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의 시는, 좀 고전적으로 말하면 파르마콘(pharmakon)의 시학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파르마콘이라는 그리스어는 원래 약물이자 독이라는 다소 모순된 어의를 가진 것인데, 그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학의 탈을 썼으나 실제로는 무당의 사이비의학 즉 독과 같은 것으로, 그리고 데리다에 의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탈(脫)이항대립적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어떤 힘이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 서로 상반되게 발현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번에 살펴본 정숙의 시 다섯 편으로 그녀의 시세계를 논리화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논법이지만, 적어도 다섯 편의 시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논리는 파르마콘처럼 하나의 힘이 때로는 독기로, 그리고 때로는 희생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시는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독기와, 자신을 제물로 해서 세상을 조화롭고 이롭게 만들겠다는 희생의 이미지 사이를 왕복하는데, 그 속에는 독기와 희생이라는 에너지로 현현되기 이전의 미분화된 에너지라고 할 만한 어떤 힘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파르마콘으로 부르고자 한다.
못 삼키다니요
집도 사람도 못이 박혀있어야
허세 유지하며
꽃을 붙잡고 제 하늘을 담아둘 수 있는데요
전 그 못을 삼키며 젖가슴 부풀리지요
속 할퀴는 말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가시눈빛들이
살아야 할 힘을 불러일으키는
피눈물 밥이 되거든요
잘게 부수어 삼켜도
다시 삼켜도
언제나 팽팽 일어서는 못과
저 벽, 못을 삼키는
벽속에 핀 꽃들
-시 「못 삼키는 여자」 전문
위의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못 삼키”는 독기인데, 그 독기란 앞에서 설명한 말로 풀어보자면 독이자 그 독으로 발현되는 파르마콘이다. 시인이 말하는 독기는 사악한 것, 부정한 것, 혹은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도 사람도 못이 박혀있어야” 때로는 “허세 유지하”고 또 때로는 “꽃을 붙잡고 제 하늘을 담아둘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살아야 할 힘을 불러일으키는/피눈물 밥”이다. 쉽게 말해서 “못 삼키”는 독기는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가로지르는 보다 근본적인 삶의 에너지이다. “못 삼키는 여자”는 바로 그러한 삶의 근원적인 에너지, 즉 파르마콘을 가진 자이다.
시적 화자는 그러한 에너지를 “잘게 부수어 삼”키고 “다시 삼”키는 자, 혹은 겉으로는 독기를 품지만 속으로는 충만하게 느끼는 자이다. 이것이 파르마콘이다. 그것은 독기로 드러나지만, 그 속에는 삶의 충만, 넘침, 끓어오름, 환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시인이 위의 시에서 겨냥하는 시적 소재로서의 독기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파르마콘으로서의 독기를 이렇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다른 방향에서도 해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 한 몸 불살라
겨울 나목들 암실숲에
얼어붙은 정담에 불붙일 수 있다면
그 불씨로
섬과 섬, 얼음벽 사이
푸성귀로 시장 난전을 연 할머니 굳은 어깨에
들불산불 일으켜
산경표 서 있는 길 태워버릴 수 있다면
해종일 제 발가락 촉수들 깨워 일으키느라
서산마루 땅거미 다가서는 소리 모르는
저, 느리게 피어나는
봄 햇살
-「번개탄, 저 봄 햇살」
“내 한 몸 불살라/겨울 나목들 암실숲에/얼어붙은 정담에 불붙”이고 싶다는 이 자기희생의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앞의 시에서 살펴본 독기와 정반대의 이미지로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못 삼키”는 독기가 “살아야 할 힘”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 자기희생 역시 그 “살아야 할 힘”에서 오는 것이다. 번개탄이라는 사물은 원래 자기를 태워서 연탄불을 피워내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도 번개탄은 “내 한 몸 불”사르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얼어붙은 정담에 불붙”이고 “할머니 굳은 어깨”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번개탄의 자기희생 이미지는 곧 자기 죽음을 통해 세계의 살림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살아야 할 힘”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 된다. 쉽게 말해서 번개탄 역시 파르마콘의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다.
하나의 힘을 이처럼 요령 있으면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사유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를 깨닫고 있다는 말이 되고, 나아가서 현상에서 비(非)현상 혹은 본질을 보는 방법을 어느 정도 체득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러한 파르마콘의 시학은 시인이 부모를 바라보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파르마콘으로서 각각 독기와 자기희생으로 표현된다.
깊이도 넓이도 끝도 알 수 없는
세상 어둠산을 통 채로 이고지고
파도와 맞서 깨지고 자빠지느라
그래도 다시 일어서야 하느니
이 악물면서
당신 곪아터진 상처 돌아볼 겨를 없던
아흔 다섯 고사목 내 어머니
-시 「세상에서 가장 큰 산을 지고 온 여자」 부분
그 누구신가요?
끝 모를 그리움을 찾아 나서거나
한 끼 가족의 풀칠을 위해
가파른 팔조령 호랑고갯길 무작정 달려야 하는
눈에 불을 켠 저 배고픈
치타들에게
막힌 생 몸뚱아리 뚫어 지름길 내어주는
당신은
지상의 청정법신이신가요
-시 「터널 속에서」 부분
두 편의 시에서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산을 지고 온” 독기를 지닌 여자로, 그리고 아버지는 “막힌 생 몸뚱아리 뚫어 지름길 내어주는”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아버지로 표현된다. 다소 상반되게 생각되는 이 두 이미지는, 시인의 시적 논리인 파르마콘이 어떻게 현현되는지를 잘 나타낸다. 생의 근원적인 에너지는 두 방향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시에서 어머니는 독기를 품은 여자로 표현된다. 어머니는 “깊이도 넓이도 끝도 알 수 없는/세상 어둠산을 통 채로 이고지고//파도 맞서 깨지고 자빠지느라/그래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여자, 즉 “못 삼키는 여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에서 아버지는 “한 끼 가족의 풀칠을 위해/가파른 팔조령 호랑고갯길 무작정 달려야 하는//눈에 불을 켠 저 배고픈/치타들에게/막힌 생 몸뚱아리 뚫어 지름길 내어주는” 남자, 즉 “내 한 몸 불”사르는 번개탄인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는 방식은, 물론 거꾸로 표현될 수 있는 문제이다. 어머니는 독기를 품었지만 그 속에는 자기희생이,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희생이 있지만 그 내면에는 독기를 품은 자일 것이다. 다만 시인은 때로는 이것으로 그리고 때로는 저것으로 표현하면서 생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자신의 시적 소재에서 드러나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의 현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의 에너지, 즉 파르마콘인 것이다.
찰칵!
찰칵! 색의 역사는 그 꽃잎 속 암실에서 시작된다
내 시어의 심장이 옷을 벗는다
꽃은 철저한 저 스토커 시간을 끌어안아
제 몸빛에 입힌다
빛살 한 점에서 찰칵!
드디어 타오르는 어둠을 살려낸다
-시 「색파라치 파파라치」 부분
이렇게 볼 때 위의 시는 생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환희의 순간을 보여주는 비유로 읽을 수 있다. “꽃잎 속 암실”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생의 근원적인 에너지, 즉 실체적인 생으로 미분화된 에너지의 상태일 것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그 생의 에너지가 겉으로 표출되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분화되는 것이다. 미정형의 에너지가 정형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색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시어의 심장이 옷을 벗”는 것, 즉 언어화되는 것이다. 시인은 “꽃은 철저한 저 스토커 시간을 끌어안아/제 몸빛에 입”히는 그 숨막히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드디어 타오르는 어둠을 살려”내는 것, 그것은 시인이 몰래 사진을 찍는 파파라치가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환희요, 충만이요, 기쁨이요, 진실일 것이다.
이름-강정구(姜正求)
약력-2004년 계간 ????문학수첩???? 신인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주요 글로 ‘1970-90년대 민족문학론의 근대성 비판’,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민중시관 재고’ 등이 있음. 현 경희대 강사.
주소-경기도 의왕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