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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여름 시와시학 등단작
관리자 | 조회 8
93년 여름 시와시학 등단작
정숙추천 0조회 716.06.14 14:43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빛

 

여름 밤 먼 산봉우리

불빛

외로이 어둠을 깜박이고 있다.

어둠은 불빛마저 삼키고 깊어간다.

가쁜 산길은 밤을 기어오르고

난 어둠의 꽁지 잡고 끌어내리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둘레는 송두리째 어둠에 파묻히고

산봉우리 점점 지워진다.

 

 

섬바위

 

파도는 훌쩍 떠나버리고

섬바위는

발 담근 채 하늘만 바라본다.

때로는 참다못해 파도를 향해 뛰어들며

하늘을 온통 뭉게버린다.

하늘은 쪼개지고

구름도 달아나고 한참 후

파도를 끌고 서서히 다가선다.

바람이 화들짝 놀라 잠시 흩어진다.

 

 

 

 

 

 

 

 

 

 

 

주먹 속의 햇살

 

뜨락에 서서

한 줌의 햇살을 쥐어본다.

쥔 순간 그것은 이미 멀리 사라진다.

주먹 속엔 그림자만이

시리게 남아있다.

고독이 피어오르고

구름 한 조각 떨어지며 흘러간다.

내 살아온 나날들이 떡ㄱ갈나무 잎인 듯

바람따라 사방으로 흩어진다.

 

불도저와 두 주먹

 

불도저의 손아귀로 밀어부쳐지는

친정 과수원 언덕 길

신명나는 콧노래는 멀리 날아갔다.

아다다처럼 고개 살래살래 흔드는 코스모스들

목만 자꾸 길어진다.

어린 시절의 별이 들어있는

원두막을

몽땅 밀어붙인다.

불도저 앞에 선

안쓰럽고 부끄러운 자신의 두 주먹

코스모스 한 아름 안고 깊이 얼굴을 파묻는다.

눈 속에 감춘 별들이 쏟아질까봐

두 눈 꼬옥 감는다.

 

며느리 땅향나무

 

비가 내린다.

낮게 흐르는 안단테 칸타빌레

어둠은 흐린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본다.

비는 가슴 구석구석 뿌린다. 젖는다.

그 그늘 아래서 풀죽은

며느리 땅향나무, 허리 쓰다듬으며 비 내린다.

가시나무 뽀족한 그늘 더욱 깊어지고

제 몸 이기지 못해 바람을 등에 지고 휘어진다.

다시 일어나는 땅향나무

가슴 속 빗줄기 더욱 굵어진다.

 

낡은 테이프

 

1

 

옷장 서랍을 정리했다. 낡은 카세트 테잎 속에서 하얀 면사포 쓴 나를 만났다. 호수에 던진 돌 파문 지는 새 이십년이 미끄러져 흘렀다. 까마득한 기억 속 결혼행진곡. 묵은 세월이 삐거덕거렸다. 비바람에 무뎌진 가슴살이지만 아직도 봄바람 저만치서 떨고 있는 여린 자신을 꿈꾼다. 주례사는 끊가고, 테이프는 멈추고, 생각에 잠겨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박제된 생활에 끼어든 먼지들. 가슴 속 불씨가 꺼져가는 것 같아 남은 재 다독거린다. 실꾸리에 감긴 실 끝이 닳고 닳아서 실낱같은 인연마저 끊어질까봐 오마조마. 내일은 고장난 테이프를 되살려야지.

 

2

 

빛바랜 흑백 결혼사진을 벽에 걸었다. 거미줄에 묶인 나비처럼 두 사람, 파르르 떨며 얽혀있었다. 파도와 바위되어 으르고 달래던 세월 속, 거센 폭풍 몰아치면 서로 부수고 할퀴었다. 가슴 밑바닥엔 모래알들이 세월만큼 쌓인 무게, 끝내 지탱하지 못해 사진틀이 떨어져 깨져버렸다. 두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번쩍 든 정신으로, 눈빛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아 정성스레 짝 맞추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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