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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故 박주일 유고시-
관리자 | 조회 2
대구문학아카데미의 방-故 박주일 유고시-
정숙추천 0조회 8209.06.11 11:21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故 박주일 유고시-

 

 

 

쉬어서 간다

 

 

 

나무들도 쉬어서 간가.

‘마디’다.

쉬어서 간 자리

피곤이 고여있다.

물기가 모여있다.

스스로 다독거리는 흔적이 보인다.

사람에게도 마디기 필요하다.

조용한 생각들이 모여있다.

 

 

 

 

물속에 빠져있는

 

 

 

물속에 빠져있는

하늘과 구름

구름은 끝내 물 밖으로 나가버리고

 

산 어깨 하나가

물 안에 들어왔다.

자작나무며 떡갈나무도 데리고

왔다.

구름이 다시 제자리에 왔다.

구름 또한 산새

울음 몇 점까지 몰고 왔다.

내 생활의 일부가

물속에 있다.

 

 

 

 

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말이 없다.

다만 표정이 있을 뿐이다.

 

거울 안으로

귀뚜라미 울음이 스며있다.

귀뚜라미 울음 몇 줄이

보인다.

 

내 가까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약봉지들이다.

알이 고운 것들은

독의 빛깔이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빨간 알약 하나.

알약의 온몸이 독기에 꽉 차 있다.

그래도 삼켜야 한다.

기다리고 있는 알약

세 개.

 

 

 

유리창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유리창이 서 있는 부분

그 면적만 하얗다.

이미 방은 어둠으로 꽉 차 있다.

어둠이 오다가

유리창의 폭만큼 남겨두고 나머지는

까맣게 먹어버렸다.

나는 시방 그 먹힌 쪽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가슴의 절반은 이미

가을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참새들은 벌써 제 집들로

가버리고

어둠이 모두를 덜어버리고

조여든다.

유리창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물어

안 보인다. 뼈대만 앙상하다.

 

 

 

아득하구나

 

 

 

생각 끝에

소나기가 몰래 왔다.

 

이제 그대도 알겠지.

철없던 시절

실없는 일이란 것을 알겠제.

 

가슴 한 쪽이 폭 패이고

무성하던 숲이 폐허가 되고

 

겨울이 왔구나.

철없이 또 눈발이

간혹 내릴 것이네.

 

그렇게 되면 다시

잊힌 것들이 조금씩 살아나서

눈발 속으로 끼어들 것이다.

 

오, 살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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