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주일 유고시- 쉬어서 간다 나무들도 쉬어서 간가. ‘마디’다. 쉬어서 간 자리 피곤이 고여있다. 물기가 모여있다. 스스로 다독거리는 흔적이 보인다. 사람에게도 마디기 필요하다. 조용한 생각들이 모여있다. 물속에 빠져있는 물속에 빠져있는 하늘과 구름 구름은 끝내 물 밖으로 나가버리고 산 어깨 하나가 물 안에 들어왔다. 자작나무며 떡갈나무도 데리고 왔다. 구름이 다시 제자리에 왔다. 구름 또한 산새 울음 몇 점까지 몰고 왔다. 내 생활의 일부가 물속에 있다. 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말이 없다. 다만 표정이 있을 뿐이다. 거울 안으로 귀뚜라미 울음이 스며있다. 귀뚜라미 울음 몇 줄이 보인다. 내 가까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약봉지들이다. 알이 고운 것들은 독의 빛깔이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빨간 알약 하나. 알약의 온몸이 독기에 꽉 차 있다. 그래도 삼켜야 한다. 기다리고 있는 알약 세 개. 유리창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유리창이 서 있는 부분 그 면적만 하얗다. 이미 방은 어둠으로 꽉 차 있다. 어둠이 오다가 유리창의 폭만큼 남겨두고 나머지는 까맣게 먹어버렸다. 나는 시방 그 먹힌 쪽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가슴의 절반은 이미 가을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참새들은 벌써 제 집들로 가버리고 어둠이 모두를 덜어버리고 조여든다. 유리창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물어 안 보인다. 뼈대만 앙상하다. 아득하구나 생각 끝에 소나기가 몰래 왔다. 이제 그대도 알겠지. 철없던 시절 실없는 일이란 것을 알겠제. 가슴 한 쪽이 폭 패이고 무성하던 숲이 폐허가 되고 겨울이 왔구나. 철없이 또 눈발이 간혹 내릴 것이네. 그렇게 되면 다시 잊힌 것들이 조금씩 살아나서 눈발 속으로 끼어들 것이다. 오, 살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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