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간
드디어 밥을 자신다! 하루 한 끼 생식만 자시던 그가 1997년
외환위기가 시작될 때 쯤 세상낌새가 이상하다며 미리 잘하던
사업 접어버리고 주민등록증과 도장까지 내게 맡기고 범어네거리
귀신고래가 되어 십년 째 누워 막걸리 소주만 고집하던 그가,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실험실의 모형처럼 뼈만 덜컥거리는 맨몸에 스스로
놀라 거짓말처럼 밥맛에 길들이더니
공황장애로 가족들의 애간장 그리 태우더니 차라리 포기하고
내 길 찾는다며 ‘봄날은 간다’ 시극으로, ‘신처용가’ 첫 시집으로
그를 약 올리는 길 택한 내 한 수가 통했던가! 사실은 그가
내 길 찾으라고 어느 때부터 권했지만 시집 열심히 산다고
가정부도 보내고 몸빼이와 딸따리를 바보처럼 고집했으니
2.메뚜기도 한 철
얼마 뒤 배달의 민족, 안동 김 씨의 맏이 김 배달 씨 그는 자신이
처용이라며 손수 밥 맛있게 지어 먹는 법을 알아 쌀을 뽀드득
야무지게 씻으며 서울 행사에 간 처용아내 내게 몇 시에 오느냐 밥 먹고
오느냐 그 밤에 우유 사 오라며 확인 전화부터 하더니
대구 계산 성당 쪽 출신인 김남조 선생님이 저녁 시간이 되면 처용 씨가
전화 할 때 되었다며 서울역까지 태워주기도 하시며 ‘처용 씨한테
뮈라 얘기하고 왔느냐 조곤조곤 물으시면 ‘메뚜기도 한 철이라’ 하고 왔다고.
설거지 까지 뽀드득 잘하며, 선후배 모임에서 밤새 화투까지
그리, 그리 한 십년 잘 보내고 2021년 자기 생일 초파일 새벽
칠십 칠년의 가설무대를 떠나갔으니 덤으로 받은 시간 잘
마무리하고 물 삼키는 것, 목소리까지 다 반납하고 갔으니
3. 징을 치면서
그 사이 난 시, 그대를 기둥서방으로 삼았고, 암 세포와도 잘 싸웠으니
유월의 나무들이 저마다 짙푸른 빛 날개를 펴고, 바람이
그 속 헤집고 다니며 입김을 불어넣느라 제 옷깃이 연둣빛으로
흠뻑 물들어 곧 날아오를 것 같아, 두근거리는 가슴 달래어 허공은
공허가 아니라 엄마의 기도처라며 승무와 처용무를 그리고
바람의 징채에 흠씬 두드려 맞으며, 스스로 징을 치면서 풋울음 아닌
재울음을 찾고 있으니 기적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걸 겨우 깨닫는 그 시간들이 기적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