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 꾸욱, 거칠게 누르다가
살 ,사알 간질이듯 힘을 빼면서
붓은
듬뿍 머금은 먹물 한지에 뱉어낸다
삶기고 치대어진 닥나무의 한이 제 몸 벼루에
갈아 새로운 생을 꿈꾸는 먹물, 걸신들린 듯 빨아
들인다 한과 꿈이 서로 스며들면서 한 몸으로 용
트림한다 숨결 끓어오른다
서로의 아픔 포용하며 천천히 가라앉힌
한지와 붓의 포옹
불꽃은 연기 한 점 없이 화르르 타오른다
온 세상 환해지면서
햇살 듬뿍 머금은 백련 한 송이 피어난다
간절한 꿈이 살아 통증과 만나야
화엄향기 품은 연꽃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걸
묵언으로 보여주시는가
수묵화 한 점, 새삼 거룩하게 읽는다
1
인생
의자 하나 끌고 가려다
죄인처럼 의자에 끌려 다닌다
어린 엉덩이 하나 걸칠 수 없는
작은 의자
평생토록
마음 편히 앉아보지 못한 채
2
연서 戀書
네가
허기진 먹물이라면
나는
타는 듯 목마른 한지
무조건 만나 우리 서로 스며들어
샘물 솟아나야
몇 송이 붓꽃 아슴아슴 피어나리니
하늘 열쇠 간직한 열매를 꽃 틔우리니
3
사랑, 해
범어숲 새들에게 먹이 한 상 차려놓은
해, 더 멀리 살피려 종일 몸 기울이다가
벌겋게 피로에 취해버린다
끝내 밤바다로 가라앉는다
삐딱한 지구 자전축 위 나지막이
몸 기울여
낙엽 덮고 잠자는 겨울 씨앗들
밟힌 풀꽃의 상처 깊숙이 온기 넣어주려는
넉넉한 길, 날마다 바라보면서도
홀린 듯 나는 꼿꼿이
먼 하늘 눈빛만 바라보다 하루를 마감한다
해는, 어둠에 갇힌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온 정성 다 기울이는데
몸마음 깊이 기울이는 것, 그것이 진정
햇살사랑법이라는데
4
봄, 설해목
몸은 무디어져 뻣뻣해지는데
마음 밑뿌리부터 끓어오르는
저 환장하는 원죄,
그리움이 휘날리는 벚나무 아래서
내 그림은 승무를 춘다
하이얀 고깔은
꽃과 향기를 옥죄는 신들의 말씀
죄 없는 한지 찢어지도록
욕망의 그늘 색칠한다
연분홍 색깔까지 덧바른다
바람은 창문을 뒤흔들며
울부짖는다
살빛 꽃 이파리들 흔들어 깨운다
멀리 멀리 날려보낸다
날아가는 꽃잎들 맨발 시리다
내 그림에도, 봄밤에도 때 아닌
사월 눈발
그 아득한 눈 무게
툭, 마음 가지 하나 부러뜨린다
5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청매화 피어나는 열사흘 달밤
거울을 보며 물안개 빛 머리카락 비비꼬아 돌리다가
젊은 날 그려두었던 그림을 다시 살펴본다
겨우 A포 용지 두 장짜리 크기의 한지에
참 많은 꿈 그려 넣었구나
새하얀 물감으로 붉은 연꽃송이들과 연밥들 지워보다가
걷잡을 수 없던 욕심들, 양심에 걸린다
진한 먹물로 그 많은 새와 나비들 마구 지워버린다
흉한 상처로 온통 얼룩자국만 남는 나의 세월들
그 흔적 무게에 짓눌린 나의 한지는
달빛도 지나 가버린 어두운 봄밤을 지새우는데
그래도 미련이 다 지워버리지 못한
창백한 나부상은 슬픈 눈빛으로 도톰한 입술 달싹거린다
노오란 나비 한 마리와
청승스런 봄 달빛 그윽이 바라보면서
6
화경花經을 읽다
무리무리 손잡고
비슬산 중턱 능선을 오르는 저 구도자들
나목으로 서서 겨우내 제 몸 채찍질하더니
무얼 깨달았기에 온 세상 저리 환하게 밝히는가
꽃이라고 다 참꽃은 아니지
봄바람
남실남실 연분홍보라 화경花經을 읽는다
장엄한 그 향기에 취해
대견사 새 법당 풍경을 어루만지며 깨운다
댕그랑, 댕그랑, 그 소리 새침히 날아올라
하늘운판 깨져라 두드린다
정작 깨지는 것은 바람소리의 깃털들
떨어져 내리면서 진달래 꽃잎에 앉아
봄날의 야단법석 펼친다
7
벽난로
내 가슴 아무리 뜨겁다고 우겨도
네가 불붙여주지 않으면
성냥 한 개비 불꽃보다 못한
빈사랑
꽁꽁 얼어붙은 속살
식은 재 폴, 폴 날리는 철길연정 틈 사이
‘나, 여기 있어!’
초승달 눈빛공명 마냥 기다릴 수밖에
8
청바지 순정
예순도 반이 지나 이제 처음 입어본다. 허벅지에 모무母舞를 휘젓듯 그려 넣고 봄밤! 글자도 삐딱하게 두 개의 ㅂ잔끼리 입술 마주치는 형상으로 의기양양하다. 쌍스럽다며 순정을 끝까지 고집 부려볼 작정 이었는데 왜 이제 이 나이에 자신이 생긴 걸까?
하필 그 날 어느 행사에 문무학 시조 시인이 무대 위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서 시가 무엇이냐? 는 질문에 시는 청바지라고 하였다. 그래 저 자신감! 시는 내게 자신감을 주었었지. 감히 처용아내라며 세상을 휘젓고 다녔었지
처용아내, 그녀는 바람쟁이가 아니라며
바람을 피웠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현모양처가 꿈이라며
시집이란 늪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만 내려 보다가 이게 웬 눈 튀어나올 사단인가?
9
하늘문 열쇠
노옹이시여!
벼랑 끝 위태로이 오르셔서
꽃 한 송이 꺾어 노래 부른다 고
아녀자가 함부로 그 곳 열쇠를 드리겠나이까?
남들이 다 탐내는 나비라 하여도 담장 너머 꽃잎에서
넌출넌출 파도타기만 즐기는 그대, 바지춤에서 흘러내리는
꽃가루, 꽃가루들 그 독소에 눈멀까 두렵습니다
허나 빛바랜 머리칼로
한 여인의 봄날 따라 구름 위 오르려는
끓는 가슴, 하 살갑고 눈물겨워
빗장 단단히 걸린 열락의 쪽문 열쇠 드리오니
부디 깃대 꼿꼿이 세워, 길 찾아 드시어
붉은 철쭉 흐드러지게 타는 불내음
한껏 흠향하시오소서!
10
씨앗들, 징을 치다
사층 베란다에 갇힌 봉선화, 몹시 다급한가 보다
붉게 꽃 피워 여문 씨앗을 터뜨리기 위해
내 어둔 상념의 숲 그늘까지 밟아대고 있다
두꺼운 유리창을 넘어 들어온
봄, 여름 햇살을 잘라 머금고
성질 마른 이에게
기다림이란 낙타 없이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길
길고 촘촘한 속눈썹으로 바람모래 삼키며
신기루 물빛에 멱을 감으면서
고운 꽃물 길어 올리느라 펌프질하고 있다
그 간절함으로
살아온 날들을 뱉어내기보다 달게 씹어야 한다
뽀드득 맛있게 자근자근 씹을 줄 아는 이만이
오아시스를 맞이할 수 있다
어둠은 나를 깨우고
가시오갈피 나무 사이로 끌고 다니면서
손등과 얼굴을 찔러 핏자국을 남긴다
그 핏자국이 바람을 깨우면
시린 바람이 숨은 한을 깨우고
그 한이 시를 쓰면서 징을 친다
그래, 살다가 저렇게 너 나 없이 스며들어 절정에 몸 부르르
떠는 때 있어야지 그래야 짧은 생, 살맛나지
대찬 거목들과 돌탑 쌓느라 갈증에 시달리는 키 낮은 나무들, 서로
엉켜 꽃대 올려야 어둔 뜨락 밝힐 수 있지, 함께 푸른 하늘 바라볼 수
있지
물에서 불 찾아 꽃 피우는 그 이치 풀뿌리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나무들도 깨닫고 있었는데
무궁화 꽃송이들만 스며들 쥴 모른다
서로 똑똑한 척
비가 물이지 불이냐 싸움질이나 하면서
12
늦가을파장
여름내 꽃피워 웃음 파느라 지친
늦가을 연들이
연지저자에서 넘실대던 초록과 분홍, 다홍빛 전을
서둘러 거두어들이고 있다
난 아직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손톱에 들인 봉숭아 꽃물 지워지지 않고 있는데
13
사월에 눈 내리다
새벽부터 눈발이 창문 귀를 내린다
겨우 눈뜬 산수유 꽃봉오리도
정화조 지붕도 순식간에 칼처럼 얼어 빛난다
어떤 창끝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은
긴장력
그러나 옅은 햇살이라도 떠오르면
금세 질척질척 녹아내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한번 빛나기도 어렵지만
하얗다는 것은
칙칙한 때죽 나무 색에 가까워지기 쉬운 것
지상의 빛나는 것은 모두
금세 질척거리며 사라지는 허상일 뿐
14
흰색을 덧칠하다
색 물감을 칠하다 보면
한지가 갈증이 나는지 자꾸 흰색을 부른다
한번 멋대로 칠해놓은 그림이
자꾸 흰 물감으로 덧칠한다
뜻대로 지워지지도 않는데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칠하고 또 칠한다
겁 없이 세상 마구 사는 것도 아닌데
때론 붉은 색 열정으로 저질러 놓은 것들이
금세 검은 빛으로 변하여 윽박지르기도 해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후회에 흰색 입힌다한들
어디 마음이야 변하겠는가
그래도 뒤늦은 염불에 색칠이라도 해야만
숨 쉴 수 있을 것 같으니
오늘도 비색을 발하는 내 양심에
참회의 흰 물감을 덧칠하고 있다
15
제 2부
방천시장엔 처용아내 치맛자락이
-방천연가 1
아파트 발코니의 천리향과 행운목 꽃향기 보내고 나니 이제 또 학쟈스민이 다 닳아버린 나의 봄 미치게 흔들어댄다
견디다 못해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 거닌다. 아직도 낡고 좁은 장터 골목길, 그러고 보니 이 근처 삼덕동, 대봉동 참 오래도 살았었다. 꼬꼬댁! 꼬! 꼬! 구원을 청하던, 닭 잡던 그 탈모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단발머리 중학생, 쫑쫑 땋아 내린 여고생, 긴 머리 출렁이던 대학 첫 가든파티, 라일락 향기 시절에서 넓고도 낡은 적산가옥에서 시집살이 십 오년 뒤 범어동 아파트로 이사 갔지만, 처용아내의 햇살과 어둠의 비빔밥, 그 찬란한 눈물 비비다가 부서진 조각 사금파리들이 시장 좁은 골목길에 버려져 있다.
그 조각들 주워 맞춰보니 잘 다듬어진 맏며느리의 탑 하나 세워보겠다던 그 오기, 몸빼 바지나 월남치마 길게 끌며 장보기 짐에 이끌려 가는 자랑스런 내 청춘, 존심 세워 처용가를 부르며 칠칠맞은 손 흔들어대고 있다.
16
콩나물시루
-방천연가 2
방천시장 떡 방앗간 겨울 담에 기대어 햇살바라기하며
정을 소복소복 키우던 합죽할머니
백 원 어치 사면서 ‘쬐매만 더 주이소 할매’
단발머리 자취생 단골에 ‘오야, 마이 무라’ 잇몸 웃음으로
한줌 더 얹어주시더니
지금쯤 하얀 날개 달고 초로의 그 소녀 웃고 계시겠지?
17
고추기름, 눈 뜨다
-방천연가 3
예, 예, 죄송합니더!
삼덕동 적산가옥에서 펌프질 사흘토록 마당 씻으며
점점 가정부로 전락하다가
거의 십년 뒤 동서 둘 보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빠알간 고추기름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는 걸 눈 뜨게 되었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 동서가 온 날
몸빼이 입고 시장에 고추 빻으러 갔다가
기다리는 동안 혼자
바로 맞은 편 소고기 국밥 한 그릇 후루룩 삼켰다
와 이리 늦었노?
늦장부리며 돌아온 맏며느리에
굵은 소금 씹으며
꾸중하는 시어머님께 입 꾸욱 다물었다
쉬잇! 첫 반항, 몇 십 년 지난 특급 비밀인데
며느리는 끝내 한 식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고추기름은 언제든 거둬 내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때도 깨닫지 못했었다
18
탈모통엔 내가
-방천연가 4
고추방앗간, 참기름 집 옆 떡집 지나면
닭 집이 있었다
철사 얽어맨 통 속에 갇힌 닭들이
게으름에 길들여져 발톱만 기르고 있었다
내 손짓에 목숨 달린 그들은
한 생을 맘대로 요리한다고 날 거만스럽다고 욕했겠지
탈모통 속 돌아가며 탈 뽑히면서
날개 푸득거리는 그 소리 참말로 미안했었는데
털 뽑히는 그 모습이
시집살이 입방아에 시달리는 한 여자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
푸른 다리 아래서
-방천연가 5
먼 먼 칠석날 눈물 머금고 흘러온 미리내 줄기, 흐르다가 애달븐 연인들의 가슴 소용돌이 풀지 못해 새내 웅덩이에서 맴만 돌고 있다네 땡그랑, 댕그랑, 물결 속 열사흘 달빛기둥 위 작은 은종을 간절하게 치며 기도하면서
그 종소리 듣고 자란 피라미들 뒤엉킨 은하수 전설을 풀어 무지갯빛 천을 짜고, 그 그리움을 내 청춘의 검고 긴 머릿결에 둘러주던 눈 시리도록 아린 그림자! 너는 뭇 세월 견디느라 날금해진 신천 푸른 다리 아래서 누굴 기다리는가
그 여름날 천둥 비바람 가려주던 우리들의 청춘, 그 우산은 멀리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없는데
20
신천, 수달에게
-방천연가 6
1.
이제 돌아온 거니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열심히 살다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고픈 웃음에 깊은 주름이 질 때
동신교 열사흘 달빛 아래서 만나자던 약속 지키려
돌아온 거니
엄마의 젖가슴 같은 풀밭은 사라지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새내를 흐르는 달빛 속
우리들 젊은 날의 희미한 그림자를 찾고 있는 거니
그 시절 비바람 가려주던 너와 나의 우산은 이미 멀리 날아 가버렸다 치더라도 그리움 남아 맴돌던 웅덩이마저 사라져버렸으니 그러나 조용히 저 물결 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 므나 부드러운 흙더미에 기대 앉아 보름 달빛을 맞이하던 그 낭만의 밤, 서로 길들여져 있던 푸릇한 몸향기 멀리서 울려오는 징소리처럼 은은하게 느껴지지 않니 네 아슴한 추억의 징채로 바람의 징을 두드리면 그 떨림의 파장 따라 달빛이 흔들리고 세월 따라 굳어진 응어리들 서로 만나 춤을 추리니
세상 벽과 벽 사이의 차가움
긴 두려움과 한숨으로 여문 옹이들
흐물흐물 녹아내리도록 우리 앞뒤 따지지 말고
힘껏 껴안아 보자 꾸나
오늘 밤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자 꾸나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그리움을 함께 앓고 있는
너, 수달아!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거니
2.
사랑은 무작정 믿음이 아니었어
그 아름다운 말은 환상이었어
서로 소중할수록 자신이 부족할까봐 늘 불안했지
네 눈부처에서 돌아선 그 순간부터
지금 네 눈 속에 누가 들어앉아 있는지
나의 손길이 거칠지 않았는지
그 의심의 미궁에 빠져 점점 멀어지게 되었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서로의 시선 벗어날 수 없어
때론 그리워하고 때론 환상을 할퀴고 물어뜯으면서
바다 속으로 기찻길 놓으면서
온라인으로 그리움 부치면서
일단 서로의 눈부처 되기 위해 만나야 한다
가까이서 체온을 느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지
사랑이란
잠깐 돌아서기만 해도 의심의 눈덩이들이 불어난다는 사실
너도 깨달은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돌아온 것 아니겠니
넓은 금호강 하구에서 애타게 부르는 네 애절
새내 다리 아래서 거친 손마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네 커다란 눈망울의 슬픔
서로 쓰다듬으며 어울려 같이 강바람을 끌어안아야
그 틈 사이 크렁, 크렁, 정다운 공명이 생기지 않겠니
부드러운 들판 펼쳐지며 풀잎들 새파랗게 돋아 오르지 않겠니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그리움을 함께 앓고 있는
너, 수달아!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거니
열사흘 달이 수줍게 떠오르고
달빛이 다리 밑 물결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어
달빛체온을 끌어안는 신천의 숨결 차륵, 차르륵, 거칠어지고 있어
3.
쉿!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버드나무 아래로' 그 속삭임도 이제 소용없구나 하이얀 솜털 휘날리던 버드나무들 모두 베어버리고 흔적조차 없으니 사람들 우악한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들만 왁자하니 색깔 고운 사금파리 빻아 떡도 찌고 반찬도 만들어 상차림하며 난 엄마 , 넌 아빠 소꿉놀이 하던 그 곳을 찾을 수가 없구나 그 그늘이 없어 우린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는 구나 반질반질 검은 자갈돌 사이로 알록달록 채송화 꽃잎들 찧느라 물든 추억들 지금도 가슴에선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는데 너 어디 숨어 떨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니 막상 몸 숨길만한 바위도 하나 없는데
21
행복
--방천연가 7
온기 남아있는 가슴 언저리에
도톰한 입술 자국 꼬옥 부여잡고 있는
플로체의 모닝커피 잔에
간밤의 쌉쌀 달달한 외간향 음미하느라
초침을 부여잡고 떨고 있는
슬픈 사랑의 그림자들
그 짜릿한 상처 즐기느라
내 안에 숨은 장미 꽃봉오리들 곧 터질듯
새빠알갛게 부풀린다
22
김광석을 안다
-방천연가 8
멋진 맏며느리가 되겠다는 꿈 어리석다
등짝을 내리치며 시인의 길로 재촉하신
시어머님과 가족
물론 시인이 되라고 하진 않았지만
어릴 때 소설가가 되라던 아버지 말씀 기억하게
해주신 말씀과 약한 눈물들
눈 뜬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사십 중반에 찾은
늦깎이 시인, 그 길 또한 생판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니
징검다리조차 없는 큰 물길
황토물 소용돌이에 현모양처는 떠나보내고
이 봄날, 살아있는 것이 대견해 미선, 경화, 승태와
광석을 안고 벚꽃꽃송이 송이 화르르 꽃피운다
시인보다 더 아름다운 시로 사랑과
가난, 서글픔을 노래한 별, 벽화 속 기타 줄에
바람이 내려앉으려다 발을 바둥거린다
23
바보, 다듬이질
-방천연가 9
시아버지 직원들의 뽀프린 천 이불보 빨아 풀 먹이고 다듬이질해대느라 단순하면서도 친정 과수원 들장미 가시들을 불러 모으던 그 때 그 시절,
백서른 평 적산가옥 삼덕동 마당엔 마중물 먹은 펌프질 소리와 키 큰 리키시다 소나무 바람소리가 철퍼덕, 철퍼덕, 우! 우! 그리고 양동이에 물 받아 마당 청소하는 소란을 모아 합창을 했다
그 어울리지 않는 화음 한참 즐기던 참새들이 마당에 내려와 햇볕에 마르다가 남은 물에 깃털을 다듬는 한낮, 혼자 남은 맏며느리는 절간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바다를 꿈꾸기도 하다가
밥 한 끼 어려운 시절 셋째, 넷째 딸까지 대학공부 시켜준 아버지 어머니의 자존심에 어떻게 풀하고 다듬이질할 것인가 그런 골머리 추호도 없이 빛깔 고운 산호초가 분명 이 허허 집 안에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
24
시할머니 보살
-방천연가 10
충만에 못 이겨 벌어진 석류처럼 늘 이를 내보이며 웃어주던 자비 보살님, 대접받던 선생님 후광 버리고 어둠의 늪으로 웃으며 걸어 들어온 손부에게 등대처럼 불 밝히며 정으로 다독여주시더니
자주 누워서 힘, 줄을 당기시던 어머님에겐 맏며느리가 또 하나의 우울한 그늘이었을까?
사대 봉제사 장 볼 때마다 충실한 짐꾼이지만 책임감만 수놓은 앞치마 두른 살갑지 못한 며느리 때문에 어머님이 도리어 어른에게 따돌리는 기분 아니었을까? 신천 아카시아 향기에 내 한숨 속 낮달을 실어 보낸다
25
수선하다
-방천 연가 11
플로체에서 시화 전시회를 둘러본 뒤
시장 골목길을 걷는다
김광석 거리 탓인지
옛 건물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자잘한 술집들을 지나 ‘재봉틀 소리’ 집 장미들이
노랗고 붉은 꽃송이로 낡은 담장을 수선하고 있다
삼십년 지난 원피스를 첫사랑과 걷던 시절로
또는 신혼여행 길로 되돌려 주는 주인의
재봉틀 솜씨 들으며 늦은 봄 가꾸고 있는가
잠시 유리창에 비친 나를 돌아보다
두서없이 중얼중얼
“봄날도, 여름도, 가을까지 다 그냥 보내버리고
찬 서리 겨울늦바람에 몸부림치고 있는
어리석은 여자의 몸과 골진 마음을 다시
화사한 봄날로 수선해 줄 수는 없나요?”
26
번개탄 사랑
-방천 연가 12
시장 안 연탄 집이 어디였던 가 살피다
옛 삼덕동 집에 갇힌다
대책 없이 가정부까지 내보내버리고 혼자
하루 스무 장 까지 갈아 넣어야 하던 연탄아궁이
밀고 당기며 갈아 넣다가
뜨거운 연탄재가
흰 보선 안으로 들어가 팔짝팔짝 뛰던 시절
제 할 일 다 한 빈 몸뚱이지만 연탄재를
고무신발로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할 일 다 하려 아등바등 거리는
새댁 비웃는 그가 가시였다
연탄과 연탄 사이 불을 붙여주는 번개탄
온 몸 구멍을 내어 불길 통로를 갖고 있지만
차가운 시집 식구들, 그 사이에서 위아래
불 끼를 나누는 번개탄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었기에
27
제 3부
줄장미
열사흘 달밤에 입술 새빨갛게 바르고
오월 담장을 넘어가고 있는 저 처녀들
어쩌나!
들키면, 들키면
머리카락 싹둑 싹둑 잘려 집안에
갇혀버리고 말텐데
계남동 그 언니
문고리 잡고 가시 일으키며 울다가
여름 벼락을 맞았다는데
신화 속 붉은 가슴들 꽃송이로 피어나면서
봄날을 더 머얼리 밀어버릴 텐데
28
오월, 핏방울
범어산 가는 길목 낮은 철책 담장
바람이 빨간 장미꽃의 피를 빨아 마시는지
핏방울 뚝 뚝 흘리고
그 왕성한 가시들의 틈 비집고 나온
찔레들이 한숨 내쉬다가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산을 바라보고 있다
눈 밝고 귀 밝은 저 시인들 곁에서
눈만 말똥말똥, 제 자리 찾지 못하는
내 눈길 애잔하게 젖는다
30
찔레
담장 위 장미 가시 틈 겨우 비집고 나와 보니
핏빛은 핏빛끼리!
끼리끼리 !
장미들이 서로 목 길게 빼고 구호 외친다
손잡는다
해묵은 색깔론으로 바리게이트를 친다
찔레는 그 상처로 짙은 오월의 향기 만든다
향기는 향기끼리
색깔 지우고 서로 스며들 수 있다며
31
방울소리에 중독되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 시간의 방울을 달고
내 뒤를 따라온다
범어 구민운동장의 오월을
그 수많은 손아귀에 움켜쥐고 싶은 장미들의 짓인가
얼른 뒤 돌아본다
돌담에 기대어 선 찔레들이 제 풀에 놀라
창백한 낯빛으로 손사레친다
다시 발자국소리!
한가하게 운동이나 하며 웃고 있어도 되는가
네가 웃으며 놀고 있는 새
바구미들이 네 쌀자루를 뚫거나
콩 자루를 터뜨리고 있지나 않는가
다그치며 빨리 뛰어 가라 재촉한다
그새 빨간 장미꽃잎들 시들어 진다
다급해진 발자국소리!
장미 가시, 더 억세게 발톱을 세운다
무작정 쫒기며 시의 바짓가랑이에
처용무 그림의 옷깃에 밤새 매달린다
32
얼음을 연주하다
노랑나비 한 마리 칼날로 얼음 긁다가 종내 춤을 추면서 얼음을 연주하고 있다 얼음벽이란 주먹다짐으로 무너뜨리기보다 연아 처럼 사뿐사뿐 그림을 그리면서 종달새 울음소리로, 춘란의 향기로 미소 지으면서 세상의 못 박힌 사람들 가슴 서서히 녹여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듯
36
간통하다
시하늘에서 문인수의 시 ‘姦通’을 낭독하다가
퍼뜩 깨우치는 것이 있다
그래 시인은 외간을 사랑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사랑초 꽃송이 품에라도 들어앉아
아주 뜨겁게 내연의 관계 애걸이라도 해야한다
둘 사이에서 이상한 변종이 태어나
내 멱살을 잡고 늘어지더라도
그 변종을 잘 다듬어 보살펴서
내 시의 신선한 창조물이 될 수 있도록
통, 통, 서로의 비밀스런 정을 글로써
간통簡通해야한다
36
화간
낮엔 새침하더니 요상하다
달빛을 끌어당기는 꽃잎의 눈빛,
오월 담장에 기대어 밖을 살피는 흔하디흔한 장미꽃인데
어느 품이라도 마구 파고들려는 색골
달의 끝없는 곁눈질에 그만 빨려들어 가는 가
따지고 보면 네 것 내 것 그 경계선이 어디 있는가
달빛과 꽃의 은밀한 통정
내연의 부적절한 관계를 엿본다
달빛은 꽃의 도톰한 입술 부피를 만져본다
몇 겹의 꽃잎 헤집으며 자신을 밀어 넣는다
꽃은 더 진한 향 내뿜으며 눈빛마저 붉어지면서
온 몸 부르르 떤다
밤의 내통을 은근히 즐기는 변태스런 관음증
달빛도 꽃도 나무도 다 나의 외간님들이니
어쩌랴, 거부할 수 없는 이 색정
강간이 아닌 원죄를 위한 자연이니
내 시의 길이자 천형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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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근곡 젖다
삼국유사 연구반 유적 답사 가는 길
늦은 봄비 내린다
길가 벚나무들 가지 축 늘어져
그 아래 떨어진 살비듬들 흥건히 젖어있다
오봉산 여근곡 골짜기 검은 선 더 선명하게
온 몸 비틀고 있다
저 절정의 시간 덕에
자연을 키워 갈 씨앗 맺히는 소리 들린다
저처럼 한번 숨넘어가도록 젖어보지 못한 채
누군가 젖어들기를 기다리는
내 사유 짧다, 얕다
갑자기 까르르 웃는 소리 돌린다
하석 시인이
차창에 쪼르르 미끄러지는 빗방울이
꼬리 길게 끌며 움직이는 정자란다
시인들의 거기 젖는다
명자 꽃 보다 더 흐드러지게 핀다
들판의 복사꽃망울 눈뜨기 시작한다
38
첫사랑, 온라인으로 부치다
어느 시인의 손전화가 계좌번호를 알려달란다
온라인으로 날마다
끓어오르는 제 낡은 그림자를 부쳐준다고
멀리 있어도 늘 두리두리 삼삼 팔팔
가슴 속 두근거림 발효되고 있다고
정향 꽃향기 속 봄밤은 멀리 떠나가도
그리움은
방부제 소르빈산을 듬뿍 삼킨 샘물이어서
썩지도 마르지도 않는다며
언제 어디서나 마구 달려든다며
죽음 저 편에서도
이 끝은 어디쯤일지 모른다며, 그는
무선으로 은밀한 떨림 머금고 파고든다
39
다홍치마
명절날, 다홍 빛깔의 치마 한번 입어보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는데
저 치맛자락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며 조선 처녀들의 순결한 피가 묻어 있었다니!
혼이 되어 돌아온 고국의 산에, 들에 숨어 피눈물을 꽃무릇으로 피워내는 것인가
긴 꽃술 끝머리에 그리움 싣고, 차마 부끄러워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40
풍등
바람을 품어 안는 일 그것이
자유라고
교과서도, 여러 말씀들도 다 버린다
마음껏 속 비운 바람을 머금는다
말이 그렇지 속 비운다는 게 그리 쉽던가
욕심을 열정이란 단어로 미화시키며
하늘 오르는 길만 바라보는 내 노구
‘다 비우니까 그리 속 편하더군요’
싸구려 웃음으로 설레발치며
몸은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둥둥 떠돌아다닌다
하늘이 푸른 미소 뿌리며 내려온다
욕망의 날개 단
기도소리 점점 더 파닥거린다
41
포르노, 와글자글
보글보글 짜글짜글
온 몸이 끓어오른다
저 남녀 혼음의 알몸뚱이들
해와 달이 몸부림치며 혼을 섞는 시간
여름동안 머금은
해와 달빛을 발효시킨 흰 꿈들이
다시 멸치 국물과 마늘
풋고추 매운맛과 서로의 색깔을 섞느라
끓어오르며 신음소리 내지른다
몸도 마음도 저렇게 서로 한 몸이 되어야
강물이 넘치거나 말거나
오로지 한 점으로 집중 되어야
혓바닥에서 잘근잘근 씹히며
구수한 몸뚱아리 맛의 정점에 오를 수 있다며
된장뚝배기 체면 몰수하고 헐떡벌떡
자신의 연장, 제 딴엔 거대하게 일으켜 세운다
부르르르! 푸, 푸우
42
연인
서로의 가슴감옥에 갇혀
끓어오르는 저 바다
돌돌 구르며 칡넝쿨로 엉키어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갈기 세운 파도가 되어
서로의 섬세한 벽 때리며 할퀴다가
마침내 물거품이 되면서도
마음도 말도 다 버린 띠집 아래서
꺼지지 않는 불씨
그리움이란 씨앗 하나 재 안에 남겨둔다
43
그림자를 위한 파르마콘*
먹물처럼 속 깊은
음흉스런 저 그림자
다소곳이 따르는 그늘인 척
제 색깔 절대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만 몰래 주인의 빛깔 다 빨아들이면서
시시로 산란하는 시들, 여름 한 낮 연꽃이 누드로 일어서는 낯 뜨거운 늦바람 그림들, 제 주인의 혼신을 모두 내면으로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고자질하기도 하면서
흡수한 그 인생, 제 피로 정제해 단단한 꽃소금덩이로 살리려면 그 주인은 청산가리 같은 외로움에 떠는 가슴 달래줄 시와 그림을 찾아 흰 소의 눈물로 그려야 하리 들꽃 폐차 안으로 별들이 빛 굴리는 소리 들으며 그들의 고단함을 달래주어야 하리
어둠 속 달빛과 햇살 머금은 씨알들 다 줘버린
그 껍질은 끝내 죽어버리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동행은 바로 내 그림자
생의 흔적인 그림자의 빛그늘
그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남을 것이므로
44
제 4부
신 수로부인 뎐
___가물가물 벼랑 위 꽃을 꺾어달라는 이쁜 아내의 수작
아뿔싸! 저 강릉태수 눈뜨고 당했구나
서로 눈 깜박거리며 젊은 상인이 소 한 마리 몰고 노옹처럼 변장
1.'나할 안디 붓하리샤단 곳할 것가 받자보리이다'*
그 절대고수의 수작에 모두 신선이라며 탄복하고 머리 조아린다
이브를 꼬여내는 배암의 눈빛이
수로부인 가슴에 흑장미 꽃송이로 불붙어 화르르 타오르는 것을
2.'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그 사내, 남몰래 아라비아 상선으로 데려가 그녀의 순네
같은 꽃을 하마 버얼써 훔치고 팔아버린 것을
3.'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놓아라
남의 부녀 약탈한 죄 얼마나 큰가'*
안개 속 상선은 꿈의 궁전, 용궁 같기도 했지
지아비 순정공은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
이미 엎질러진 물, 체면은 거북 앞에서 세울 수밖에
향내 뿌리며 무녀처럼 헛소리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한숨 죽이며
FADE OUT*
*향가 헌화가 중에서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미당의 '花蛇' 중에서
*海歌 중에서
*서서히 사라지다
45
육에 갇히다
뽕짝 박자 쿵 짝, 쿵 짝
어디서 총알이 몰리오나 콩죽이 넘치나나
소금 처묵은 미꾸라지들처럼 몸 비틀미
짝 지은 저 군상들 우째 그리 허겁지겁 헉, 헉
하나 둘 셋 넷에 건너가고
다섯 여섯 지나 하나 둘에 돌고
셋 넷 다섯 여섯 발 모으고 제 자리 걷기
하이고 랄한다 또 잊어묵었네
내 팔짜야 와, 여섯까지만 시알리야 하노
몸은 자꾸 일곱 여덟로 돌아가는데 우야라꼬!
손 잡아주는 싸나아 눈치볼라네
무조건 무조건이야 에 휘말려 들어갈라네
지루박 물찬 제비선상님 눈길 피해
말 춤이나 에라 모르겠다 헉, 헉
궁디이 막춤으로 또 숫자에서 벗어났다
남정네들이 여자들 지멋대로 통 속에 가두는 법
언제 맹글었노
시집살이는 춤을 잘 춰야 한다미
뺑빼이 돌리미 인내들 혼을 쏙 빼놓고
맨날 그카다가 귀한 한 평생이
니맛 내맛도 없이 삼류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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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밭에서
해 뜨기도 전 늦잠 잔다 불호령에 벌떡 일어나
아침 이슬 밟으며 삶과 죽음을 사유하거나
철지난 사상계 읽다가 들꽃들과 얘기 나누거나
여름 방학동안 낮 잠 자는 것조차 눈치 보여
헌 부채에 여배우 사진 오려 붙이거나
싱가미싱 돌려 옷감을 박음질해야 급한 성이 차던
네 딸들의 간 잽이, 정 우화
부지런 짭짤 간이 잘 절여져야 세상 빛이 된다던
아버지
그가 생 염전이다 너무 짜다 투정만 부렸으니
내 나이 늦가을 되니 이제 철이 드는가
그 분의 그 때 그런 소금 알갱이 말씀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 반짝, 금빛을 발한다
이제 나의 염전도 잘 가꾸어
멋진 간잽이로 다시 태어나야 할 텐데
갑자기 너무 늦은 깨달음인가 마음이 조급해진다
47
봄바람과 깔깔춤 그 사이에서
뻐덩뻐덩한 나무토막, 내 몸을
카바레 물 찬 제비는 모란 꽃봉오리 쓰다듬는
봄바람처럼 손가락 눈짓으로
제 숨결 가까이 당겼다가 놓는다
가슴과 가슴 사이 불꽃을 화르르 태우다가
꺼질듯 길을 잃다가
하루살이 한 생을 잊어버리기 위해
지르박은 더 흐드러지게 피려 안간힘을 쓴다
실은 흐드러지면서 져야하는 남은 시간
뽕짝리듬 사타구니 사이로 숨긴다
숨긴다고 그 한숨소리 들리지 않으랴만
못 듣는 척 웃는다 까르르, 깔, 깔
바람손길은 웃음 속 공허를 눈치 차렸는지
내 몸을 숨차게 휘익 연달아 두 바퀴 돌린다
그 공회전 속 아흔 여덟의 한 생이 오버랩 된다
수면제 사 모으는 노모의 어둠 골짜기에 갇힌다
“딸아, 하루가 너무 길구나
민들레 차 한 모금 마시는 사이*
하루가
한 생이 간다고 아까워 마라”
* 정 숙의 유배시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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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남해금산
남해금산 돌 속에 그 여자가, 내가 잠들었다고 그는 투정이네
해돋이 모르는 그대 미적지근한 가슴속 차라리 살 떨리도록
캄캄한 바위였어라
금빛 물결 후려치던 짧은 한 생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 그의 타오르는 눈빛 아니면
산이 무너져도 난 기꺼이 석녀가 되어, 그 분의 포효
살아 춤추는 저 관음포 파도 끌어안는 꿈 미치도록 사랑하겠네
49
한 밤중의 손님맞이
나이를 그저 먹는 건 아닌가 보다
해 다 저물 무렵 아마릴리스 꽃 대궁이
불 꺼진 꽃 두 송이 받쳐 들고
중얼중얼 서 있다
사는 동안
나도 누구를 받쳐주거나
한 사람 가슴 뜨겁게 해 준 적 있었는가
투덜투덜 생의 뒤안길 더듬어 보니
시부모님에 대한 내 순정 서럽게 울고 있다
그 울음 달래다보니 병 치례하다 먼저 떠난
그분들이 오히려 날 받쳐준다
"잡사와 두어리마는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 오쇼셔 "*
외사랑이 그립다
*고려가요 중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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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도서관을 뒤지다
창 바깥 산수유나무 한 겨울 살얼음바람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
자세를 고쳐 꼿꼿이 서도록 가지들의 졸음 깨운다 퍼뜩 깨어난
어린 가지들은 그 귀한 말씀들 하늘 노트에 받아 적는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므로 다급하다 그 글자들 삐뚤삐뚤, 그들만의
문화 그것이 하늘을 시시로 변화시킨다
봄만 되면 어김없이 꽃피우는 힘의 뿌리는 어디 있을까 그 바람의
학교와 도서관이 뒷골목에서 노숙하며 자란 아이들에 사랑의 채찍
질한다 냄새 지독한 쓰레기 더미가 주문을 왼다
분명 저 찬바람 속엔 마법이 들어있는 거지
저 나무들과 그 흑인 소녀 카디자도
얼음을 칼끝으로 연주하는 연아도
옛 마녀의 후예들인지 몰라
어금니 꽉, 깨물고 죽음을 삼킨 불꽃들이
겨울바람 속에서 신의 길 찾은 게지
오직 신만이 주문을 걸 수 있다고 믿는 그 능력, 알고 보면
사람, 나무, 심지어 미물까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의지
그 고집스런 지팡이 짚고 선 나목들 꿈의 페이지 뒤적이느라
등허리 점점 굽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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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날개
새벽 잔디밭에서 희색 빛 깃털 하나 주웠다. 9 센티 정도 가늘고 길쭉하다. 누가 떨어뜨린 것일까? 혹 보름 달밤에 만나자던 그, 혼자 서성이다 떠나느라 섭섭한 그리움의 표시일까? 어쩜 그의 겨드랑이에 꿈의 깃털이 나 있었는지도 모르지.
보들레르가 시인은 날개 길이 3,5미터나 되는 알바트로스 새라하지 않았는가? 날개 거대해서 하늘에선 왕자지만 지상으로 유배되면 거추장스런 날개 질질 끌고 다니느라 추해보이는 존재라 했는데 혹 내 어깨에도 날갯죽지가 있었던가?
아무리 추해보이더라도 그런 상상의 날개 자라나고 있어야 그럴듯한 명함 하나라도 만들 수 있을 텐데, 달무리 진 초승달 낯빛에 눈웃음 살짝 그려 넣어줄 수 있을 것인데, 삭막한 미루나무 가지에 달빛옷 한 벌 갈아입혀줄 수 있을 텐데
52
달은 늑대를 깨운다
보름달이 뜨면 그리움이 깨어난다
은근한 사랑눈빛 그득 차오른
달은 늑대를 깨우고, 늑대는 징을 두드린다
어둠을 잠재우는 저 은근한 눈빛이
왜, 늑대의 야성을 깨우는가
우, 우, 우 거친 숨소리가
내 몸속 신전에 횃불을 켠다
그 불빛 따라 찾아오는 발자국
세포 안 숨은 파도들이 갈기 세운다
이성의 손끝이 바람을 태워 잠든 마음거울을 친다
처절하게 깨지면서 유리조각 흐트러진다
그 소리 파장 따라 모무[母舞]를 그린다
고깔과 옷자락에 숨긴 여자, 벗는다
책갈피를 찢는다
점잖은 말씀으로 두드려 맞기만 하던
징은 징채가 되어 닥치는 대로 두드린다
징소리, 소란스런 벚꽃을 피우다가
점점 연꽃 향으로 스러져 다시 징이 된다
두드린 절규들 일어나
스스로 만든 철창에 자신을 가둔다
53
제 5부
엄마 뱃사공
노 젓는다
여린 숨 줄 고르느라 지친
날개의 뼛조각들 모아
미세기, 밀물 썰물이 닻줄 끊어버린
상처투성이 마음속
아무리 저어봤자 늘 그 자리
날은 저물어 가고
닻을 내리는 일
그 화려슬픈 절정은 가물가물 멀기만 하다
노를 놓쳐야 세상이 보인다지만
다 가진 이의 노래일 뿐
다시 노 저어라!
물결 거스르는 연어처럼
온 몸, 마음 피투성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기여차!
54
닻줄은 왜 늘 흔들리는가
밤마다
무지갯빛으로 몸 색깔 바꾼다
파르르 떨고 있는 불빛 아래서
길 잃은 저 향피리
육 박자 리듬에 갇혀 자신의 하얀 공허를 돌려 줄
바람을 찾고 있다
몸 빛깔 더 고와보이도록
식육점 더 붉은 조명을 찾아
흔들리는 거미줄 위에서 스텝을 밟는다
부드러운 봄바람의 손길이라면
오랜 닻줄이라도 끊어버리겠다고
밤새 쓴 단편소설 한 가닥 꼬옥 쥔 채
빈 배를 기다리는 여자
저 따스한 갯바람이
언제 살을 에는 바람으로 돌변할지
아는지 모르는지
55
자인 장에서 상어를 만나다
일연과 원효대사, 설총이 태어나기도 한
경산군 자인장은 짭짤한 돔베기가 지킨다
바닷바람도 멀리 있는데 웬 상어냐
고향 바다 떠나오면서 소금에 쩔어
씹을수록 쫄깃하고 간간한 갯벌 냄새
콤콤 비릿한 삶의 시장바닥 내음
살면서 간 쓸개 다 태워버린
내 모습, 나의 자화상이라 설레발친다
시절 원망하느라 짠 쓴맛만 남아 아직
씹히는 맛도 없지만
초등시절 장돌뱅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운 좋게 엄마를 만나 얻은
유리 브로치에 비친 무지개
그 새파란 바닷속에 비친 영롱한 햇살
밥그릇 수세며 나이 먹는 동안
그 햇살, 무지개 다 잃어버렸다
누가 빼앗아갔느냐
굳은 살 박히도록 손바닥에 꼭 쥐고 있지 못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누가 날 자인장 상어 눈알로 만들었냐
맘 놓고 화풀이 할 수 있는 내 고향
그래서 친정 집 뒷마당 소나무가
엄마가,
백수 다 되도록 그 자리 지키고 있는가
56
비무장지대
그와 내 방 사이 거실엔 온갖 잡초들이 꽃을 피운다. 근 사십년 결혼 생활이 미처 가꾸지 못한 것들 일일이 찾아 대차게 서로 가슴에 못을 박다가, 뽑으려 용을 써다가 쓰다듬다가, 그 한풀이들이 꽃을 피우긴 하는데 아무도 봐주는 이 없어 홀로 지쳐간다. 멋대로 경계선 지워버리고 날아다니는 콩새들의 자유로운 하늘, 멀그니 바라보면서
57
계정숲
오월이
이팝나무 위에서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하얀 물거품들 밀려왔다가 부서지며 술렁이는
저 물결 넘어, 닿아야할 미지의 땅 그리던
어린 시절의 내 가슴 아직 콩닥거리고 있다
한 장군 오누이의 피눈물이
낯선 땅에서 고향의 뿌리 뻗으려 갖은 선 그으시던
아버지의 젊은 맥박이
반짝이는 연초록 잎새들과
올망졸망 꿈을 키우는 제비풀꽃들이 서로 어울려
여름엔 짙푸른 바다 개펄 내 물씬 풍기며
가을엔 잘 익은 단풍 빛으로
제철 따라 다른 빛깔의 파도 일으키면서
손에손잡고 끝없는 삶의 릴레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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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사년 겨울은 종일 햇살을 따라 다녔다
젊은 날은
궂은 비 오는 날이, 한 치 앞 보이지 않는
밤에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좋다고
쓴 커피 한 잔으로 겉멋을 부렸었는데
살다보니, 해가 저문다고 밤이 아니었다
대낮에 갑자기 찾아오는 어둠은
참, 대책 없어 기도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어둠 속 숨어있는
햇살을 찾아내느라 두리번거릴 일 밖에 없었다
중환자 가족 대기실 햇살은 잘 잡히지 않았다
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새로 빠져 나가 숨어버리고
젊은 머릿속으로 피는 흘러내리고
피는 암세포 되어 어미 가슴을 찌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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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병동에서 창경궁을 엿보다
휴게실에서 내려다본 고궁은
마른 잔디들이 갈증을 적시도록 드문드문
흰 눈을 깔아놓고 있다
그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어둠은
옛 궁인들의 투기와 한숨을 꺼내든다
겨울바람에 말리려는지
소나무 가지마다 걸어 놓는다
백여 년 동안 말려도 다 말리지 못한 피비린내
한 생애가 별로 죄 짓지 않고
조용히 살아도 한 순간에 떠나야하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피를 뿌려야했을까
그렇게 몸부림쳐서 행복은 찾았을까
네 것, 내 것 선 긋느라
젊은 머릿속 하나 지키지 못해
그들을 탓할 자격도 없다
어미는 벌 선 자세로 급한 한 생의 구원을
하느님, 부처님, 풀포기에도 간절히 기원한다
60
꽃구경
봄맞이한다며
낙동강, 섬진강 따라 돌고 돌아 집에 도착하니
민서가 ‘예쁜 할머니!’ 하며 와락 안긴다
깊은 바다 물빛 유치원 원복을 입은 손녀
고 함박 웃음꽃 꽃송이 버려두고
종일 어디로 꽃을 찾아 쏘다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내 뜨락엔 장차 큰 그늘이 될
동영, 민규, 곤태, 태하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61
씹히다
매 꼭꼭 씹는다
어금니 맷돌 얼얼하도록
씹어 돌려야 검은 호수의 물결 잠잠해진다
육 십 평생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씹었는데
한 철 잠깐 피어 사람들 가슴 울렁이게 하는
범어산 벚꽃 피는 봄날
문득 내가 씹힌다
말없이 씹히기만 하던 한 생명의 반란인가
쌀 한 톨이 되기 위해 견뎌온
겨우 일 년인 제 생을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래, 내 생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씹어야했던가
목이 메어온다
죄인처럼 늘 세상바람과 오남매의 밑밥으로 씹히다가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이제야 풀려나신
어무이, 이 봉화 여사
국화 꽃잎과 함께 차가운 어일 땅에 묻어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철이 드는가
62
번개탄, 이 봉화 뎐
한 세기 봉화 불 켜들고 남편과 자식들, 아래 위 이웃에 꺼진 불붙이려 동분서주 하던 번개탄, 이 봉화 여사
벚나무 환히 불 밝혀놓고 당신의 생애 불 끄느라 숨결 깊이 몰아쉬더니
땅 속에서 하늘로 길 닦아 세상 어둠에 불붙이려면 봉화, 다시 필요하다며 두 손에 불의 씨앗 될 묵주를 꼭 움켜쥐고 떠나가신다
63
하관
흙 이불 꼭꼭 덮어 누릅니다
백 한 살 삶의 비애 쉬 벗어나도록
외아들이 이미 팔순 노인
순서 거스를까 두려움의 무게 내려놓으시도록
딸들아, 삶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너거들 덕분에 재미있게 잘 살다가 간다
엄마도, 여자도 흙덩이 속에 묻어두고
떠날란다, 날 애타게 부르지도 말아라
하얀 국화꽃 이파리 뿌리오니
엄마, 이 꽃 이파리로 날개 엮어 날아오르세요
일제강점기, 한국동란 그 참혹한 일도 다 엮어
봉화 꽃밭 잘 가꾸셨잖아요
그 아픔들
오목천에서 금호강으로 잘 흘려보내셨지요
하늘 문 열리며
벚꽃 꽃잎들 화르르 날아오르는 날
이십 칠년 동안 기다린 남편, 우화씨 만나 손잡고
색동 옷자락 휘날리며 처용무 맘껏
춤추세요! 어얼쑤! 덩,덩 덩기덕
64
나부상의 눈빛 날마다 폭발한다
-전등사 1
고통이란 금세 길들여지는 것
쪼그리고 앉아 절 추녀 받들며 끙끙대는 것도
잠시, 필요할 땐 언제라도 사랑이란 도구를
쓰는 세상의 남정네들 비웃는 벌거벗은 여인
돈 몇 푼에 마음까지 바칠 줄 믿었던 도목수의
어리석음 바람에 흘려보내고. 밤이면 부처님
신심의 높이 눈 맞추려 꿇어앉는다
발등에 입맞춤 한다
나무속에 갇힌 주모는 몸과 마음
아낌없이 천년 불공을 드리는지 그러나
눈빛만은 날마다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삼존불은 발아래 놓인 불전들 그녀에게 모두
되돌려주지만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아니다
깊은 바다 무늬 진 푸른 몸 장삼 자락이 감추며
무명삼매의 눈 뜬다
석가모니불은 흙탕물 몇 번 가라앉혀야
지장수 된다는 걸 손가락 하나 들어 말없이 보이신다
몸으로는 *간대로 꽃뱀 비늘의 독기 녹일 수 없다는 듯
*함부로
*강화도 전등사 나부상;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주모를
도편수가 나부로 조각하여 절 추녀 밑에 올려놓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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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감옥 깨뜨리며
-전등사 2
서까래 밑 주모의 나부 상에서 살 비린내 밤낮 흐느끼며 법당 안으로 흘러들어 부처님 전에 하소연하다가 돌덩이에서 깨어 제발 눈을 뜨시라고 얼어붙은 온 몸을 입김으로 뜨겁게 불어보다가 제 사특한 불심으로는 어쩔 수 없어 다시 추녀 밑으로 들어가 시지프스의 받침대가 된다
천년을 추녀 밑 배회하며 한 마리 늑대가 된 그 사내, 도목수 산발한 채 바람 되어 흐느끼는 소리에 부처님들 *지즈로 바위 깨트리고 나와 온 몸 돌고 있는 푸른 피톨 내보이신다 그들의 비린 인연 삭히려고 수평선 트여오는 햇살 한 줌 잡으시고 두 가슴 위 말갛게 얹어 미소 지으시며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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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蛇登仙
----전등사 3
사랑이란 저 스쳐가는 바람결 같은 것
천년 시간을 전등사의 서까래 들어 올리도록 발가벗겨 쪼그리고 앉혀진 몸
눈바람이 몰려와 칼끝으로 빗금 그어놓거나 꽃바람이 애무 하다가 찰싹 뺨을 떄리기도 한다
햇발은 그 분홍빛 살결 얼렸다가 녹였다가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법당의 염불 소리는 저승처럼 아스라이 들리고 생밤을 깨물며 돌아다니는 도깨비들과 어울리면서 제 몸에 박힌 가시들을 뽑는다
이 갈며, 알록달록 고운 무늬로 문신을 그려 시시로 풍화되는 몸 길들인다 드디어 몇 천 번의 허물벗기로 거듭 태어난다 나부상의 나무껍질에 갇힌 속 살결 되살아나고 이젠 주모의 솜털 하나하나 눈을 뜬다
추녀 밑 꽃뱀의 전생 모든 인과 벗어두고
지글거리는 지옥의 혀 끊어버리고
한 마리 저승새로 날아오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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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歌
-전등사 4
거문고 가락 눈발에 툭, 끊어진다
그 끈적끈적한 인연의 줄 어쩌지 못해
전등사 처마 밑을 떠나지 못하는
저 사내, 도편수
제 사랑의 깊이 재어보지 못하고 세상의 여자들을 벌레 먹은 장미라며 꽃봉오리까지 마구 짓밟더니
남몰래 새 한 마리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주모보다 자신이 먼저 사랑이란 주는 것이란 걸 깨닫기엔 너무 끈질긴 상처의 깊이와 집착, 달콤한 죽음의 길 찾지 못해 천년 시간은 흐르고
밤마다 꽃잎 질근질근 씹으며 자신이 깎아 만든 나부상의 연옥에 갇혀 너덜너덜 헤진 제 옷자락 쥐어뜯는다 언젠가 세상 한판 뒤집어 볼 바람, 미친바람을 주문으로 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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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취암 단하정사丹霞精捨에서
의상대사가 흠모하던 정취보살
관세음보살의 또 다른 모습으로
대중들 아픔을 다스린다고 조곤조곤 말씀하신다
그 수완스님의 완만한 콧날 능선에 내 눈동자가 앉아
공민왕 시대 역사 현장을 더듬는다
신돈에서 여우의 둔갑술을 익힌
그의 제자들이 세상 지키느라
온갖 모습의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가
지금 피어싱으로 진화되어 전화 한 통화로
땀 냄새나는 돈을 홀랑 홀랑 먹어치운다
이 혼란한 시대 예견해서
산신님 호랑이가 저리 해학적으로 웃고 있는가
붉은 노을이 저문 이내로 내려앉는 가을
희미하던 낮달 얼굴빛이 점점 생기를 얻는다
해는 달에게 빛을 넘겨주고
세상 만물을 다트처럼 둥글둥글 돌린다
오늘의 빛은 그림자 되고, 전설 되어
내일의 빛을 살려 조명하는데
내 생의 그림은 무엇을 지우고 살릴 것인가
정취사 아래 펼쳐진 꼬부랑 고갯길이
파도를 업고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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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울음을 잡다
딸아, 아무리 몸부림쳐도 꽃이 피지 않는다
봄날이 오지 않는다 투덜투덜
꽹과리, 장구 깨지는 소리 따라다니지 말아라
한 생이 자벌레 키 자가웃도 못되는데
그렇게 헤프게 울거나 웃어 보내면 쓰겠느냐
놋쇠는 그런 풋울음 잡기 위해
불 속에서 수없이 담금질 당하고
수 천 번 두드려 맞는단다
주변의 쇠와 가죽 소리를 감싸 끌어안고
재 넘어 홀로 핀 가시연의 그리움 달래주는
징이 되기 위해서
그런 재울음은 삶의 고비 몇 고비 넘기면서 한을 삭히고 달래어 흐르는 물살처럼 부드러운 징채로 두드려야, 목으로 내지르는 쇳소리 아닌 이승과 저승의 경계 허무는 울림 징하게 터져 나오느니
비로소 햇살이 그 소리 비집고 들어 네 둥근 항아리 속 그늘진 도화 꽃 몽우리를 햇살로 피워 올릴 수 있는, 시의 참다운 징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