고 가락 눈발에 툭, 끊어진다
그 끈적끈적한 인연의 줄 어쩌지 못해
전등사 처마 밑을 떠나지 못하는
저 사내, 도편수
 
제 사랑의 깊이 재어보지 못하고 세상의 여자들을 벌레 먹은 장미라며
꽃봉오리까지 마구 짓밟더니
 
남몰래 새 한 마리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주모보다 자신이 먼저 사랑이란 주는 것이란 걸 깨닫기엔 너무 끈질긴 상처의 깊이와 집착, 달콤한 죽음의 길 찾지 못해 천년 시간은 흐르고
 
밤마다 꽃잎 질근질근 씹으며 자신이 깎아 만든 나부상의 연옥에 갇혀 너덜너덜 헤진 제 옷자락 쥐어뜯는다 언젠가 세상 한판 뒤집어 볼 바람, 미친바람을 주문으로 외면서
 
 
 
 
 
 
 
 
 
17
 
 
 
 
 
 

 
제 옥문 깨뜨리셔요
------향피리 1
 
이 몸, 그대가 불어주지 않으면 한갓
죽은 대나무일 뿐
 
다시 혼불 지피며 되살아나고 싶어요
석양을 지우면서 밤이 번져나고 있어요
어서 입김을 불어 넣어주셔요 뜨거이
더 뜨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쓰레기 더미에서 치민 그대 분노 곰삭히며
마침내 혼절할 듯 떨리는 몸짓으로
차갑게 굳은 제 살에 숨결을, 피를 돌게 해주셔요
 
동짓달 긴 겨울 밤바람에 시달리면서
부대끼면서 막힌 숨구멍의 석녀, 하도 허망해서
더 이상 소리 내지 못했어도 한 때 떨림의
황홀함 잊지 못하는 밤의 낭떠러지
쌓인 미움 다 태우며, 그 벼랑 끝이
비록 명부일지라도 활짝 꽃피우렵니다
 
차갑게 닫힌 제 옥문 두드리셔요.
살이 떨리면 두근두근 심장이 깨어나지요
톡, 쏘면서 질 붉고 달착지근한 꽃뱀처럼
속 파고들어 꽁꽁 언 가슴 녹여드리겠어요
그득히 채워드릴래요 그대,
어둔 밤 달아오르기 기다리는 이녁은 향피리여요
 
 
 
 
 
 
 
시인 정 숙(jungsook48@hanmail.net)
 
경산 자인 출생
경북대 문리대 국어 국문학과 졸업
1991년 계간지<시와시학>으로 신인상 등단.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영상시집>시집 출간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인터넷 포엠토피아 '포엠스쿨 정 숙반 강의'
http://poetjs48.ivyro.net/
016-9545-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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