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계절을 중모리에서 점점 중중모리장단으로 몰아붙이며 솔향 터트립니다. 우포늪은 자운영 꽃무늬 치맛자락 펼치며 ‘봄밤이라예’ ‘참말로 봄밤이라예’ 중얼중얼 뜨거워지는 몸 감당하지 못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겠지요. 해마다 그 파문이 ‘최남선 주요한’ 등 시인들 가슴에 너울져 이어온 지 어언 1세기, 늙은 느티나무 굵은 가지들이 새삼 우러러 보입니다. 세상 제 것인 냥 팔 흔들어대는 잔가지 틈에 가려 그늘져 보이지만 현대 시문학을 지탱해온 대들보들입니다. 그 분들 중에서도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와중에서 소위 그 시대 신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궁금해지는 걸 보면 필자도 마음의 여유 이제 좀 생긴 것인가요? 의문부호가 책장으로 인터넷 검색으로 훌륭한 학자를 찾아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2.문 경현 박사님을 찾아서
시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짝사랑 이십년이 필자에게 선물한 것은 많은 시인들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보다 더 시를 알고 아끼는 학자 한 분을 최근 봄밤에 만난 일입니다. 지금 경북대 명예교수 문경현 [文暻鉉] 문학박사님, 한국사학계의 태두로 ‘신라사연구, 고려사 연구’등 수많은 저서와 학술활동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에 평생을 헌신한 대석학이라고 이상번 시인이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일흔 넷의 연세에 교통사고로 쌍지팡이를 짚고 계시면서도 경주 신화와 전설 모음집을 엮고 계시는데 우연히 식사를 같이 하게 되어 그 분의 문학 사학 철학 유교 불교 영문학 한문학 등 넓은 지식에 탄복했을 뿐 아니라 그런 예기를 듣는 사람이 흥겨워 ‘얼시구!! 무릎을 칠 정도로 재담가여서 그 분의 말씀을 토대로 잠시 신여성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특히 한시 두추낭 [杜秋娘] 해석은 그야말로 처용아내가 “봄밤이라예, 안그래예”를 내뱉는 느낌이었습니다.
杜秋娘
勸君莫惜金縷衣
勸君惜取少年時
花開勘折直須折
莫持無花空折枝
님에게 권하노니/ 금으로 수놓은 비단옷 아끼지 마소서/
님에게 권하노니/ 청춘을 아끼소서/
꽃 피었을 때 꺾고 싶으면/ 지금 바로 꺾어소서/
꽃 지고 빈가지만 꺾게 될/ 때를 기다리지 마소서/
추적추적 초여름 비 내리는 저녁 제 몸에 핀 꽃 떨어져 빈가지 꺾지 말고 빨리 꺾어달라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 이야기는 월북시인 이용악의 시집 ‘오랑캐꽃’으로 넘어갑니다.
그의 ‘소원’이란 시 한편 읊으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나라여 어서 서라/ 우리 큰 놈이 보고픈 아저씨/ 柳呈이도 나와서/ 토장국 마시게 /나라여 어서 서라 /꿈치가 드러난 채 /휘정휘정 다니다가도 /밤마다 잠자리발 /가없는 가난한 시인 山雲이도 맘놓고 좋은 글 쓸 수 있게 /나라여 어서 서라 /그리운 이들 너무 많구나 /옥이랑 껴안고 /한번이나 울어도 보게 /좋은 나라여 어서 서라./”그를 진정한 민족 시인이라며 자연스레 이광수로 넘어갑니다. 친일을 하고 반성 없이 자기합리화 시킨 작가라며 ‘일제 강점기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자 주위에서 못마땅해 하니까 ’어허 이 사람들 이렇게 시국관이 없어 어쩌나?‘ 한 그의 말이 유명하다며 그의 사생활을 소상히 얘기해 주십니다.
3.“모윤숙처럼 잘 난 여자는 처음 봤어”
“ 소설가 이광수가 동경유학 시절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던 중 본 부인 백혜순을 두고 나중 의사가 된 제 2부인 허영숙을 만났고 신채호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돌아섰지. 휴양 차 간 금강산 장안사 ‘산방약수’에서 모윤숙을 만나 嶺雲이란 호도 지어주었고 안호상 박사를 소개해 아이까지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지. 나중 그 아이 계모[모윤숙]가 구박한다는 얘기도 한다고 했지. 나중 이혼을 했지만. 납북 후 이광수에 대한 사랑을 쓴 일기체의 감상적인 장편 산문시집 《렌의 애가》(1937)가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 되었지, 한국 문단 최초로 시집 '렌의 애가'가(1959) 유네스코 추천작품으로 선정도기도 했지 .사십대의 모윤숙을 직접 만났었는데 태어나고 그렇게 인물 좋은 여자는 처음이었어. 정 숙 시인처럼 한 송이 모란꽃이라 할까? 대단한 미인이었지. 그러나 1950년 후반 청구대학에서 문학의 밤 이어령, 모윤숙, 이무영[농민소설가]가 참여해서 모윤숙이 ‘나보기가 역겨워’ 소월 시 낭송 해설을 할 때 70대 모습에서 많이 실망했어. 품위 있게 늙어가는 사람도 많은데 뚱뚱하기도 하지만 세월에 풍화된 모습이 아주 추하게 느껴졌어.
4.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가?
“함경남도 원산 출생에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서울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1931)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어. 그런데 아쉬운 것은 태평양 전쟁 중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한 일이지. 조선문인협회에 간사로 가담해 친일 강연을 했고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교화단체연합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2), 국민의용대(1945)에 가담하여 《매일신보》등에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는 사실이지.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여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매일신보》에는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 찬양시를 발표하였으며,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강요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그는 이 시기에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노천명과 함께 여류 문인 중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어 안타까워요. ”
5.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 '동방의 딸'이기를 강조
“특히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 '동방의 딸'이기를 강조한 친일파였지만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한 몫을 단단히 했어요. 이혼 후 모윤숙은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면서 건국 일등공신이 되었어. 이승만이 그녀에게 인도대표인 메놈박사가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도록 잘 녹여보라 부탁하자 그녀는 영문학에 도통한 춘원과 함께 영시 짓기도 하면서 결국 메놈이 사랑하는 미쓰 모를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
“친일한 그녀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비롯한 수많은 전선시를 써내며 한국전쟁을 '숭고한 반공전쟁'으로 미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는 건 아이러니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죽어갔던 어린 병사에게 울림 있는 시로 '조국의 품'을 부여한 것도 그녀였으니. 하지만 정작 그 병사가 목숨 바쳤던 조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장본인들이 모윤숙을 비롯한 '친일파'들이었다는 사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묻혀 졌으니 정의감에 불타는 어린 병사가 살아남았다면 모윤숙의 헌정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 변명을 또 무시할 수 없어 혼란스럽기도 하니 쯧쯧... 그 때 죽은 어린 국군들이 늦게 그 사실을 알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는가? 그 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유엔대사로 임명받을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프란체스카 여사가 질투할 정도였다는 얘기가 있어요. 또한 이광수와 모윤숙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던지 친일로 잡혀간 춘원을 위해 반민특위까지 해체 시켰다고 하니 사랑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권력의 힘이 막강했다고 해야 할지...“
6.예술가는 생애가 빛나야 한다.
대구시내 파동 약간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교수님의 정원 4백년 묵은 향나무들이 꼿꼿이 고개를 들고 서 있는데 비에 젖어 더욱 짙은 초록빛입니다. 백 여 년 된 백모란이 져버린 꽃잎을 아쉬워하고 있는지 깊은 침묵입니다. 박사님은 반백의 머리카락 슬어 넘기며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세 한 번 흐트러짐 없습니다. 그 시대 친일에 대해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혼란스럽다는 필자의 말에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모윤숙이나 노천명 등 몇 명은 시대를 잘 못타고 난 죄이니 그래도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이광수와 최린 미당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 예술가는 생애가 빛나야 한다 는 말이 있는데 그들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 합리화만 했어. 특히 미당은 각 정권마다 아부해 일신의 영달을 꾀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지... 물론 우리 민족어를 갈고 닦아 주권을 세운 건 인정하지 그러나 그런 것도 정지용이 이미 닦아 놓은 길 아닌가“ ”맞습니다.“ 덩달아 대구 작가회의 이사인 이상번 시인도 맞장구를 칩니다.
7.마무리
기억력이 어찌 저렇게 좋을 수 있는지 최린과 나혜석 노천명 이미륵과 전혜린 이야기까지 한시와 괴테의 시 한편 원어로 줄줄 읊으시니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제서야 배가 고프다며 밤 8시 넘어 갈치 정식 집으로 나섰습니다. 나중 나혜석과 최린 노천명과 양주동 박사의 얘기도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신 사학자 문경현 박사님께 감사드리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이상번 시인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2 (문 경현 박사님, 한문학자, 사학자)
-정 숙 시
목이 길어야 관이 향기로운가 [노천명과 김광진 ]
---정 숙 [처용아내]
1. 비슬산[包山]가는 길엔 일연스님이 처용가를 옮겨 집필하시고
“박사님, 자귀나무 연분홍 깃털꽃송이들이 물 없는 계곡을 지키고 있군요.”
“예, 많이 가물었어요. 그래도 저 숲은 싱싱하군요.”
현풍 비슬산 대견산 정상엔 신라시대 절터가 남아있고 그 때의 삼층석탑이 아직도 먼 발 아래 낙동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뒷들판엔 봄마다 참꽃축제가 열리는 곳입니다.
“공룡시대부터 긴 역사를 간직한 비슬산이 핏빛으로 물드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흘러가다가 낙동강에 닿지 못하고 서성이는 암괴류 때문에 온 산천이 핏빛 울음바다 아닐까요? ” 필자의 엉뚱한 생각에 모처럼 크게 웃었습니다.
“ 경주의 전설과 신화 그리고 삼국유사 번역 잘못된 곳 박사님의 수정 작업은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지요?”
“예, 언젠가 처용아내한테는 그 부분도 얘기해드리도록 하지요.”
“정 숙시인, 자신을 처용아내라고 하면 남자들이 오해할 텐데... 아참, 정 시인의 첫 시집 ‘신처용가’가 시극으로 공연되었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신다.
“네 덕분에 호응이 좋았습니다. 풍자와 해학이라 볼거리와 아픔이 있다고...”
비슬산 오르는 길목 유가사 절에 지난 오월 일연보각국사님과 조오현 선사님의 시비를 세운 이상번 시인이 박재희 시인과 한문학자 이 정 화 박사와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님이시고 사학자이신 문경현 박사님을 모시고 산봉우리 이름이 잘못 표기된 부분을 조사하고 확인하는 길입니다. 문 박사님은 쌍지팡이로 삼층석탑이 자리한 산 정상까지 그 더위 무릅쓰고 올라가시면서 조오현 스님의 ‘비슬산 가는 길’과 직접 번역하신 일연스님의 포산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도인을 칭송하는 한시를 맛깔스레 낭송하십니다.
비슬산 구비 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萬)첩첩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 琵瑟山(비슬산)가는 길,무산 (霧山) 조오현]
,
2. 허난설헌은 巖塊流에 앉아 울고 있고
세계 최고로 길이가 길다는 비슬산 [옛날엔 포산이라고 했음] 암괴류, 흘러가는 너럭바위에 앉아 요절한 허난설헌의 남편을 기다리는 시 奇夫江舍讀書 칠언절귀 한 수 외시며 사대부 집안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여인네의 답답함을 암괴류에 비유해 주십니다.
“몇 억년 한 자리에 머물러 있던 저 바위들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흘러 내려갈 작정을 했겠어요. 저 바위에 귀를 대 보세요. 물 흐르는 철썩철썩 소리 들리지요.”
燕掠斜첨兩兩飛 제비는 쌍쌍이 처마 끝에 나는데
落花요亂撲羅衣 떨어지는 꽃잎은 요란하게 비단옷을 때리는데
洞房極目傷春意 동방에서 기다리는 가슴 찢어지는데
草綠江南人未歸 꽃 피고 잎 피는 호시절 님은 돌아오지 않네 --[-奇夫江舍讀書 ]
“그 외로움이 주옥같은 한시를 남기게 했으니 역시 시인은 예술가는 고독이 약이지요. 그러나 허난설헌의 한시들이 허균이 옮긴 것들이 대부분인데 표절논란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어서 관이 향기로운 시인을 만나고 싶다는 필자의 재촉에 이 상번 시인이 노천명의 ‘사슴’을 읊어주면서 한숨을 쉽니다.
‘목이 길긴 길었는데 세상을 잘못만나 끝까지 친일파였지요.’ ‘평생 연인을 기다리며 홀로 지낸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冠)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다 보다./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 사슴 전문-
3. 그녀의 사랑은 목이 길 수밖에 없었는가
“그렇지요. 남빛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는 노천명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시적 대상을 시적 화자와 겹쳐 놓음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동일성 시학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시인이었지요. 황해도 장연 출생으로 1934년 이화여전 졸업. 재학중(1932) 신동아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 모윤숙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여류 시인의 한 사람이었고 점차 명 시인으로 부각 받게 되었어요. 첫째, 자기중심적인 정서 특히 고독에 대한 심도 있는 표현. 둘째, 시인 자신의 농촌 생활로부터 그려낸 향토적인 정경의 객관적 묘사. 셋째, 역사적 국가적 인식의 반영이 바로 그것인데”
“노천명과 김광진의 사이는 불륜이었군요?”
“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지요. 부인 있는 남자와 사귀었지만 나중 이혼을 했으니 불륜은 아니지요. 결혼 날을 두 번이나 잡았는데 그러고 그 사랑 끝까지 지켰으니 그녀의 사랑 숭고하다고 해야겠지요.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지요.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족을 만나러갔지요. 고향이 평양이었고 돌아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공습이 있어 그 후 김일성에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고 알고 있어요. 노천명은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평생 혼자 살았으니 ‘사슴’이란 바로 자신의 고독을 표현한 내용이지요. 시를 쓰려니 남들이 이미 좋은 말 다해버려서 못 쓴다던 양주동박사가 노천명시인에 반해 프로포즈를 몇 번 했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양주동의 선구자란 시 대단하지요.“
“김광진과 만난 뒤인가요?”
“아니요, 그 전이지요. 양주동은 영문학자에 국문학자 시인으로 국보라고 했지요.”
4. 철저한 친일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학병〉 〈창공에 빛나는〉 〈흰비둘기를 날려라〉친일 시들이 있습니다. 노천명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25일 시집 〈창변〉을 출판하고 성대한 출판기념회까지 열었는데 이 시집의 말미에는 9편의 친일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출판한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자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친일 시 부분만을 뜯어내고 그대로 계속 시판하였지요. ” 사학자이며 한학자 식물과 동물까지 박학하신 문경현 박사님은 다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친일시를 낭송하십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천명]
5. 노천명이 모윤숙의 위치를 염탐하다
“그녀는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익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1950년 북조선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익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 죄로 체포, 투옥되었지요. 모윤숙 등 우익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모윤숙이 연판장을 돌려 사면을 받아 풀려났어요. ”
“아무리 기자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 얼른 이상번 시인이 “ 다음 이 시도 대단한 친일이지요. 들어보세요” 하며 시 한편 읊는다.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이여/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노천명의 친일 시 [부인 근로대]시낭송에 눈 지그시 감은 문경현 박사님 혀를 차며 다음 말씀을 이어 가신다.
6. 진정한 여성 선각자는 나혜석 화가
“그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문인으로서 노천명의 국가관엔 애국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나약한 여성으로 시대를 잘 못 타고 났다고 동정은 하지만 그보다 정말 관이 향기로운 신여성은 나혜석 화가지요. 정월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여성 소설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여성화가, 선각자, 시대를 앞서간 여성 운동가, 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최린과 이광수의 야비함과 그 당시 동경 유학 간 신여성과의 관계 그리고 그녀에 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7. 삶을 아끼려면
말을 아끼면 생각을 아끼는 것이고 생각을 아끼는 것은 삶을 아끼는 것이라고 또 그 삶을 아끼는 이가 시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현대시 백주년을 맞아 험난한 시대의 불꽃이었던 신여성들의 삶과 예술 그리고 사상을 더듬으면서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빛나는 생애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정 삶을 아끼는 시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넘어가는 해 아쉬워하며 비슬산계곡에 앉아 하루의 노동을 위로합니다. 유가사 주지스님이 마련하신 저녁상 위 서로 부딪치는 참소주 잔속에 불콰하게 익은 노을이 슬며시 들어와 앉습니다. 참고로 삼국유사에 등장한 포산[비슬산]이 미당의 시엔 소슬산으로 나옵니다. 일연선사의 한시에서 칭송했던 관기와 도성 두 도인의 우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道人 觀機는 소슬山의 남쪽 봉우리 아래 草幕을 엮어 살고, 道人 道成이는 소슬山의 北녘 모롱 밑 洞窟 속에 계시면서, 서로 친한 친구인지라, 十里쯤 되는 둘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지냈읍니다만, 그 만나는 時間 約束은 某年 某月 某日 某時와 같은 우리들이 쓰는 그런 딱딱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멋들어진 딴 標準을 썼읍니다.
즉-너무 거세지도 無力하지도 않은 이뿐 바람이 北에서 南으로 불어 山골 나뭇가지의 나뭇잎들이 두루 南을 향해 기울며 나부낄 때면, 北嶺의 道成이는 그걸 따라 南嶺의 觀機를 찾아 나섰고, 그 바람을 맞이해서 觀機는 또 마중을 나왔어요.
적당히 좋은 바람이 그와 또 반대로 南에서 北으로 불어 山의 나뭇가지의 나뭇잎들을 모조리 北을 향해 굽히고 있을 때는, 南嶺의 觀機가 北嶺의 道成이를 찾아 나서고, 道成이는 또 그 바람 보고 마중을 나오고……. 어허허허허허허!……. [소슬山 두 道人의 相逢時間,서정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