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문인 흔적 을 찾아서
정 숙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한국 모더니즘 시의 효시라고 하는 ≪학조學潮≫ 창간호(1926.6)에 실린 정지용 시인의 시 ‘카페·프란스’의 부분을 읽으면서 기행문을 시작해보려 한다.
우국시인님들 덕분에 선물받은 유월 아침이 온 전신에 붉은 줄장미 넝쿨을 두르고 환호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대단한 회원분들이 종일 함께 한 곳을 바라보고 정겹게 이야기하며 제각기 멋진 포즈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인연을 응원 하고 있었다. 동행 대부분 오랜 친분을 쌓은 분들이라 하루가 더 정겹고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섭섭하지 않도록 마음이 쓰여 스스로 본전을 찾아야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가는 길에 정지용선생님에 대한 발표를 필자가 버스에서 하도록 되어 있어 미리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향수’라는 시 한편으로도 할 말이 많지만 몇 년 전 전국시인들이 모인 지용강당에서 시인들 시낭송대회를 열어 대상을 수상한 추억이 새삼스레 소중하기도 했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은 연일 정씨 문정공파로 필자와 같은 포은선생의 자손이라는 점이 반가웠다. 1902년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나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릿쿄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서구 문학과 현대시를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지사적인 저항시가 없어 우국시인 대열에 서지 못했다. 대신 순수서정성과 모더니즘의 조화를 이루며, 한국 시문학의 현대화를 이끈 시인으로 작품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고향 옥천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많은 시에 반영되어 있는데 실제로 기념관 앞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대표작 <향수>에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노래한 시 내용에 진정성이 더욱 느껴졌다.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전통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한국적 한의 정서에 서구적 묘사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특한 시세계, 그것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의 조건이다. 그러한 감동은 필자의 작시에 대한 욕심이고 꿈이어서 부럽기만 하다. 시는 감동을 주거나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않겠는가?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학교 선배인 정지용을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고, 유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 서문을 정지용이 쓴 인연이 있다고 한다. 또한 김광균,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한국 시문학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전하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혹은 스스로 월북했다는 얘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 시점과 방법은 명확하지 않으나, 대부분 1950년 무렵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기림, 임화, 백석, 이용악, 오장환 등 그 시대 월북문인들 작품은 읽기가 금지 되었었는데 1988년 7월 해금조치가 되어 문학사의 복원이 가능해졌고 정지용의 작품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 모험이랄 수 있는 박인수 성악가와 이동원 가수의 <향수> 듀엣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월북 문인들 해금에 도움을 준 시인이 그 당시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회의원이었던 김춘수 시인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기품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육영수 옥천생가를 돌아 15시 30분 쯤 ‘심훈기념관’에 도착했다. 필자의 <야시골 문학회> 수업 시간에 「상화」 4호에 실린 이경철 시인의 ‘심장의 파수병인 심훈의 필경과 독립투사 지사연’ 글을 미리 강의하고 간 것이 참 다행이었다. 심훈은 소설 상록수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의외로 시와 소설 영화인으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시편들에 모두 감동을 받지않을 수 없었다.
심훈(1901년 9월 12일~1936년 9월 16일)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와 소설을 썼다. 본관은 청송. 본명은 대섭, 아명은 삼준·삼보. 호는 해풍. 백랑이라는 별호도 사용했다고 하며 짧은 생을 필경으로 인생농사를 지은 사람이며 ‘시인, 소설가, 평론, 수필, 시나리오 작가, 독립운동가, 영화인’이라는 이경철 시인의 표현처럼 그야말로 붓으로 삶과 시대를 일구다가 깨끗이 산화한 문자 그대로 기자며 필경인이었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날이요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철필 창간호에 실린 시 필경 부분’
결국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조선일보 신문사에서 쫓겨나 1932년 당진으로 낙향하여 필경사란 택호를 걸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상록수」 등 장편소설을 왕성하게 쓰다 35년이란 생을 깨끗하게 마감했다는 말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래서 심훈기념관에 들어가면 필경사가 있고 입구 큰 붓이 서 있어 그 의미를 모르는지 모두 눈여겨보지 않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심훈이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쓴 편지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 중 한 대목을 읽어본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썼을 망정 난생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나 들어가는 듯 하였습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당시 명문고인 경성제일고보에서 퇴학 당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심훈선생님의 담대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가장 궁금한 것은 그의 문학 활동인데 1930년대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김기림, 김광균 등의 모드니즘파 시인들과 현대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로 현대인의 심상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드러내려 하였다. 그러다가 심훈은 순수서정문학에서 벗어나 지사적인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지사연한 자세로 각 문학 장르의 글밭을 일궈나갔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다음 시를 읽다보면 실제상황에 직면한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온다. 그것은 그의 글 전면에 나타난 간절한 진정성이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어받아 올리오리다
― 그날이 오면 [부분]
마지막 행선지는 삽교호 바다공원, 1976년 12월에 착공하여 1979년 10월 26일에 완공한 박정희 대통령 생전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던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 이후 그날 밤에 서거한 사건을 생각하고 대교를 건너 돌아오는 버스 뒤를 노을이 줄기차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 노을이 고함치 듯 하는 말을 필자의 졸시 한수로 즐기며 하루 중 놓친 것 없는지 뒤돌아본다. 그 밤의 축하잔치에 무슨 일 있었을까?
삽교호 바다공원을 지나오면서
― 정 숙
달려온다
악착보살처럼 이 악물고 뒤 따라온다
생각없이 왔다가 가는 검은 버스 뒤
노을이 계속 따라오면서 고함 지르고 있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그리웠던지
그 시절 할머니처럼 훌쩍이는지
하늘이 붉다
하늘과 바닷물까지 딸들의 서답 모아 흔들어 빠는 듯
그동안 고여 있던 궁정동 피바람이 왈칵 쏟아지는 듯
하늘도 바다도 주위 건물들까지 물들인다
서로 말없이 스며든다
꿈의 날개 활짝 펼치던 그날 밤
그 노래 소리와 술 파티 여직 아쉬운지
해는 가라앉지 않으려 버둥거리고
철없이, 난 손뼉을 치고 있다
편 집 후 기
정 숙(시인)
편집위원장
2025년 상화 5집은 전국 문인들과 젊은 문인들까지 골고루 청탁 드리려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동안 상화 시인상 수상하신 분들의 작품을 특집으로 실었습니다.
귀한 원고 흔쾌히 보내주신 분들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바쁜 시간 중에도 편집에 참여해 주신 최규목 고문님, 고경아 이사님, 김학조 이사님, 장의동 이사님 고생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상화기념 행사와 더 나은 상화 5집 발간을 위해 전전긍긍하신 장두영 이사장님과 부이사장님들, 그리고 이사님들의 노고에 박수와 감사를 드립니다.