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면 부드러운 마음씨와 매몰찬 모습 또는 이리저리 잘 적응해서 빨리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해서 그런 성질을 닮고 싶기도 한 적이 수없이 많았었다.행사 때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선생님이 꾸중해서 슬프다며 우는 여성시인을 남자 시인들이 업어주고 약을 사오고 수선을 떨 때는 솔직히 많이 부러웠었다. 왜 난 울어야할 때 웃고 넘어질 줄도 모르는지 원망하면서, 그렇게 살아 견디면서 정말 닮고 싶은 분이 어디 한 사람 뿐이겠는가. 그렇다고 그 분의 모든 면을 닮고 싶은 것이 아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필자의 작품 얘길 안 할 수 없어서 자랑처럼 늘어놓는 것을 미리 용서를 구한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며칠 전 이육사 기념관의 광복 80주년 기념 시낭송회에서 윤동주의 참회록을 낭송하였다. 오랜만의 도전이라 틈 날 때마다 시를 암송하면서 시인의 그 당시 그 심정에 다가가면서 윤동주 선생님이 그 때 분노를 삭이느라 얼마나 고통스럽고 먹먹한 시간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만 이십 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참회록의 이 부분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한숨을 쉬며 슬퍼진다. 그런 안타까운 슬픔을 가슴 깊이 느껴보는 시간이 새삼 소중해서 감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 시 한편을 무대 위에서 거침없이 외워 윤동주 시인의 아픔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겨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요즘 칠십도 되기 전부터 후배 몇 분이 벌써 정신을 잃어가는 때인지라 그러면서 문득 아흔이 넘도록 행사에서 깔끔한 인사말을 하시던 고 김 남조 선생님이 떠오른다. ‘요새는 제 나이에서 이십을 빼야해’ 변명하듯 말씀하시던 그때 모습이 소녀스러워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었는데 아흔이 한참 지난 그 연세에도 정말 귀엽고 아름답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었다.
따지고 보면 시낭송 붐이 요즘 이렇게 요란스러워지는 데는 정 숙 처용아내가 일조를 하지 않았나 곰곰 과거를 거슬러가 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필자의 첫 시집 1996<신처용가>는 향가 중 처용가를 패러디하느라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말이라며 온통 모국어로 연작시를 썼는데 백석 시인까지 들먹이며 환호를 받았지만 막상 대구분들도 낯설어하기에 당황해서 시낭송을 시작했다. ‘봄밤이라예’ 이 애교스런 말투에 전국이 떠들썩할 정도였다. 물론 과장이긴 하지만 거의 전국을 돌며 낭송을 해서 경상도 말의 맛깔스러움, 능청스러움에 모두 즐거워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를 낭송으로 퍼포먼스로 시극공연<봄날은 간다>로 일반인들도 같이 즐길 수 있는 장르로 시를 대중화시키는 역할에 일조했다는 점을 인정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고 조 병화 선생님은 서울 시학사 행사가 있은 다음 날 아침 7시만 되면 벌써 전화를 하시기도 하셨다. ‘정 숙 시인 잘 돌아갔어요? 어제 그 시낭송 좋았어요. 정 숙 시인은 계속 사투리 시 쓰세요.’‘안성 문학관 행사에 놀러오세요.’ ‘선생님 지는 시집 살아서 안되는데예. 안성이 어디있는지도 몰라서 못 찾아갑니더’ 참! 바보스러워서, 얼마나 바보스러웠으면 빙신 같은, 쪼다 같은 시인이라고 어느 평론가 선생님이 <정수기 그 여자 시인>이란 제목의 시를 써 보내주기도 했겠는가.
필자의 경상도 방언 연작시 시집 <신처용가>는 시학사에서 신작시 5편 발표 때부터 필자 본인이 놀랄 정도로 반향이 대단했었다. 그 해 연말 행사에 참석하신 고 오 탁번 선생님, 고 정 진규 선생님, 차 한수 선생님께서 차비까지 만원씩 보태주시면서 격려하셨는데 그 때 고 오 탁번 선생님 시어 속 월경이란 말을 서답으로, 기생을 기집으로 고치라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는 것이다. 신처용가 시집 나오기 일 년 전 수국행사에서 고 송 수권 선생님이 전라도 말은 사투리로 시어가 되는데 경상도 말은 시어가 될 수 없다. 그만한 맛이 없다고 하셨는데 96년 시집이 나오고 난 뒤 여름 행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악수를 청하시던 모습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고인이 되셨으니 새삼 명복을 비는 시간이 된다. 어쨌거나 얼마나 요란 했으면 대구 어느 시인이 서울 가서 무슨 짓했느냐고,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예 그냥 화냥년이란 소리 듣는 처용아내를 구해주고 싶을 뿐이었는데예? 아무튼 정 숙과 처용아내는 운명적으로 만난 것 같다.오죽하면 전국 행사에서 고 김 종길 선생님이 문정희 시인과 정 숙 시인이 우리나라에서 입이 제일 걸다고 하셨겠는가? 그렇게 따지다 보니 대학 시절 전혜린과 헷세의 소설 데미안에 흠뻑 빠졌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은 필자가 시 잡지 ‘정신과 표현’에 쓴 ‘석학을 찾아서’ 부분을 올려본다. 여기서 석학은 한문학자 문 경현박사님이다.
대학시절의 우상 전혜린, 불꽃처럼 짧게 살고 갔으나 그가 사랑하던 사람들 속에 뿌려 놓은 언어와 고독과 사랑의 씨를 뿌린 활화산, 전혜린 ‘다들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죠르쥬 상드의 말대로 그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생이란 취하게 하는 것, 좋은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그렇게 귀중한 것이다.’전혜린이 사랑하는 동생 채린에게 보낸 서한 중 일부다. ‘포장마차를 타고 일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노래와 모닥불 가에서 춤과 사랑과 점치는 일로 보내는 짧은 생활, 짧은 생, 내 혈관 속에서는 어쩌면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있을지도 모른다 고 혼자 공상해보고 웃기도 한다.’“아버진 맏딸인 나를 직접 가르치고 책을 읽혀 책상 버러지와 독서광으로 키워지고 무조건 커트라인 높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난 뒤부터 몹시 혼란하고 흥분된 상태였다”고 자전적 글에서 피력하고 있다. 그녀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세이집에서 보면 ‘뮌헨은 한마디로 제복을 입고 장갑을 끼지 않은 도시 와이셔츠 단추를 푼 분위기로 비 인습적이고 사람을 권태롭게 하지 않는 도시’라며 뮌헨을 무척 사랑한 것 같다. 특히 슈바빙이란 도시를
그처럼 생을 사랑하면서 불꽃같이 살다가 32세를 일기로 1965년 1월 11일 자살했다고 하는 활화산 그녀가 새삼 왜 이리 그리운가요. 어른들 말처럼 그녀 사주엔 역마살이 끼어서인가요? 바하만의 말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던 우리들 청춘시절의 우상이었던 검은 머풀러의 전혜린이 정말 자살했을까?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싯귀절을 떠올리며 그 당시 갑자기 지평선이 무한대로까지 넓어진 느낌이었다는 글을 음미해보면 맏딸로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늘 양친에만 매달려온 자신이 혼자 뭔가 할 수 있다는데 아주 흥미와 생동감을 느꼈던 것 같다. 슈바빙 구역은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이라며 독일 생활을 아주 즐긴 것 같고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생활, 무엇보다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그런 삶을 필자도 꿈꾸었던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60년대 헤세의 ‘데미안’을 번역하여 그 당시 대학생들이 그 책을 멋으로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대단한 붐을 일으켰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싸스다.’
싱클레어의 자아를 찾아 고뇌하는 과정에서 결국 데미안이 자신의 분신이라는 걸 뜻도 모르면서 열광했던 그 시절 청춘의 뜨거움이 그리워진다. 고독하게 모색하고 지치도록 갈망하고는 죽음에 의해서 자기의 운명을 성취하는 모습이라는 전혜린의 독후감 정리에서 봐도 늘 죽음을 삶의 소중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녀가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의 주인공, 자유를 정신의 자유를 희구하는 본능적인 충동에 지배되어 있는 성격의 니나와 닮으려는 성향이 강하게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죽음도 스스로 택할 용기가 있지 않았을까?
인하대 불문학과 교수님이시고 시학사 시 계간전문지 주간이기도 하셨던 고 이가림 시인은
“대학생시절 직접 강의를 들었어요. 수줍음이 많아 강의도 학생들 멋대로 떠들어도 상관없이 혼자 강의하니 학생이 ‘왜 선생님 혼자서 하세요?’ 항의하듯 물었을 때 ‘저는 여자인데요. 좀 봐 주세요. ' 하며 애교스럽게 말했어요.”
“전혜린하면 검은 머플러가 떠오르는데 그 당시 머플러 쓰는 게 유행이었어요. 제 대학시절 사진도 머플러 쓴 게 많아요.”
“시간강사로 그 당시만 해도 독문과가 별로 없어서 전임강사 자리를 얻지 못했고 강의 때도 검은 머플러를 쓰고 했습니다”
“최 불암 배우의 어머니가 경영한 ‘은성’이란 대포 막걸리 집에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김수영 시인이 다혈질이어서 늘 고함을 질렀어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가 유행하니 왜 저 노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럴 때도 전혜린이 검은 머플러를 쓰고 나타나곤 했어요.“
몇 해 전 강진 영랑 문학제에 처음 참가하게 되었는데 행사 뒤 천둥번개가 치는 밤 김남조 선생님 방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남자시인들은 노래방으로 가고 이가림 시인, 김재홍 평론가 오현 스님 외 김용직 교수님 유자효 시인 그리고 대구의 정하해, 장혜승 시인, 이병금 이경 시인 외 여러분이 모여 앉았는데 그 해 영랑 문학상을 수상한 신달자 시인이
“대학시절 전혜린을 찾아갔는데 손금을 봐주겠다고 하더니 같이 간 친구한테는 곧 자살을 하거나 죽는다고 얘기했고 내게는 아주 고통스런 사랑을 하겠다고 예언을 했어요. 물론 그 친구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을 했고 난 기막힌 사랑에 빠졌고”
한참 얘기하시는데 번갯불이 번쩍 하면서 천둥이 친다. 전깃불이 잠시 천둥을 만나고 오는지 암흑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 뒤 오현 스님의 너무 웃기는 민담과 ‘언제까지나’ 노래에 얽힌 사연을 이 가림 신 달자 시인이 번갈아 가며 얘기 하시니 김 용직 선생님께서 기록해서 다른 이에게 들려줘야 한다며 자꾸 물으며 되풀이 외고 계셨다. 그 때의 그 신비스런 분위기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래도 궁금해서 봄밤 어느 날 전화로 고 김 남조 선생님께 문의하니
“특이한 재능이 있었지요. 총명해서 마녀라고 부를 정도로 강렬했고 헤르만 헤세의 생일이나 싯귀의 페이지를 외거나 무척 총명했는데 언제 그런 문인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떠나기 일주일 전 신세계백화점 동화방송에서 물건 값을 알아맞히면 선물을 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는데 손에 멍이 들어 있어 물었더니 외출하려면 옷을 찾아 입어야하는데 딸이 케비넷을 잠궈서 그 문을 두드리다가 멍이 들었다고 그래서 참 이상하다 생각했을 정도로 광끼가 있었어요. 그것이 마지막이었어요. 언젠가 충무로 길에서 만났는데 딸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는데 그 영화는 6세의 딸이 골랐다고 하여튼 상식적이 아니고 이해하기 곤란할 정도로 특이했습니다. 집중력이 좋고 고혹적인 사람인데 손금을 봐주기도 했어요. 임신해서 배부른 자신의 몸을 거울에서 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고 남편과 불화가 있어 별거했는데 그의 하숙집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에서 넘어져 멍이 들기도 했다는 얘길 들었고. 잠이 안와서 늘 독한 수면제를 먹곤 했는데 그녀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자살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은 아니고 수면제 과다복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워하시며 “살다보면 갑자기 조시를 써야 할 가슴 아픈 일도 많더군요.”급히 찾아본 김 남조 시인의 조시를 음미해봅니다.
흰 눈발 더 희게 희게
-전혜린씨 영전에
그대 꽃다운 나이에/하마 생명의 잔을 비우고 떠나는/허적한 모습이여
간간이 흰 눈발 뿌리고/ 그대 탄생 월의
보석 자홍 자류석에도/ 눈물이 괴었어라
총명하여 총명하여/ 불구슬처럼/ 빛나고 아프던 눈망울이여/그대 눈망울이여
아침 날빛에/ 저녁 으스름에 되살아나는/ 영 못 잊을 눈망울이여/ 새삼 사람의 무상을/그대로 해 알겠거늘/고단한 어족 떼처럼 지쳐/ 흰 목덜미 더욱 외롭던 이여/ 허지만/ 유한이야 없으리
그대가 받은 시간과/사랑/ 남김없이 다 쓰고/ 첫 새벽 흰 원고지 위에/ 한 자루 촛불 타듯/ 눈 감은 이여
흰 눈발/ 더 희게 나부낄 저승길을/너그러운 마음씨로/ 부디 모든 일 다 잊고 가라
거의 십년 전 추억에 푹 빠지는 귀한 시간이다. 아무튼 젊은 혈기에 필자도 전혜린을 핑계로 더 화끈한 생을 살아보려 마음도 먹었을 텐데 아직 살아있어 참 다행이다. 늦바람이지만 다시 스카프를 쓰고 다니고 싶다. 서서히 지금 스카프 유행이 오고 있는 것 같다. 젊은 그 시절엔 전혜린을 닮고 싶었지만 점점 나이 들면서 고 김 남조 선생님의 매력을 찾아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새침하고 사람도 가려만나는 분이지만 필자에겐 참 친절한 분이셨다. 행사장엔 거의 잘난 젊은 남자 시인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격려의 인사말도 아주 깔끔하게 하셨다. 선생님은 계산 성당 가까운 대구 출신이이고 천주교 신자여서 대구 오시면 꼭 계산 성당을 들리시는 것 같았다. 필자가 대구에서 왔다며 가끔 저녁도 사주시고 서울역까지 태워주시기도 하셨다. 특히 처용아내의 ‘휴화산이라예, 웬생트집’ 등 시낭송을 좋아하셔서 어느 행사장에서라도 기어이 불러 세우곤 하셨다. 심지어 식당에서 여러 시인들이 모여 밥 먹다가도 ‘정 숙씨 노래 한 곡 불러 봐요.’ 선생님은 ‘그리운 금강산 ’가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기에 ‘동심초’를 속삭이듯 부르기도 했었다.
나이 들어서 그런지 후배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고 김 남조 선생님께 배우고 싶었다.늘 관심을 가져주셔서 어느 날은 처용씨 한테 뭐라 말하고 왔느냐 물으셨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 하고 왔다고 하면 소리도 없이 크게 웃으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때는 전화로 선생님의 효창동 집에 오라고 하셔서 거절할 수 없어 고기 조금 사들고 찾아갔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말로 눈치 없는 것 아니었나 후회가 되기도 한다. 맛있는 점심까지 준비하시고 하늘색 홈웨어도 선물로 주셨다. 슬쩍 연애를 하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 민망해서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남편인 건축가 김 세중 선생님이 새로 짓고 돌아가신, 세간이 떠들썩했던, 이층집이었는데 입구 현관천장에 구멍을 뚫어 키 큰 나무를 잘라내지 않고 살렸던 것이 인상 깊었다. 그 당시 풍수에 대해 뭘 안다고 ‘아, 이건 아닌데 나무가 주인보다 키 크면 안 되는데’ 그리고 창가에는 무거운 조각품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집이 지금은 ‘예술의 기쁨’이란 문학관으로 새로 지어져 필자가 시학 동인회 전국 회장 때 모두 모여 행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 때 선생님, 교수님 둘 중 어떻게 불리는 게 좋으냐 물었더니 ‘선생님’으로 불러주는 게 좋다고 하시고 행사 내내 같이 앉아 계셨다. 노래방처럼 떠들고 노는 후배 시인들의 모습에 박수치며 노래 잘한다고 이만원씩 상금도 주셨던 것 같다.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 김 남조 선생님이 어느 배우를 사랑했고 어느 시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런 것 보다 후배들을 사랑하고 살피는 그 마음을 닮고 싶은 것이다. 처용아내 정 숙 시인이 어쩌다 행사에 참석하면 ‘정 숙 시인 노래해라, ‘왠생트집’ 낭송해라! 처용아내 정 숙 시인이 나타나면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그런지 어느 날은 유안진 선생님이 곁을 지나면서 슬쩍 ‘안 정 숙, 무 정 숙 ,반 정 숙 하며 지나가셔서 그 모습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한 십년 뒤 어느 날 유안진 선생님이 메일을 보내셨는데 ’미안하다고, 옛날 ‘안 정 숙, 무 정 숙 ,반 정 숙 하며 지나갔던 일이 미안하다고, 선생님의 이런 점도 닮아야할 것 같다.새카만 후배한테 사과하기도 힘들 텐데...
말만 처용아내이지 너무 세상모르고 수단도 눈치도 없으니 그런 기대를 져 버리게 한 필자에게 쪼다 같은 여자, 빙신 같은 여자시인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여자시인일까? 라며 ‘정수기, 그 여자시인’ 이란 시를 써서 보내준 평론가 고 김 재홍 교수님께서 1993년 시인 등단식을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전국 유명 시인들을 거의 다 모아 팔공호텔에 일박하면서 열어주셨고 김 재홍의 사투리 시어 사전에 많은 시어들 수록, 현대시 백년 기념 명시에 웬생트집을 수록할 정도로 필자에게 많은 정성을 쏟으셨는데 정말 죄송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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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 팔공호텔 아침 커피 숍에서 오 세영 교수님이 ’시를 보통 18행에 담아야 시집 한 페이지에 넣을 수 있고 쓸데없는 말을 줄이게 된다.‘ 며 창가에 핀 나팔꽃을 사랑으로 이미지화 하는 시론을 단둘이 앉아 조곤조곤 얘기 하시던 모습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시학의 정 진규 선생님은 필자의 <연인, 있어요> 시집을 받으시고 시집 중 ’전등사‘ 연작시 중 한 편을 전화로 끝까지 읽어주시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러고 한 달 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시인들이 왜 그렇지? 어느 평론가가 상도 주고 힘 좋을 때 그렇게 손 비비며 따라다니더니 고인이 되고 나니 그냥 모여 앉으면 흉보고 욕하네‘ 한탄하시던 오 탁번 교수님도 한 달 뒤 돌아가셨으니 선생님의 마지막 시집에도 그런 서운한 마음 표현한 시들 남겨놓으시고...
어쨌거나 정 숙의 <신처용가> 처용아내 연작시 첫 시집 때문에 삼십년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낭송과 시극으로 한 시절 정말 화려하게 보내고 있어 두루두루 감사할 따름이다. 많은 시인들에게서 닮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특히 이 태수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철모르고 우리문학에 등단한 필자에게 시 전문잡지 1993년 ‘시와 시학’에 재 등단하는 길을 알려준 선생님이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다. 그리고 고 박주일 선생님은 대구문학아카데미의 시 창작교실을 필자에게 물려주시느라 많은 괴로움 당하셨지만 그 덕분에 필자가 도서관에서 인터넷으로 평생 시를 가르치는 강사로 지내고 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분은 고 문 인수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대구문학아카데미 정 숙 반 행사에 자주 참여하시면서 현대시 공부를 새로 열심히 하신 분이다. ‘당신도 시인이 될 수 있다’를 교과서로 삼아 공부하면서 먼저 출간한 시집 두 권은 버리고 싶다며수시로 이미지 연습을 하셨다. 예를 들자면 정 숙의 제자가 함박도 선주인 아버지가 배 타고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시면 딸이 세수 대야에 물 받아 아버지 발을 씻겨드렸다는 그 얘길 차 안에서 듣고 내리면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쥐어주고 그것을 ‘닻’ 이란 명품 시를 썼으니 그 외에도 ‘곶, 저 빨간 집’은 김 미선 시인의 친정집 이야기를 듣고 같이 가보고 멋진 명시로 탄생시키는 시에 대한 그 끈질긴 열정을 닮고 싶은 것이다. 종종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라며 남몰래 현대시 공부를 이 악물고 하신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도 정숙 반 모임 시간에 자주 선생님 얘길 나누게 되는 것이다.
여러 선생님들의 후배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 필자는 범어 커뮤니티 센터와 용학 도서관에서 재능기부를 즐겁게 하고 있다. 수다스레 길게 늘어놓은 이야기들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차피 한번 정리해야 될 일이기에 심 후섭 선생님의 원고 청탁 덕분으로 한 시름 놓게 되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저와 인연이 있던 분들은 다 저의 스승이어서 고맙고, 필자의 가슴을 입가시로 찌른 분들도 그 덕분에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으니 감사드립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