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여름 밤 먼 산봉우리 불빛 외로이 어둠을 깜박이고 있다. 어둠은 불빛마저 삼키고 깊어간다. 가쁜 산길은 밤을 기어오르고 난 어둠의 꽁지 잡고 끌어내리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둘레는 송두리째 어둠에 파묻히고 산봉우리 점점 지워진다.
섬바위
파도는 훌쩍 떠나버리고 섬바위는 발 담근 채 하늘만 바라본다. 때로는 참다못해 파도를 향해 뛰어들며 하늘을 온통 뭉게버린다. 하늘은 쪼개지고 구름도 달아나고 한참 후 파도를 끌고 서서히 다가선다. 바람이 화들짝 놀라 잠시 흩어진다.
주먹 속의 햇살
뜨락에 서서 한 줌의 햇살을 쥐어본다. 쥔 순간 그것은 이미 멀리 사라진다. 주먹 속엔 그림자만이 시리게 남아있다. 고독이 피어오르고 구름 한 조각 떨어지며 흘러간다. 내 살아온 나날들이 떡ㄱ갈나무 잎인 듯 바람따라 사방으로 흩어진다.
불도저와 두 주먹
불도저의 손아귀로 밀어부쳐지는 친정 과수원 언덕 길 신명나는 콧노래는 멀리 날아갔다. 아다다처럼 고개 살래살래 흔드는 코스모스들 목만 자꾸 길어진다. 어린 시절의 별이 들어있는 원두막을 몽땅 밀어붙인다. 불도저 앞에 선 안쓰럽고 부끄러운 자신의 두 주먹 코스모스 한 아름 안고 깊이 얼굴을 파묻는다. 눈 속에 감춘 별들이 쏟아질까봐 두 눈 꼬옥 감는다.
며느리 땅향나무
비가 내린다. 낮게 흐르는 안단테 칸타빌레 어둠은 흐린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본다. 비는 가슴 구석구석 뿌린다. 젖는다. 그 그늘 아래서 풀죽은 며느리 땅향나무, 허리 쓰다듬으며 비 내린다. 가시나무 뽀족한 그늘 더욱 깊어지고 제 몸 이기지 못해 바람을 등에 지고 휘어진다. 다시 일어나는 땅향나무 가슴 속 빗줄기 더욱 굵어진다.
낡은 테이프
1
옷장 서랍을 정리했다. 낡은 카세트 테잎 속에서 하얀 면사포 쓴 나를 만났다. 호수에 던진 돌 파문 지는 새 이십년이 미끄러져 흘렀다. 까마득한 기억 속 결혼행진곡. 묵은 세월이 삐거덕거렸다. 비바람에 무뎌진 가슴살이지만 아직도 봄바람 저만치서 떨고 있는 여린 자신을 꿈꾼다. 주례사는 끊가고, 테이프는 멈추고, 생각에 잠겨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박제된 생활에 끼어든 먼지들. 가슴 속 불씨가 꺼져가는 것 같아 남은 재 다독거린다. 실꾸리에 감긴 실 끝이 닳고 닳아서 실낱같은 인연마저 끊어질까봐 오마조마. 내일은 고장난 테이프를 되살려야지.
2
빛바랜 흑백 결혼사진을 벽에 걸었다. 거미줄에 묶인 나비처럼 두 사람, 파르르 떨며 얽혀있었다. 파도와 바위되어 으르고 달래던 세월 속, 거센 폭풍 몰아치면 서로 부수고 할퀴었다. 가슴 밑바닥엔 모래알들이 세월만큼 쌓인 무게, 끝내 지탱하지 못해 사진틀이 떨어져 깨져버렸다. 두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번쩍 든 정신으로, 눈빛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아 정성스레 짝 맞추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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